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치료 포기 부추기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홈리스행동, 인수위에 요구안 제출

‘노숙인 진료 시설 지정제도’가 홈리스들이 예방 치료를 포기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며 제도의 폐지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기준 노숙인 진료 시설 중 1차 의료기관은 전국에 12곳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원 이용을 원하는 홈리스들은 질환의 심각성을 떠나, 긴 이동·대기 시간을 감수해야 했고, 이로 인해 일상적인 치료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에 홈리스행동은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원회(금융감독원연수원)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수위원회에 ‘노숙인 진료 시설 지정제도 폐지’를 촉구하며 요구안을 제출했다.


병원까지 이동, 대기, 수납에 5시간 40분

홈리스들은 간단한 검사를 하려 해도 반나절은 시간이 걸린다. 최근 용산역 인근에서 거리 노숙을 하는 A 씨(61세)의 병원 동행을 한 안형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병원까지 이동 시간과 대기, 수납에 5시간 40분이 소요됐다고 전했다.

안 활동가는 “(A씨는) 2월 중순경 심한 다리 통증을 겪었는데, 이를 참다가 한 달이 지나 병원에 가게 됐다. 진찰하는데 10분, 엑스레이 촬영에 5분, 체혈 검사에 5분이 소요됐는데, 병원을 방문하는 데 총 6시간이 걸렸다”라며 “이는 지난 10년간 홈리스에겐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홈리스들은 일상적 기저질환 관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조금 아픈 것을 참고 큰 병을 만들고, 그 큰 병으로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바로 ‘노숙인 진료 시설 지정제도’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가까운 병원에 갈 수 없었던 홈리스

현재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된 김OO 아랫마을홈리스야학 학생은 노숙 생활을 한 오랜 기간 일상적 진료가 어려웠다고 전했다. 그는 2009년 10월부터 노숙 생활을 시작했는데, 10년간의 노숙 생활 끝에 2018년도부터 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면서 그는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수급을 받고 있다.

김OO 학생은 “몸에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다. 그중 신경성 위장병이 있어 자주 속앓이를 한다. 노숙 전에는 속이 아플 때마다 집 근처 병원에서 진료받고 3~4일 치 약을 먹고 치료했다”라며 하지만 “노숙인 의료급여 이용을 위해선 가까운 병원을 가지 못하고 지정된 큰 병원만 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한 달 치 약을 타 놓고 아플 때마다 복용했다. 아플 때 가까운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 진료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진료시설 지정, 민간 병원의 노숙인 기피 법적 근거 돼”

앞선 사례들의 두 당사자는 모두 노숙인 의료급여 수급권자(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로,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의료기관만을 이용할 수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홈리스와는 달리 다른 의료급여 수급권자들에 대해선 의료급여기관의 제한이 없다.


보건복지부의 ‘2022년 노숙인복지사업안내’ 자료에 따르면 노숙인 진료 시설은 전체 289곳이지만, 이 중 보건소가 73.7%(213곳)를 차지한다. 병·의원급 노숙인 진료 시설은 전국 76곳에 불과하다. 4개 광역지자체(광주, 울산, 세종, 제주 등)의 경우는 종합병원급 노숙인 진료 시설이 한 곳도 없다. 1차 의료기관은 전국에 12곳에 불과하다.

병원급 이상 노숙인 진료시설의 대다수가 국공립병원인 점도 문제로 작용했다. 대다수 공공병원이 코로나19 이후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전환하며, 홈리스가 의료공백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홈리스행동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병원급 이상 노숙인 진료 시설 10곳 중 9곳이 공공병원이다.

전진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코로나19 시기, 민간 병원은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진료를 꺼리고 있다. 돈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의료법상 진료 거부를 할 수 없지만, 갖은 핑계를 대며 환자를 내쫓고 있다”면서 심지어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는 아예 민간 병원이 노숙인을 진료하지 않아도 되는 법적 근거를 보장해주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홈리스 의료급여 포괄성, 10.9% 불과

진료 시설 이용에 제한이 있지만, 그렇다고 노숙인 의료급여 대상자 기준이 낮은 것도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홈리스 의료급여 대상을 ‘노숙 해당 기간이 3개월 이상인 자’이면서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거나 6개월 이상 체납한 자’로 정하고 있다. 홈리스행동은 이로 인해 홈리스 의료급여의 포괄성 수준이 매우 낮을 뿐 아니라, 계속 낮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체는 잠재적 정책 대상자를 거리 노숙인, 노숙인 이용시설 이용자, 노숙인 자활 시설 입소자로 보고 있는데, 이 규모 대비 의료급여 수급자 수는 2020년 기준 10.9%에 불과하다. 심지어 2015년 23.4%에서 줄어들었다.

한편 이날 홈리스행동은 △(시행규칙 개정) 의료급여기관 제한 폐지 △(지침 개정) 노숙인 1종 의료급여 대상자 기준 완화 △(시행규칙 및 지침 개정)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신청 창구의 확대 등의 내용을 담은 요구안을 인수위에 제출했다.


김도희 사회복지공익법센터 변호사는 “1999년 의료 보호 대상자가 자유롭게 진료 기관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지된 현행 ‘노숙인 진료 시설 지정제도’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홈리스들은 20년 전에 살고 있다”면서 이는 “명백히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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