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현실과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
▲ 1932년 3월,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박진홍은 191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화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에 있는 동덕여고보에 진학했다. 그녀의 집은 매우 가난했지만, 가족들이 박진홍의 교육을 위해 경성으로 이사했다. 그만큼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박진홍은 줄곧 일등을 해 동덕여고보 개교 이래 최고의 인재로 불렸다. 역대급이자 단연 발군이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로 이사한다고 해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박진홍은 스스로 학비를 벌기 위해 입주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동덕여고보에는 이순금의 오빠이자 사회주의자인 이관술이 교사로 있었다. 박진홍은 이관술이 이끄는 독서회에 들어가 대표로 활동했다. 당시 독서회는 학생운동의 기본이자 중심이었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대항하는 보루였으며, 학교 연합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단체의 기본 단위였다. 이로 인해 박진홍은 각종 사회과학 서적을 접했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됐다.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소녀로 알려진 박진홍에게 사회주의 운동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박진홍은 독서회 활동을 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일제에 대항해 투쟁한 자신의 조직 생활과 실천적 경험을 문예 활동에 반영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무산대중의 계급의식을 높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심사숙고했다.
박진홍은 4학년이던 1931년 6월에 학교 건물의 신축 요구와 보건 문제로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당시 학교는 학생 수에 비해 교실과 운동장이 협소해 매우 열악했다. 박진홍은 동맹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김운라와 함께 퇴학당했다. 당시 국내 정세는 신간회 해소(1931.5), 근우회 해소(1931.7) 등과 함께 모든 부문 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재편됐고, “공장으로, 농촌으로”의 기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운동의 조직적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이 초기에 봉쇄되면서 조직방침이 재검토되고, 때마침 제기된 ‘9월 테제’(1930. 9)의 혁명적 노동운동 방침이 당 재건의 지침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때였다.
‘9월 테제’의 영향과 일제의 강화된 탄압 때문에 1930년대 노동운동은 비합법적인 적색노조 운동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가운데 박진홍은 한성제면, 조선제면, 대창직물, 대창고무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동료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한편 학생독서회를 조직해 이끌었다. 당시 경성에서는 조선공산당 출신 인물들의 주도로 RS(Reading Society)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여성부를 박진홍이 이끌었다. 그는 이순금과 접촉해 경성 내 여학교의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러다 1931년 11월 경신학교 맹휴가 발단이 돼 12월에 RS협의회 사건으로 검거됐다. 비록 증거불충분으로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지만 무려 23개월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다 1933년 11월에 풀려났다.
출옥 후 ‘전설적 혁명가’로 불린 이재유가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인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박진홍도 연루 혐의를 받아 체포됐지만 별다른 혐의가 없어서 훈계 방면됐다. 이때가 1934년 5월이었다.
박진홍이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던 1933년 3월에 그녀의 절친인 이순금, 이효정과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등이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했다. 이순금은 적색노동조합을 이끌었다. 하지만 일제 경찰에 적발되면서 1933년 9월부터 1934년 7월까지 428명이 검거됐다. 이순금도 1934년 1월에 체포됐는데, 그는 그 당시 이재유의 아지트키퍼/하우스키퍼였다.
아지트키퍼/하우스키퍼와 사회주의 운동
1934년 8월, 박진홍을 만난 이재유는 그의 처지와 동지들의 근황을 물어본 후, 자신의 지속적인 운동을 위해 아지트키퍼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박진홍은 자신이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곧장 동거에 들어갔다. 이재유는 “경성부 토목과 측량기수인 노순길로 가장”해 동대문 부근에 가서 도로공사 인부로 일하기도 하고, 낮에는 근처 문화동에 제2의 아지트를 두고 심계월, 박진홍, 윤무현 등과 함께 독서회 등을 조직해 활동했다.
이재유는 일제의 감시와 추적을 피하고자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자신이 매일 4시에 돌아 오겠지만 만약 1분이라도 늦으면 즉각 증거가 될 만한 문서를 폐기한 다음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길 것, 박진홍이 외출할 때는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말 것, 귀가 시간은 엄격히 준수할 것, 이재유 본인은 박진홍의 귀가 시간 전에 집 부근에 나와 있다가 박진홍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후 집으로 들어갈 것 등을 철칙으로 하고 있었다.
이처럼 지하운동가의 아지트키퍼가 된다는 것은 감시와 체포를 피하기 위해 부부로 위장해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지하운동가를 지원하면서 그와 함께 현장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박진홍은 당시 노동 현장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서 착취되던 조선의 여성 노동자 신분으로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성트로이카 지도부는 일제의 탄압과 검거를 피하지 못하고 대거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박진홍 역시 1935년 1월에 체포됐는데, 당시 이재유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박진홍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동덕여고보 친구인 이순금과 극적으로 해후했다. 이순금은 박진홍이 이재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냐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고 한다. 박진홍은 그해 8월에 아기를 낳고 1년 동안 키웠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이는 결국 사망했다. 1936년 12월, 이재유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검거되면서 경성트로이카 운동은 일단락을 맺게 된다. 이재유는 6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1944년 10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재유가 검거된 후 1937년 4월 30일, 매일신보에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이재유가 체포되기 전 그를 도왔던 세 명의 여성을 소개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이순금, 박진홍, 유순희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동덕여고보 출신으로 학창 시절부터 함께 독서회 활동을 했던 친구이자 동지였다. 신문은 세 명의 여성들을 레포(연락책), 하우스키퍼(housekeeper), 애인 등으로 호명했다. ‘동덕학창시대 유명한 세짝패’, ‘사상선상(思想線上)의 애욕화(愛慾花)’와 같은 소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실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는 하우스키퍼/아지트키퍼라고 불리는 여성들이 있다. 남성 사회주의자들이 감시와 탄압으로 제대로 활동을 못 하는 경우, 여성 하우스키퍼가 가정에서의 돌봄과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고, 외부와 중간 연락책 역할을 담당했다. 부부 사이를 가장하는 것은 감시의 눈길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하우스키퍼 중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선의를 가지고 남성 사회주의자를 지원하며 사상적으로 각성하는 여성도 있었고, 본인이 사회주의 운동가이면서 동지적 관계 속에서 하우스키퍼를 자처한 여성도 있었다. 물론 하우스키퍼/아지트키퍼 자체는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비판의 소지가 많다.
따라서 당시 사회주의 내부의 성별 간 인식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 사회주의자들에게 사랑은 혁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됐다. 남성 사회주의자들이 1930년대에 주장했던 ‘동지적 사랑’, ‘프롤레타리아 연애’는 사실 새로운 사회주의 연애론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에서 연애를 탈각시키려고 한 ‘연애 청산론’에 가까웠다. 남성 사회주의자들은 여성 사회주의자에게 ‘수절(fidelity)’을 요구했지만,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박진홍의 주장처럼 “혁명의 기본 동력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랑의 충실성(fidelity)을 추구했다.
남성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이라는 공적 영역을 앞세워 사랑이라는 사적 영역을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사회주의 안으로 사랑을 포획시키려 했다. 반면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사랑이라는 사적 개념을 매개로 사회주의라는 공적 영역을 전유하면서 혁명을 구체화해 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혁명을 할 수 있고, 혁명을 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임을 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사랑이 금지될 때가 혁명이 좌절될 때이고, 사랑을 할 수 있을 때가 혁명의 도래기라는 사실을 충실하게 사랑했다. 보다 큰 문제는 ‘아지트키퍼/하우스키퍼’가 사회주의 안에서 생략되거나 은폐되는 것이다. 혁명은 가고 흥미 위주의 가십만 남은 것이다.
새로운 사랑과 혁명가 부부
▲ 1938년 서대문형무소에서의 박진홍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박진홍이 1938년 5월 출옥했을 때는 이미 혁명적 대중운동이 침체한 상황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극심한 파쇼통치를 행했다. 따라서 국내 정세는 매우 엄혹한 상황이었다. 박진홍도 1938년 12월에 다시 체포됐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런데 이 암흑기에 ‘경성콤’이 출범했다. 박진홍도 참여한 경성콤은 기존의 경성트로이카 핵심 구성원에 상해파와 화요파까지 참여한, 좌파 최대의 통일전선이었다. 경성콤 멤버들의 지속적 활동과 사상의 지조를 견지한 도덕성은 일제 말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김삼룡이 검거되고, 이현상, 이관술, 박진홍, 정태식, 김태준, 권오직 등 핵심 조직원들이 줄줄이 검거됐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의 마지막 해방구였던 ‘경성콤’이 1941년을 기점으로 붕괴하고 말았다.
박진홍 역시 1941년 다시 체포됐다가 1944년 무죄로 풀려났다. 그녀는 출옥하자마자 줄곧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박헌영을 만나 운동을 계속하고자 했는데, 그때 김태준(1905~1949)을 만났다. 김태준은 경성제대를 나온 국문학자로서 경성콤 사건을 계기로 실천 운동에 참여한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하고자 연안으로 탈출을 결행한다.
이 둘의 연안행은 일제하 운동사상 중 가장 낭만적인 로맨스로 회자하고 있다. 안재성의 《경성트로이카》에서 묘사된 이들의 연안 기행은 사실 여부를 떠나 마치 한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김태준의 의사 변장, 일본인 장사꾼 부부, 중국인 농부로 위장해 일본군의 검문을 통과하는 연안 기행은 숨 막히도록 짜릿하고 흥미진진하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의용군에 합류한 두 사람은 항일전선에 참여하던 중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 후 귀국한 박진홍은 조선부녀총동맹 문교부장 겸 서울지부 위원장을 맡아 각종 강연을 통해 여성해방을 설파했다. 새 세상 건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대 총장 후보로 거론됐던 김태준은 남로당 간부로 활동했고, 1949년 지리산 유격대에 격려공연을 갔다가 국군토벌대에 붙잡혀 총살됐다. 김태준이 사망하자 박진홍은 월북을 선택했다. 그가 북한 정권 초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했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일찍 죽었다는 증언은 있지만, 그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인재로 평가를 받았던 박진홍이지만 분단의 비극 속에서는 설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1930년대 서울의 혁명운동》, 푸른역사, 2007.
안재성, 《경성 트로이카》, 사회평론, 2015.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인문서원, 2015.
오미일, ‘박진홍-비밀지하투쟁의 레포로 활약’, 〈역사비평〉 계간 19호, 역사비평사, 1992.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울산여성의 독립운동〉, 2020.
이임하, 《조선의 페미니스트》, 철수와영희, 2019.
장영은, ‘아지트 키퍼와 하우스 키퍼 – 여성 사회주의자의 연애와 입지’, 〈대동문화연구〉 제64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