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건설 노동자, 존엄하지 못한 삶과 죽음

[질문들]


새해가 되어 부모님 댁에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오랜 이웃이 코로나19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어르신께서 앓고 있던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갔고 코로나19 검사를 했더니 양성이어서 바로 입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열흘 만에 돌아가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이별해야 했을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감정의 깊이와 크기를 감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들이 겪었을 시간을 짐작하니 마음이 아팠다.

말할 수 없는 죽음

감염병 시대의 죽음과 이별은 상실과 슬픔의 자리에 다른 감정들을 들여놓게 한다. 양성 판정을 받자마자 입원을 했으니,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환자는 홀로 견뎌야 했을 것이다. 병실에서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을 것이고, 임종 순간까지 함께 머무르기도,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혹은 가족이 밀접접촉자가 돼 자가 격리됐다면 눈조차 마주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환자의 곁에서 쾌유를 기원하며 가족이 서로 마음을 나눌 시간도 없었다면 이들의 가슴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장례도 보통의 장례와는 다르다. 정부는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선(先) 화장, 후(後) 장례’ 지침을 세웠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사망자로부터 감염될 위험이 거의 없다는 입장이다. 사체를 통한 전염성의 과학적 근거가 미비하고 고인과 유가족의 존엄한 작별을 위해 지침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1월 27일에서야 ‘선 장례 후 화장’으로 지침이 개정됐다. 정부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응 지침’ 중 사망자 관리 목적은 “코로나19 사망자에 대한 ‘신속하고 원활한 시신처리’ 및 장례지원으로 ‘감염 확산 방지 및 사회 불안 요인 차단’”이다. “사망자의 존엄과 예우를 유지하며 유가족의 뜻을 존중하는 신속하고 체계적인 장례지원 실시”가 원칙이지만, 그동안 모든 과정은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한 ‘선(先) 화장, 후(後) 장례’ 실시로 향했다. 유가족의 동의를 구한다지만 보건소는 화장을 권고토록 안내하는 것이 평상시 업무이고, 의료기관도 감염방지를 위한 시신처리 방법을 설명하고 사전 동의를 구하는 것이 업무로 규정돼 있는 상황에서 유가족의 뜻대로 이뤄질 수 있는 건 없었다.

물론 지침은 사망 시 유족의 의견을 반영해 충분한 애도 시간을 보장하는 것을 필수사항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임종이 다가오는 때가 유일하게 고인과 가족이 함께 할 시간일지도 모른다. 사망하면 고인은 의료용 팩에 밀봉된 채로 병실 밖으로 나와 관에 안치되고 밀봉된다. 영구차까지 관을 옮기는 운구도 가족이 아닌 장례지도사가 진행한다. 장례지원반의 업무는 사망자 화장시설 예약 지원이고, 유족에게 장례비용을 지원하는 목적도 “사망한 자의 ‘시신을 화장함으로써 감염병 확산 방지’ 및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사망에서 장례에 이르는 동안 애도와 추모의 마음을 담을 과정이 없다. 죽음은 존엄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인에 대한 존중과 유가족에 대한 위로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행정절차는 마치 세상을 방역수칙으로 지배하려는 의지처럼 느껴진다.

낯설고 당황스러운 이별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위로는 받았으려니 싶어 장례식이 어땠는지를 물었다.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는 엄마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코로나19와 함께 살아온 지도 벌써 2년째다. 이제 공포와 혐오가 옅어지고, 인식과 태도가 변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엄마는 확진된 사람이 입을 다물어도 동네에서 말이 돈다고 했다. 코로나19 시대의 죽음은 감염 환자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감염을 확인한 친구가 주변에 이야기하기 꺼려졌다는 말이, 가족처럼 가까운 지인이 코로나19로 사망할 때까지 몰랐다던 고모의 한탄이 생각났다. ‘병은 알리라’는 옛말은 코로나19를 겪는 현재 오히려 금기됐다.


이윤과 교환된 삶

새해부터 죽음의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력 하청 노동자 김다운 씨가 고압 전류에 감전돼 치료받다 사망했다. 2인 1조의 팀도, 절연장갑도, 절연고소작업차도 없었다. 신고할 사람조차 없어 그는 감전된 채 홀로 전봇대에 매달려있었다. 안전조치 하나 없이 위험한 노동을 지시한 기업은 죽음 앞에 책임을 미루기 바쁘다. 한전은 하청업체에, 하청업체는 사망한 노동자에게. 하청업체는 “13만5천 원짜리 단순 공사라, 꼭 2인 1조로 해야 하는 게 아니고 (…) 문제가 없다”라고 했다. 죽음 앞에서 이윤을 먼저 말하는 기업이라니. 죽음에 대한 최소한 예의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그의 노동에 대한 존중도 없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난해 공공기관 가운데 사고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한국전력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전력의 사망자 대부분은 ‘발주사’로 분류된 하청 직원이었다. 2016~2020년 산재 사망자는 39명인데, 본사 직원은 단 한 명뿐이고 38명이 발주사 직원이었다. 39명의 죽음이 이어지는 동안 한국전력은 무엇을 했을까? 한국전력은 고 김다운 씨 사고 66일 만에야 대책을 내놓았다. 그 중 ‘1공사현장 1안전담당자 배치’ 방안은 도급 공사비 2천만 원 이상 공사에 적용하겠다고 한다. 또 비용이 나온다. 그런데 2020년 한국전력 발주 전기공사 중 97.3%가 2천만 원 미만이고, 66.7%는 5백만 원 이하 공사다. 13만5천 원짜리 공사에 투입된 또 다른 노동자들은 홀로 목숨 건 노동을 해야 할지 모른다.

지난달 11일, ‘로또’라며 웃돈 4억 원이 붙었던 광주 ‘화정 현대아이파크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붕괴 사고가 발생해 6명이 실종됐다. 12일에는 인천 ‘힐스테이트송도 더스카이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콘크리트 기둥의 철제 덮개 해체 작업 도중 노동자가 철제 덮개에 맞아 사망했다. 13일에는 인천 송도국제도시의 랜드마크 타워가 ‘국내 최대 151층 인천타워’가 아닌 103층으로 발표되자 주민들이 계획 변경을 요구하며 삭발 시위와 천막농성 등을 예고한 뉴스를 봤다. ‘더 높게, 더 비싸게’를 주문하며 화려하게 반짝이는 도시의 빛에 매일 쓰러지는 노동자의 노동과 삶은 가려진다. 저마다 고유의 빛을 지녔을 삶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시의 빛보다 빛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이윤의 빛에 쏠려있기 때문이다.

존엄한 죽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음 이전의 삶 역시 존엄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새해부터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 삶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 존엄한 삶의 끝에 존엄한 죽음이 있다.
태그

존엄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랑희(인권운동공간 활)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문경락

    존엄한 죽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음 이전의 삶 역시 존엄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새해부터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 삶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 존엄한 삶의 끝에 존엄한 죽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