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원하지 않은 여성 혁명가, 최영숙의 허망한 꿈

[혁명의 세계, 반란의 역사]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로 알려진 최영숙(1905-1932)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의 첫 여정은 여느 독립운동가나 혁명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신여성’들은 조선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해외 유학을 선택했고, 그 수는 점점 증가했다. 이들은 유럽, 미국, 일본, 중국 등 다양한 지역에서 유학 생활을 한 뒤 귀국해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최영숙의 이력이 독특한 것은 그가 중국을 거쳐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귀국 후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너무 짧고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마르크스주의자, 최영숙

1919년 3·1 운동 당시, 최영숙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3·1 운동의 영향은 최영숙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다른 혁명가들처럼 1922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남경이었다. 그곳은 조선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근대도시이자, 항일 투쟁의 본거지였던 상해와 인접한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인 유학생이 상당히 많았다. 최영숙은 명덕학교를 거쳐 회문여자학교에서 중학 과정을 다시 밟았다. 그는 그곳에서도 발군의 학생이었다. 영어와 독일어 능력은 출중했고, 성악과 피아노 실력도 뛰어났다.

당시 최영숙은 처음으로 외부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됐는데, 바로 흥사단이었다. 마침 상해에 있던 흥사단이 남경으로 이전했다. 최영숙은 1924년 5월부터 흥사단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기록에 따르면 흥사단은 매우 까다로운 가입 절차와 조건을 두고 있었는데, 최영숙은 단원으로서 큰 결격 사유 없이 자격을 갖췄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흥사단 활동의 연장선에서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7월, 그는 상해에서 대련을 거쳐 스웨덴으로 가던 중 체포됐다. 이유는 사회주의 서적의 과다 소유였다. 이렇듯 스웨덴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그녀가 관심을 두고 공부한 것은 사회주의 사상이었다. 이는 스톡홀름에서도 계속됐다.

스웨덴과 인도에서 해법을 모색하다

그런데 사회주의를 탐구했던 식민지 학생은 왜 러시아가 아닌 스웨덴을 선택했을까?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스웨덴 사상가인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다. 그는 1920년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서양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엘렌 케이는 스웨덴의 여류작가로 문학, 예술, 종교, 정치, 여성 참정권, 결혼 등 넓은 분야에 걸쳐 글을 쓰며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동아시아의 신여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초반에 이미 동아시아 전체에 그 이름이 알려졌고, 최영숙도 엘렌 케이의 저서를 접하고 탐독했다.


최영숙은 엘렌 케이가 자주 다루었던 육아, 가족, 연애 등의 주제보다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특히 여성 노동자 삶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사회주의 건설에 여성 노동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을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스톡홀름 대학의 교과과정은 사회주의 이론보다 사회 경제학, 노동자와 복지 등 실용주의적 학문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도 최영숙은 사회주의에 관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웨덴에 도착한 최영숙이 가진 것이라고는 사회주의 서적 몇 권과 큼지막한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토록 원했던 엘렌 케이 또한 만날 수 없었다. 엘렌 케이는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출발하기 몇 달 전인 1926년 4월, 이미 고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스웨덴에 유학을 온 첫 동양인이었다. 스웨덴에서 최영숙이 만난 동양인이라곤 중국 대사와 그의 아내가 전부였다. 대학 친구들은 친절했고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친구들과 어울려 수영도 하고 스키도 탔다. 스웨덴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럴수록 외롭고 쓸쓸했다. 피곤하고 가난했다. 너무 가난해서 학비를 손수 마련해야 했다. 식민지 조선을 생각하면 사치스러웠다.

스웨덴 여성 노동자를 보면 조선의 여성 노동자가 겹쳐졌다. 성 평등이 실현된 스웨덴 여성 노동자의 생활이 매우 부러웠다. 여성해방, 노동해방에 대한 고민이 점점 쌓였다. 그래서 유학 기간 조선의 실정을 알리는 활동을 계속했다. 최영숙은 한국의 실정을 신문에 싣거나 강연회 등에서 발표했다. 〈스톡홀름 다그블라드(Stockholm Dagblad)〉에 ‘행복한 행복한 스웨덴 여성들’(‘Lyckliga Lyckliga Svenska Kvinnor’, 1927.11.14.)을 실었다. 그리고 ‘동양 여자의 해방운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 등 스웨덴의 매체를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리고 일제 강점 하의 상황을 고발하고자 노력했다. 최영숙은 조선을 전혀 접할 기회가 없는 스웨덴 사회에 조선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1931년 봄, 5년이라는 긴 유학 생활을 마치고 최영숙은 귀국 길에 올랐다. 조선으로 가는 도중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아시아 각국을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주목할 부분은 인도 방문이다. 스웨덴 국제회의에 참여했을 때 편지로 교분을 나눴던 인도의 여성 운동가 사로지니 나이두(Sarojini Naidu, 1879~1949)를 만났고, 이 인연으로 인도에서 4개월간 체류하며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최영숙의 인도 방문 목적은 바로 나이두와 간디 두 사람이었다. 인도는 그에게 이상적인 모방의 대상이었다. 식민지 상태이긴 하지만 인도에는 간디와 나이두 같은 구심력 있는 지도자가 있었고, 그들이 이끄는 국민회라는 민족적 단일 단체가 있었다. 그리고 범국민적 차원에서 대중운동 또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에게 인도는 조선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출구였다.

식민지 조선은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1931년 11월 드디어 최영숙은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미리 가입해 둔 동우회의 경성여자소조에서 활동했다.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 운동과 노동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좌담회와 강연회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나, 대공황 등의 여파로 취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유학하는 동안 가세도 많이 기울어 가족들을 책임져야 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스웨덴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고 국제적 네트워크를 갖춘 역량이 있었지만, 식민지 조선은 여성인 그에게 일할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낙원동에 있던 여자소비조합을 인계해 사람의 왕래가 잦은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조그마한 상점을 빌려 장사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배추, 감자, 미나리, 콩나물 등을 팔았다. 그러다 1932년 4월 23일, 귀국한 지 채 반년도 되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너무 허망한 죽음이었다.

최영숙은 여성이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 무엇보다 여성 노동자의 삶을 바꾸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스웨덴과 인도의 사례가 식민지 조선에 적합한지는 또 다른 차원에서 검토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 지식인이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민족주의자인 최영숙이 식민지 조선에서 뜻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원하지도 않는 조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는데 말이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참고 자료>

-우미영, 신여성 최영숙론 -여성의 삶과 재현의 거리-, 《민족문화연구》 제45호, 2006
-이효진, 스웨덴 소장 신여성 최영숙 관련 자료 소개(1), 《이화사학연구》 62권, 2021
-이효진, 신여성 최영숙의 삶과 기록: 스웨덴 유학 시절의 신화와 루머, 그리고 진실에 대한 실증적 검증, 《아시아여성연구》 제57권 2호, 2018
-전봉관,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신동아》, 2006년 5월호
-최영숙, 《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콩나물 팔다 세상을 뜬 경제학사》, 가갸날, 2018
태그

인물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배성인(성공회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문경락

    최영숙은 여성이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 무엇보다 여성 노동자의 삶을 바꾸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스웨덴과 인도의 사례가 식민지 조선에 적합한지는 또 다른 차원에서 검토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 지식인이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민족주의자인 최영숙이 식민지 조선에서 뜻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원하지도 않는 조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는데 말이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