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시스템

[녹색 스트라이크] ‘불쉿잡’ 현상, 그리고 새로운 세계


그 누구도 지구를 이렇게까지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인간 사회는 지구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려 놓을 수 있었을까? ‘기후 정의’의 관점에서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어쩌다 우리는 소위 북반구 선진국 국가와 얼굴 없이 법률 문서로 존재하는 공룡 기업들이 땅 깊은 곳에 있는 유정을 뽑아먹고, 산천을 깎아내며 광물을 캐내고, 대기에 온실가스를 마구 내뿜으면서도 이윤이란 이윤은 긁어모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사회 속에 살게 됐을까? 다른 한편에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기아와 질병으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고 있는데 말이다. 선진국에서는 백신이 남아돌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시신이 들어갈 관이 부족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장의사들이 거리로 나와 백신 공급을 요구하기도 했다. 기후위기의 주요한 원인이지만 그만큼 잘 드러나지 않은 전쟁과 군대와 같은 대규모 살인 사업은 멈출 줄 모른다. 그 누구도 지구를 이렇게까지 파괴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 텐데. 내 질문은 파괴 본능이 투철하지 않은 사람들이(오히려 자신의 삶과 환경을 잘 가꾸고자 하는 대부분 사람이) 이토록 무한 지구 파괴 시스템에 의존하며 스스로 멸망을 앞당기고 있는지에 있다.

자신의 집을 고의로 더럽히고 망가뜨리는 사람은 없다. 나를 포함해 집을 제대로 가꾸거나 돌보지 않는 이유를 찾아보면 무력감, 우울, 분노와 같은 심리적인 종류일 수도 있고, 집안을 여유롭게 돌볼 물리적인 시간과 체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집을 쾌적하게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한가? 왜 나는 우울한가? 나는 어쩌다가 한가로운 휴일 오후, 바닥을 반들반들하게 닦는 부지런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고, 두 팔이 저리도록 핸드폰을 들고 유튜브, 넷플릭스 세계를 충혈된 눈으로 유영하는 침대 인간이 됐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피곤하고 귀찮고 조금 지저분한 나의 삶이 뭔가 의미심장한 사회 문제로 여겨질 실마리를 찾을 것 같다. 이 문제는 집안 어지럽히기에 매일 동참하는 나의 동거인에게 짜증 낼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두터운 사랑과 우정을 좀 먹는 사회를 향해야 한다.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가? 나아가 소진하고, 파괴하는가?

지구생명체의 집, 지구의 허파 아마존 열대우림을 열심히 태우고 개간하는 노동자도, 생계를 이어갈 다른 무해한 일이 있다면 그 일로 기꺼이 옮길 것이다. 보통의 사업가라면 자기가 살고 있는 지구를 망치고, 숱한 노동자를 죽여가며 사업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예외는 존재하는 것 같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치킨에 맥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도, 매일 수만 마리의 닭의 머리가 잘려 나가는 컨베이어 시스템을 본다면, 달걀을 낳지 못하는 수평아리가 산채로 기계에 갈려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반응이 어떻든 혼란을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세계는 생각보다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세계는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정치적인 힘과 그 힘을 대변하는 언어와 상징에 의해 매일 만들어지면서 공고해지고 있다. 악순환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는데, 지금 세계는 순환 구조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쓰레기 산을 만들거나 바다에 플라스틱 수프를 만들고 있다. 대기 중에 온실가스와 같은 오염물질을 배출해 지구 온난화를 나날이 심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사고와 질병으로 노동자를 죽게 만들고, 오로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나고 길러진 숱한 소, 돼지, 닭 등이 제 수명보다 훨씬 빠르게 살해당하고 있다.

이렇듯 쓰레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생명을 도구화해 쓰고 묻어버리는 체제는 순환 체제가 아니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끊임없이 폐기하는 체제이고, 강조해 표현하자면 마치 폐기하기 위해 생산하는 체제다. 대형 생산 공장은 값싼 노동력에 기대어 상품을 필요 이상으로 생산하고, 유튜브를 포함한 광고업계는 이것이 마치 당신에게 필요한 것처럼 속여서 사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워진 환경에서 일상적인 강매를 당한다. 필요 없음이 판정된 물건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세상이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어제와 같이 오늘도 쓰레기와 위험을 만드는 시스템은 재생산되고 있다.

‘불쉿잡’ 현상

각종 폐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민간 기업들은 이윤을 창출한다. (폐기물매립 업체, 소각장 업체가 벌어들이는 이윤을 찾아보라.) 쓸데없이 복잡해진 생산-유통-소비-폐기 사슬에서 기업의 이윤은 증폭되고 각종 문제는 소비자와 지구 환경에, 비정규직 노동자에 전가된다. 노동자에게 해악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노동자 안전·보건 문제를 도와주며 돈을 버는 직종이 생긴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재해보험과 같은 재난 시장이 확대된다. 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수록 GDP는 오르고, 자본은 배를 불린다.


이처럼 모순적인 경제 구조가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유작 《불쉿잡(Bullshit1 Job) -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2021, 민음사)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부와 지위가 경제적 근거가 아니라 정치적 근거에 따라 할당되는 영역,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이 ‘경제적’인 것이며 무엇이 ‘정치적’인 것인지 나날이 차이를 알기 어려워지는 그런 영역에서 불쉿 직업이 태동한다고 봤다.2 약탈한 자본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우위에 있는 계층이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봉건적인 경영주의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그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관료적이고 형식에 불과한 불필요한 일자리가 우후죽순 늘어났다. 그는 현재 우스꽝스럽고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경제 체제의 모순을 ‘불쉿 직업’의 폭증이라는 사회 현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반면 그는 사회 유지에 꼭 필요한 직종(간호사, 보육교사, 소방수, 청소노동자, 요양보호사 등. 크게 보아 돌봄 노동에 해당하고 대부분 여성에게 할당돼 있다.)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지 않은 반면, 접수 계원, 은행원, 행정보좌관, 자동차 영업사원, 텔레마케터 등에게는 상대적으로 많은 대가를 지급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상상해보라. 수억 연봉의 주식 중계인이 모두 사라진 세계와 청소노동가 모두 사라진 세계를.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

우리가 목도하는 기후 재난은 불쉿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체제에서 비롯됐다. 불쉿 노동에게 과도한 대가를 부여하고, 불쉿 생산물에 높은 값을 매긴다. 아예 이 체제 자체가 불쉿!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여러 논증을 거치지 않더라도 현재 불쉿 경제 체제는 왕 노릇을 하는 자본가와 그의 기반을 지지해주는 정치인, 언론매체에서 비롯됨을 누구나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기후위기 시대에 꼭 필요한 노동과 노동자를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돌봄 노동이 중요하다!’와 같은 언어가 차고 넘쳐야 한다. 그들이 이상한 세계를 만드는 것을 저지하고, 훼방해야 한다. 노동의 문제는 경제 시스템의 문제고, 경제 시스템은 정치가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경제 시스템을 전문가에게, 엘리트에게 맡겨놓은 꼴을 보라. 이제는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각주>

1 ‘빌어먹을’. ‘젠장’, ‘쓰레기 같은’, ‘엿 같은’ 정도의 의미로 쓰이는 비속어다. 불쉿 직업은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허튼일을 하는 일자리를 가리키며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이 책 옮긴 이 일러두기 참고)
2 『불쉿잡』,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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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이렇듯 쓰레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생명을 도구화해 쓰고 묻어버리는 체제는 순환 체제가 아니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끊임없이 폐기하는 체제이고, 강조해 표현하자면 마치 폐기하기 위해 생산하는 체제다. 대형 생산 공장은 값싼 노동력에 기대어 상품을 필요 이상으로 생산하고, 유튜브를 포함한 광고업계는 이것이 마치 당신에게 필요한 것처럼 속여서 사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워진 환경에서 일상적인 강매를 당한다. 필요 없음이 판정된 물건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세상이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어제와 같이 오늘도 쓰레기와 위험을 만드는 시스템은 재생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