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총파업, 그리고 가사 노동의 가치

[3·8 국제 여성의 날 특집①] 여성이 멈추자 세상이 멈췄다

차례

① 최초의 여성 총파업, 그리고 가사 노동의 가치
②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③ 변혁 전략으로서 ‘돌봄 혁명’―가브리엘레 빈커
④ 돌봄 노동, 여성 그리고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
⑤ 직접 제공을 거부한 정부, 민간이 탐낸 ‘가사·돌봄’
⑥ 돌봄 시장에 뛰어든 대기업, ‘언택트’가 미래다
⑦ 가사·돌봄 노동이 사회화된 세계는?

[출처: https://icelandmag.is/sites/default/files/styles/lightbox/public/thumbnails/image/screen_shot_2016-10-24_at_10.57.27.png?itok=QUGUG1WJ]

“여성은 예비 인력입니다. 고용주의 상황에 따라 일터에 불려가거나 집으로 보내집니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테이블에 같은 일을 하지만, 다른 급여를 받습니다.

저는 몇몇 사람들이 여성을 궁지에 몰아넣고, 모든 권력을 빼앗고 싶어 하며, 심지어 여성을 부엌에 감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압제할 수 있는 건 인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평등을 원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는 남성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세계 최초로 여성이 합의에 도달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나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이 올 것입니다. 여성들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남성이 세계를 지배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로 흠뻑 젖었고 고통으로 타올랐습니다. 저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통치할 때 이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세상을 무장해제 시키길 원한다고 믿습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은 세계가 붕괴 직전이라고 말합니다. 지구는 부주의하게 짓밟히고, 자연의 법칙은 무자비하게 위반됐으며 인류는 공해로 질식하고 있습니다. 나는 10년 후 우리가 이곳에서 더 많이 만날 것이며, 우리가 지지하는 평등, 진보, 평화 같은 단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1975년 10월 24일 오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바트 광장. 가사 노동자 아달하이두르(54)가 마지막 연설을 끝내자, 수만 명의 환호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직장과 가정 일을 멈추고 광장에 모인 여성들은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라고 외쳤다. 아이슬란드 여성의 90%가 참여한 이 날의 파업은 세계 최초의 여성 총파업(Women's Day Off)으로 기록됐다. 아이슬란드 남성들은 이 날을 ‘긴 금요일’이라고 불렀다.

여성 총파업이 바꾼 것들

1975년 최초의 여성 총파업을 기획한 이들은 1970년 결성된 페미니스트 운동단체 레드스타킹(Redstocking)이었다. 20~30대 젊은 여성과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레드스타킹은 기성 여성단체에 비해 좌파적 색깔이 강한 급진 페미니즘 단체였다. 당시 아이슬란드 여성 노동자는 남성 대비 60% 미만의 저임금을 받고 있었다. 불안정 노동에도 시달렸다. 가사 및 돌봄 노동 역시 온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아이슬란드 노동연맹(Icelandic Confederation of Labor, ASÍ)의 주요 위원회 협상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레드스타킹은 낙태할 권리와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캠페인, 그리고 가사 노동·출산·육아 등 재생산 노동에 대한 권리 투쟁을 주도했다. 아울러 이러한 의제 투쟁을 전면화하기 위해 1970년 치러진 첫 번째 총회에서 ‘아이슬란드 여성 총파업’ 동의안을 제출했다. 그리고 이것이 실현되기까지는 약 5년의 세월이 걸렸다.

본격적으로 아이슬란드에서 여성 총파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다. 그해 6월, 아이슬란드의 여성단체 세 곳1이 레드스타킹을 비롯한 여러 여성 단체들을 초청해 기획 간담회를 진행했다. UN이 이듬해인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한 것과 관련해 행사를 기획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레드스타킹은 여성 하루 파업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여성 단체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레드스타킹은 포기하지 않았다. 1975년 1월, 이번에는 최저임금을 받는 저소득 여성 노동자들이 가입해 있는 노동조합과 재차 논의를 이어나갔다. 저소득 여성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레드스타킹의 아이디어에 크게 열광했다. 그리고 ‘여성 총파업’ 안건을 통과시켰다.

5월에는 아이슬란드 총리실이 세계 여성의 해를 위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여성 총파업 논의가 더욱 활발해졌다. 해당 운영위원회에 노동조합과 레드스타킹을 포함해 급진적인 인사들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양한 그룹의 대표자와 교사, 미혼모 등 8명의 이름으로 재차 여성 총파업 안건을 상정했다. 하지만 일부 우파 여성 및 단체들은 ‘여성 총파업’이 너무 급진적이라며 난색을 보였다. 결국 6월에 열린 회의에서 다양한 단체들의 폭넓은 연대 및 참여를 위해 ‘파업’ 대신 ‘휴무’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에 합의했다. 그럼에도 10월 24일로 예정된 ‘여성 휴무일’은 좌파 언론과 단체, 시민들에게 ‘여성 총파업’으로 명명됐다.

총파업을 앞두고 여러 방해 시도들도 있었다. ‘여성의 침실도 휴무냐’라는 경멸적인 발언들과, 파업에 참여한 사람은 해고될 것이라는 루머도 잇따랐다. 일손을 놓은 여성의 빈자리를 남성들이 메울 수 있는가에 대한 설왕설래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협박과 방해, 모욕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1975년 10월 24일 오후 2시 5분, 아이슬란드 여성 90%가 직장과 가정에서 일손을 놓았다. ‘2시 5분’은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적용해 퇴근 시간을 계산한 것이었다. 수도 레이캬바트에서 열린 파업 행사에는 2만5천 명의 여성이 참석했다. 당시 아이슬란드 인구는 22만 명으로, 전 국민의 10%가 이날 광장에 모여들었다.

[출처: https://dsi.sva.edu/wp-content/uploads/2017/12/The-Long-Friday-2-1400x735.jpg]

아이슬란드의 경제는 완전히 마비됐다. 학교, 보육원, 상점, 공장 등이 문을 닫았다. 당시 교사의 65%가 결근해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다. 대부분의 보육원이 문을 닫아 남성 노동자들은 아이를 데리고 출근을 하거나 아예 직장에 나가지 못했다. 파업을 앞두고 슈퍼마켓에는 소시지 같은 즉석식품이 품절되기도 했다. 방송국에서는 남성 아나운서들만 남아 파업 현장을 보도했다. 전화 서비스가 중단됐고, 여배우들의 파업으로 연극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다. 주부와 여성단체 활동가, 여성 노동자 등은 집회 연단에 올라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방법들을 이야기했다. 파업은 이날 자정까지 이어졌다.

아이슬란드의 여성 파업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사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파업에 나선 지 5일 뒤인 10월 29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여성 단체 NOW(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전미여성기구)가 미국 여성 파업을 주도했다. 11월 3일에는 일본 여성들이 스트라이크 위원회를 조직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1년 뒤 직장과 가정에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성평등법’이 통과됐다. 그리고 5년 뒤 치러진 대선에서 여성 후보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남성 후보 셋을 제치고 아이슬란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1975년 여성 파업이 ‘아이슬란드 여성 해방의 첫걸음’이었다고 밝히며, 이날 파업이 없었다면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했을 거라 밝혔다.

10년 뒤인 1985년 10월 24일,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다시 한번 파업에 나섰다. 1975년 여성 파업을 기념하기 위한 파업이었다. 비그디스 필보가도티르 대통령도 이날 파업에 동참해 만 하루 동안 직무를 중단했다. 의회와 정치권은 국영항공사 스튜어디스의 파업을 제한하는 법안을 제출하며 대통령에 서명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2 하지만 이날 파업으로 학교, 유치원, 병원, 은행 등 아이슬란드의 모든 경제가 멈춰 섰다. 그리고 파업에 힘입어 2년 뒤인 1987년 총선에서 ‘여성의당’3이 10.8%의 지지를 받아, 전체 63석의 의석 중 6석을 차지했다. 아이슬란드 여성 파업은 2005년과 2010년, 2016년, 2018년 등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여성 파업은 국제사회까지 뻗어 나갔다. 1991년 6월 14일에는 스위스 여성들이 불평등에 항의하며 첫 여성 파업을 벌였다. 2016년에는 폴란드 여성들이 모든 낙태를 금지하는 헌법재판소 판결에 항의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폴란드의 무려 43만 명의 여성들은 ‘검은 시위’를 벌였다. 2017년부터는 아이슬란드 여성 총파업을 모티브로 한 국제 여성 파업이 매년 조직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3·8 여성의 날을 맞아 ‘3시 STOP’ 여성 파업과 집회가 이어졌다.

가사 노동의 가치와 사회화

아이슬란드 여성 파업처럼 위력적이진 않지만, 여성들이 파업을 조직하거나 자발적으로 일손을 놓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1970년 8월 26일, 미국 여성들은 모든 가사 노동을 중단하는 여성 동맹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무료 탁아소 시설과 낙태의 자유, 직장과 교육에서의 성 평등을 요구했고, 대규모 거리 시위를 벌이며 브래지어와 기저귀 등 여성을 억압하는 상징적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뉴욕에서만 2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워싱턴,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1974년 6월에는 프랑스 여성해방 단체들이 직장 및 가사 노동 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성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여성에게 성관계를 거부하고, 모든 가사일과 직장 업무를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1983년 2월에는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스미스필드에 거주하는 주부 15명이 가사 노동 파업을 벌였다.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한 채 24시간 노예 가사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15명의 주부는 플래카드를 메고 남성들이 가사 분담을 외면하고 있다며 마을에서 시위를 벌였다.


언론은 1950년대부터 보급된 자동세탁기를 포함한 가전제품들이 여성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여성의 가사 노동 부담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1975년 멕시코에서 열린 유엔 세계여성대회에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이 직장에 나갈 경우 남성보다 주 10시간가량을 더 일하게 된다”라며 “가전제품들은 결코 여성 해방의 희망을 가져오지 못했다”라고 분석했다.4 오래도록 그림자 노동에 시달려온 여성들은, 여성 억압과 착취가 ‘가사 노동’에 대한 무가치한 평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72년경부터 소위 ‘2세대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가사 임금’ 논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임금 가사 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만큼,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의 달라 코스타와 영국의 셀마 제임스는 1972년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는 여성의 노동으로서, 우리가 발명한 적도 없고, 대가도 받지 못한, 하루 12, 13시간의 터무니없는 시간을 노동하도록 강요하는 가사 노동을 거부해야 한다”라며 가사 노동 임금 투쟁을 본격화했다. 이들은 같은 해 미국의 실비아 페데리치, 프랑스의 브리지트 갈띠에와 함께 ‘국제페미니스트연합’을 결성하고 국제 가사 노동 임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재생산 노동과 관련한 토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국제적 네트워크인 ‘가사 노동 임금 조직 위원회’를 조직했다.

가사 노동 임금 캠페인은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5년 10월, 미국은 공식적으로 여성의 가사 노동에 대한 평균 임금을 발표했다. 미국이 발표한 평균 가사 노동 임금은 최저 연봉 5,500달러, 당시 월급 약 20만 원가량으로 여성들이 요구했던 임금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가사 노동 임금 산출은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한국까지 영향을 미쳤고, 가사 노동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여성 국회의원이 ‘주부 임금 지급’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 GDP의 25~3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주부에게 임금이 지급돼야 한다는 취지의 법안이었다.5 이듬해에는 ‘가사 노동 임금 조직 위원회’ 영국지부가 여성 파업을 조직하고 나섰다. 이들은 정부가 주 6,700원가량의 가사 노동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전국적인 여성 파업을 호소했다. 그리고 1985년, 유엔은 ‘세계여성대회’ 유엔 선언에서 “여성의 무급노동 기여는 국민 계정과 경제통계에 반영돼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부터 여성의 가사 노동이 경제 가치로 환산돼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85년에는 여성단체들이 ‘가사 노동과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가사 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산출했다.6 이 자리에서는 가사 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화폐로 계산돼야 하며, 여성의 가사 노동은 사회화돼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가사 노동 사회화는 1920년대 조선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돼 온 문제이기도 했다. 방정환은 1923년 <신여성> 2월호에서 “여성은 가정적 사업의 노예가 돼버린다”라며 “장 파는 집도 있고, 세탁소도 있고 하면 얼마나 편리하고 남용이 적어지겠나”라고 썼다. 1925년 1월호에서는 “공공의 힘으로 (가사 노동 관련) 회사를 경영하며 거기서 제조하여 공급하게 하고…세탁(빨래)도 세탁회사가 있어서 각각 집에서 귀한 시간과 정렬을 써가면서 하지 말고 회사에 맡겨서 입게 되어야 하겠습니다”라는 의견이 나왔다.7

<각주>
1. Federation of Women’s Associations(여성협회연맹), Icelandic Women’s Rights Association(아이슬란드 여성권리협회), Women’s Student Association(여성학생협회)
2. AFP와 로이터 등에 따르면 핀보가도티르 대통령은 해당 법안의 서명을 늦춰 정계의 반발을 샀지만 결국에는 아이슬란드 항공 소속 스튜어디스들의 파업을 중단시키는 법안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3. 여성의당은 1981년 12명의 여성이 창당한 당으로, 반핵과 NATO 탈퇴, 권위주의 탈피 등을 내걸었다. 유권자가 ‘인물’이 아닌 당의 이념을 보고 투표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회의원직을 번갈아가며 맡았다. 여성의당은 1983년부터 1999년까지 의회에 진출했고, 이후 사회민주당 연정당에 참여했다.
4. “현대주부는 더 고달프다” 세계여성대회에 보고된 주부 생활 조사 내용, 매일경제, 1975.7.7.일 자
5. 주부 보수 지불 법안도, <경향신문>, 1975.6.28
6. 1985년 10월 8일 ‘25세 여성 조기 정년 철폐를 위한 여성단체연합회’가 YMCA 강당에서 ‘가사 노동과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3차 연속토론회를 열었다.
7. 가사 노동의 사회화 시비, 손유경, <일다>, 2004.10.3.

<참고자료>
1. The Day Women Brought Iceland to a Standstill, ÍRIS ELLENBERGER, JACOBIN, 2019.10.24.
2. Decades after Iceland’s ‘day off’, our women’s strike is stronger than ever, Selma James, The Guardian, 2018.3.8.
3. https://kvennasogusafn.is/index.php?page=raeda-adalheidar
태그

평등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윤지연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문경락

    한국에서도 1980년대부터 여성의 가사 노동이 경제 가치로 환산돼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85년에는 여성단체들이 ‘가사 노동과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가사 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산출했다.6 이 자리에서는 가사 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화폐로 계산돼야 하며, 여성의 가사 노동은 사회화돼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가사 노동 사회화는 1920년대 조선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돼 온 문제이기도 했다. 방정환은 1923년 <신여성> 2월호에서 “여성은 가정적 사업의 노예가 돼버린다”라며 “장 파는 집도 있고, 세탁소도 있고 하면 얼마나 편리하고 남용이 적어지겠나”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