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9일 밤’ 잠잘 곳을 찾는 사이

[1단 기사로 본 세상] 가습기 살균제 대법 판결, 현대산업개발 솜방망이 처벌 다 묻혀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인수위 기간 내내 화두는 ‘청와대 이전’이었다. 국민들 삶과 크게 상관없지만 거대 여야는 목숨 걸고 싸웠다. 거의 모든 기자가 인수위나 당선자를 만나면 청와대 이전만 질문했다. 그래서 정치는, 정치뉴스는 국민들에게 공해다.

‘청와대 이전’이란 이슈 같지도 않은 이슈에 온몸을 내맡긴 기자들은 청와대의 ‘청’자만 들어가면 뭐든 써댔다. 떠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새 대통령 취임식 전날 밤을 ‘청와대에서 자느냐 마느냐’를 두고도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8일 저녁 ‘윤 취임 전날 저녁… 문, 청와대 떠날 듯’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이 기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모회의에서 “하루를 더 여기(청와대) 있고 싶은 대통령이 누가 있을까요?”라고 말한 사실에서 출발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그 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5월 9일 자정 청와대를 떠나느냐, 5월 10일 오전 새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바로 가느냐’를 논의했단다. 지난달 7일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도 대통령의 발언을 전했다.

이런 걸 논의하는 참모회의도 그렇고, 그걸로 청와대발 기사를 쓰는 언론도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기사 쓰기 전에 한 번쯤 ‘생각’이란 걸 해봤으면 좋겠다. 이 기사가 국민 삶에 뭔 영향가가 있는지 말이다.


경향신문은 이 기사에서 역대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간 시점을 두 유형으로 분류해 소개했다. 임기 마지막 밤까지 청와대에서 보낸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대통령과 임기 마지막 날 저녁에 청와대를 나와 자기 집에서 잔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으로 나누었다. 이런 쓸데없는 것 찾느라 참 고생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경향신문에 이어 조선일보도 지난 13일 ‘文대통령, 하루 일찍 청와대 비워주나 고민’이란 제목으로 비슷한 기사를 썼다. 조선일보는 경향신문의 단순 소개기사를 넘어 청와대 하루 덜 자고 더 자는 문제를 ‘신구 대통령 갈등’으로 몰았다.

조선일보는 윤석열 당선인이 ‘5월 10일 0시’부터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전면 개방하겠다고 해 문재인 대통령 측이 ‘9일 밤 호텔에서 자야 하냐’고 볼멘소리를 한다며 대결 구도로 몰아갔다.

조선일보 보도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5일 오후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날 밤을 청와대에서 보내지 않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 신구 정권 간의 무슨 갈등, 그렇게 표현하지 말아주시기를 당부한다”고 했다. 이 말은 다음날 한겨레 2면에 “5월 9일 18시, 청와대에서 퇴근”이란 제목의 기사에 고스란히 실렸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5월 9일 밤에 어디서 자는지 1도 관심 없다.

국민이 한겨레에 바라는 건 이런 기사가 아니다. 국민은 대통령이 하고 싶어 하는 말로만 채워진 기사 보다는 꼭 필요하지만 대통령이 말하기 꺼리는 얘기를 듣고 싶다. 그날도 ‘조국 전 장관에 마음의 빚이 있다’는 발언의 의미를 물었지만 문 대통령은 “당장 대답하는 것은 그렇고, 다음으로 미루어두고 싶다”며 답변을 피했다.


언론의 ‘5월 9일 밤’ 기사는 4월 초엔 문 대통령의 9일 밤 숙박 장소 맞추기에서 출발해 4월 중순엔 신구 권력대결로 비화했다가 4월 말에는 ‘5월 9일 18시 퇴근’으로 마무리됐다. 이런 기사는 기자들만 관심 있지, 국민들은 아무 관심 없다.

그 사이 언론은 ‘검수완박’이란 신박한 이슈를 길어 올렸고, 다시 ‘검수완박’이 모든 이슈를 다 묻었다. 언론이 ‘5월 9일 밤’과 ‘검수완박’에 미쳐 있는 사이 가습기 살균제 유해물질을 제품 겉포장에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애경산업과 SK케미칼에 공정위가 부과한 시정명령과 과징금이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 기사는 묻혔다. 지난해 광주에서 신축중인 아파트 붕괴사고를 낸 현대산업개발에 서울시가 8개월 영업정지 처분 대신 과징금 4억 원의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사실도 묻혔다. 두 번이나 기초급여 신청에서 떨어진 80대 어머니와 50대 아들이 수도 서울의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지만 발생기사 수준에 그쳤다. 복지전달체계의 문제점을 파헤친 기사는 찾기 힘들다.

누가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나. 언론이다. 왜 언론은 늘 작은 것에만 흥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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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그 사이 언론은 ‘검수완박’이란 신박한 이슈를 길어 올렸고, 다시 ‘검수완박’이 모든 이슈를 다 묻었다. 언론이 ‘5월 9일 밤’과 ‘검수완박’에 미쳐 있는 사이 가습기 살균제 유해물질을 제품 겉포장에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애경산업과 SK케미칼에 공정위가 부과한 시정명령과 과징금이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 기사는 묻혔다. 지난해 광주에서 신축중인 아파트 붕괴사고를 낸 현대산업개발에 서울시가 8개월 영업정지 처분 대신 과징금 4억 원의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사실도 묻혔다. 두 번이나 기초급여 신청에서 떨어진 80대 어머니와 50대 아들이 수도 서울의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지만 발생기사 수준에 그쳤다. 복지전달체계의 문제점을 파헤친 기사는 찾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