계절을 앞서 사는 농부

[유하네 농담農談]

  슈퍼 점프 [출처: 이꽃맘]

고추랑 뜨겁게 안녕

고추를 뽑습니다. 늦봄부터 여름을 지나 초가을까지 함께 했던 고추를 뽑습니다. 작은 나무만큼 자란 고추 줄기에는 풋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지만 뽑아내야 합니다. 다음 작물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고추가 겨울을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하 엄마는 풋고추가 아깝기도 하고 잘 자란 고추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해 한마디를 던집니다. “그러게 그럼 매년 새로 심지 않아도 되고 좋을 텐데.” 유하 아빠도 웃습니다. 아열대 식물인 고추는 한국에서 겨울을 날 수 없습니다.

올해 고추는 참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시기를 맞춰 심었지만, 유난히 추웠던 봄 날씨 때문에 고추가 자라지 못했습니다. 일찍 심은 고추들은 냉해를 입기도 했죠. 요즘은 대부분 고추 농사를 비닐하우스 안에서 하지만 유하네는 노지에 고추를 심습니다. 비닐하우스를 지을 만큼 큰돈이 없기도 하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비닐 사용을 최소화하자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날씨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고라니가 와서 고추의 여린 순을 다 먹어버렸습니다. ‘악! 악!’ 밤이면 들려오는 고라니 울음소리에 “다른 풀도 이렇게 많은데 왜 고추를 먹는 거야”라며 원망을 늘어놓으니 “고라니도 맛있는 걸 좋아하는 거지. 어쩌겠어”라며 유하 아빠도 푹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결국 다른 농부들은 본 줄기를 위해 가차 없이 꺾어버리는 곁가지들을 소중히 키워내 고추를 땄습니다. 고추가 넘어지지 않게 묶어주는 줄을 튕기기도 힘들고, 곁가지가 땅으로 늘어져 고추 열매가 땅바닥에 구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 식구들이랑 나눌 양만큼의 고춧가루를 만들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기후도 위기, 절기도 위기

농부가 된 후 유하네는 계절을 앞서 삽니다. 농부들은 계절을 앞서 삽니다.

고추를 뽑아내고 내년 늦봄에 양파와 마늘을 수확하기 위해 땅을 갈고 고랑과 이랑을 새로 만듭니다. 마트에는 제철과 상관없는 열매들이 가득하지만, 농부들은 계절을 앞서 삽니다. 6월 하지감자를 캐기 위해 땅이 풀리는 3월 초 중순에 씨감자를 심습니다. 가을 고구마를 캐기 위해 늦봄에 고구마 싹을 심습니다. 늦가을과 초겨울 김장 때 가장 많이 쓰는 고춧가루를 만들기 위해 뜨거운 여름을 보냅니다. 내년 5월 중순 양파와 마늘을 캐기 위해 농부들은 겨울을 앞둔 10월 말에 양파 싹과 씨마늘을 심습니다. 유하네도 2천 개가 넘는 양파 싹과 3천 개가 넘는 씨마늘을 심습니다.

  예쁜 양파 싹 [출처: 이꽃맘]

계절을 앞서 산다는 것은 예상할 수 없는 날씨를 예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경험을 토대로 절기를 만들었습니다. 절기에 맞춰 살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지구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금은 절기가 무색합니다.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던 8월 말 유하네는 김장배추를 심었습니다. 10월 말에서 11월 초, 늦가을에 일 년 먹을 김치를 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 겁니다. 올해는 때에 딱 맞춰 잘 키워보자는 마음으로 막바지 기세를 올리던 풀들을 치우고 밭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심어놓은 배추 싹들이 참 예뻤습니다. 대부분 그랬듯이 늦여름, 초가을의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날씨가 배추를 잘 키워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구에 위기가 닥친 지금, 날씨도 자꾸 예상을 빗나갑니다. 가을장마가 몰려왔습니다. 가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습한 날씨와 이어진 폭우. 배추밭이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유하 아빠가 배수로를 열심히 팠지만 워낙에 물이 많은 밭인데 거의 한 달 가까이 햇빛을 볼 수 없었으니 배추가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배추가 자라야 할 시기에 갑자기 한파가 몰려왔습니다. 64년 만에 몰려온 초가을 한파라고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밤 온도가 영하 5도까지 내려갔습니다. 급하게 무와 배추에 보온재를 덮어주었습니다.

결국 배추는 병이 들었고 올해 배추 농사는 한마디로 ‘폭망’입니다. 뉴스에서는 한파로 채솟값이 폭등했다고 하고 햄버거에서는 양상추가 빠졌다고도 합니다. 농사가 잘될 때는 채솟값이 떨어져 돈을 못 벌고 이런 날씨에는 팔 채소가 없어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유하네도 이번 김장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자!

주말입니다. 주말에는 주현이가 놀러 옵니다. 유하네에서 멀지 않은 시내에 사는, 세하와 동갑내기 친구입니다. 엄마가 우리 마을에서 하는 사회적 농장에 참여하고 있어 주현이는 엄마가 농사를 짓는 동안 세하랑 함께 놉니다.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만나는 동갑내기 세하와 주현이는 “슈퍼 점프!”하며 미끄럼틀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잠자리채를 들고 잠자리를 쫓아다니기도 합니다. 옆집에 있는 소도 구경하고, 땅에 있는 풀을 뽑아 다른 곳에 다시 심어주는 놀이도 합니다.

자기 먹거리를 직접 키우고 싶어 하는 주현이 엄마에게 우리 밭 한 귀퉁이를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농사에 관심을 보인다는 소식에 사회적 농장의 선생님인 유하 아빠가 앞으로도 계속 농사를 지으라며 밭을 빌려준 것입니다. 농사에 관심을 보였던 유하 친구네에게도 빌려줬던 밭입니다. 주현이 엄마는 주현이 아빠까지 데리고 와 풀을 걷어내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양파와 마늘을 심었습니다. 유하 엄마는 얼른 가지 차를 들고 나오고, 고구마 밥에 가을 달래장을 만들어 함께 점심을 먹습니다.

농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유하 엄마와 아빠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우리 밭을 빌려줄 테니 함께 농사를 짓자고 제안합니다. 작은 밭이라도 함께 일구며 땅의 소중함, 하늘의 소중함, 농사의 중요성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농사를 지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여느 교회 전도사 못지않습니다.

동네 도정공장에 다니는 삼촌에게도 대추밭 한 편을 내어주고, 옆집 아저씨의 형님이 퇴직해 내려오자 얼른 집 앞 밭 한 편을 내어줬습니다. 삼촌은 갓이며 무를 키워 김치를 담고, 내년을 기약하며 양파를 심었습니다. 옆집 아저씨의 형님은 배추를 심어 김장을 준비합니다. 옆집 아저씨의 형님은 농사가 체질인 것 같다며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합니다. 작은 농부들이 늘어납니다.

작은 땅이라도 일구는 작은 농부들이 많아지면 위기의 지구를 살려내는 데 작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예상할 수 없는 지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땅을 지키고, 하늘을 지키는 작은 농부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농부들의 노력이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작은 농부 유하네는 양파 싹과 씨마늘을 들고 예상할 수 없는 계절을 앞서, 반짝반짝 빛나는 내년 봄을 기다리며 밭으로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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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작은 땅이라도 일구는 작은 농부들이 많아지면 위기의 지구를 살려내는 데 작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예상할 수 없는 지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땅을 지키고, 하늘을 지키는 작은 농부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농부들의 노력이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작은 농부 유하네는 양파 싹과 씨마늘을 들고 예상할 수 없는 계절을 앞서, 반짝반짝 빛나는 내년 봄을 기다리며 밭으로 나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