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로자 룩셈부르크’, 이순금

[혁명의 세계, 반란의 역사]

국사편찬위원회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4,858명의 인물 카드가 소장돼 있다. 일제 경찰이 식민통치의 걸림돌이라 판단한 독립운동가들을 요주의 인물로 분류해 ‘주요 감시대상 인물 카드’로 만든 것이다. 이른바 ‘감시 카드’다. 이들 중 여성은 238매의 카드, 179명이다. 그중 울산 출신의 이순금은 5장의 카드로 전체에서 8번째, 여성 중 최다를 기록했다. 참고로 이순금의 학교 동창이자 동지였던 박진홍은 5장, 이효정은 2장의 카드가 만들어졌다. 감시 카드가 많다는 것은 당시의 삼엄하고 촘촘한 감시체제를 고려하면 대단한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 이순금은 서대문형무소에 네 번이나 이감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이순금(1912~?)은 1912년 경상남도 울주군 범서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종락, 어머니는 김남이다. 둘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종락은 재혼한 상태에서 김남이와 사랑에 빠져 이순금을 낳았다. 어머니가 정식으로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이순금은 김남이와 둘이 함께 살았다. 하지만 이종락의 김남이에 대한 사랑은 매우 각별했다. 1931년 7월 김남이가 서울에서 사망하자 울산에 묘를 만들어 주고 ‘김남이지묘’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여성은 족보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시절에 당당히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운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선바위에 가면 김남이의 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순금의 1938년 5번째 감시카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순금은 1928년 3월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경성의 실천여학교에 입학했다. 이에 김남이도 경성에 와서 함께 생활했다. 이 시기가 이순금에게는 인생의 전환기였다. 바로 자신의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이관술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관술(1902~1950)은 이순금의 오빠인데, 아버지 이홍락 첫째 부인의 아들이다. 그는 서울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를 졸업했다. 이관술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이재유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었다. 박헌영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투쟁하면서 일제의 탄압에도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다.

1929년 4월에 이관술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세 사람은 종로구 익선동에서 함께 지냈다. 이듬해인 1930년 3월 이관술은 이순금을 동덕여고보 3학년으로 편입시켰다. 동덕여고보는 박진홍,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 이경선, 박선숙, 김재선, 임순득 등 훗날 조선공산당의 고위 간부가 될 쟁쟁한 ‘조선의 로자 룩셈부르크’를 줄줄이 배출한 사회주의 운동의 산실이었다.

이순금이 사회주의 운동가가 된 것은 오빠 이관술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그런 풍토를 만들어 준 어머니 김남이의 영향도 매우 컸다. 이순금은 성장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김남이의 대범함과 결단력, 여유로움도 배우게 됐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많이 베풀 수 있었고 인정도 많았다. 모녀가 서로 의지가 되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순금은 동덕여고보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벗인 이효정, 박진홍 등을 만나 열렬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하게 된다. 이들이 함께했던 거의 첫 번째 사건은 1931년 6월 6일 동덕여고보 학생맹휴였다. 맹휴(盟休)는 동맹휴학을 의미한다. 1929년에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해를 이어 지속하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시위가 이어졌다. 동덕여고보에서도 박진홍, 김운라, 이효정 등이 주도하여 맹휴가 일어났다. 이 일로 박진홍과 김운라는 퇴학을 당했다.

이순금은 동덕여고보를 졸업하고 2달 후인 1932년 5월, RS(Reading Society)협의회라는 독서회를 조직해 적화사상 전파와 불온격문 배포 혐의로 체포됐다. 비록 불기소 처분을 받았지만, 이 일은 이순금의 본격적인 사회주의 활동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932년 말부터는 이관술과 함께 반제동맹 경성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공장과 학교에서 반제국주의운동과 적색노조운동을 전개했다. 이순금은 이관술과 함께 ‘오르그연구회’라는 이름의 독서회를 조직해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오르그는 조직을 의미한다. 1933년 2월 남매는 체포됐다. 이관술은 주모자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이순금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됐다. 이 사건으로 이순금의 첫 번째 감시 카드가 만들어졌다.

1933년 3월 이재유를 만난 이순금은 경성 트로이카에 참여하면서 지식인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순금은 주로 적색노조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여성 직공들이 많았던 고무공장과 섬유공장으로 가서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이끌었다. 이순금은 1933년 4월 별표고무 파업을 시작으로 6월 편장제사 파업을 거쳐 8월에는 소화제사와 고려고무 파업, 9월 조선견직과 서울고무 파업, 9월 경성제사 파업 등 여러 파업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1934년 1월 경찰에 체포되면서 중단됐다. 그리고 두 번째 감시 카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34년 7월 17일 예심 재판을 치를 때 카드 한 장이 더해져 세 번째 감시 카드가 만들어졌다. 경성 트로이카 사건으로 이순금 외에도 400여 명의 사람이 체포돼 100여 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순금은 1935년 12월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다. 그리고 출소를 한 달여 남긴 1936년 6월, 네 번째 신상 카드가 작성됐다. 출소 이후의 지속적인 감시를 위한 수순이었다. 이순금이 형무소에 있는 동안 이재유는 경성 트로이카 조직을 개편하며 새로운 활동방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1936년 12월, 이재유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검거되면서 경성 트로이카 운동은 일단락을 맺게 된다.

1937년 7월에 출소한 이후 박진홍이나 이관술을 만나 활동을 재개하고자 했고, 영등포의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 다시금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고, 1938년 6월에 석방됐다. 그리고 1938년 4월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신상 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이관술, 박헌영, 김삼룡 등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렇게 해서 ‘경성콤그룹’이 탄생했다. 경성지역 꼬뮤니스트 그룹의 줄임말이다.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경성콤그룹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항일세력이었다. 기관지인 ‘코뮤니스트’를 발행·배포하고, 조직을 계속 확장해나갔다. 이순금은 경성콤그룹 조직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 9월 경성콤그룹 관계자들이 대거 검거될 때 이순금은 피신에 성공해 소재지 불명으로 기소가 중지된다. 이후 이순금은 박헌영을 따라 전라도 광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경찰의 끈질긴 추격을 받으면서도 결코 독립운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렇게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공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1945년 6월 9일에 열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제1회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전국인민위원으로 추대됐다. 여성으로서 전국인민위원이 된 것은 이순금이 유일했다. 같은 해 12월 23일 전국부녀총동맹 중앙대표위원으로 선출됐고,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을 거쳐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과 부녀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도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월북’과 함께 이순금의 활동 기록을 더 확인할 수 없게 되었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순금은 한국사에서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다. 아, 1990년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려 조기 종영한 KBS 드라마 <여명의 그날>에 이순금이 등장한다.

<참고문헌>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인문서원, 2015.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울산여성의 독립운동>, 2020.
이임하, <조선의 페미니스트>, 철수와영희, 201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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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을 거쳐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과 부녀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도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월북’과 함께 이순금의 활동 기록을 더 확인할 수 없게 되었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순금은 한국사에서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다. 아, 1990년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려 조기 종영한 KBS 드라마 <여명의 그날>에 이순금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