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문명’이라면, 기꺼이 ‘바바리안’이 되겠다

[이슈②] 2022년, 장애인들은 왜 지하철 출근길을 막는가?


문명의 진실

지난 3월 28일,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출근길 투쟁을 두고서 이렇게 말했다. “최대 다수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해야 주장이 관철된다는 비문명적 관점으로 불법 시위를 지속하고 있다.” 장애인 권리예산 요구에 대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답변을 기다리며 한동안 삭발식 릴레이 투쟁으로 지하철 시위를 대신한 전장연이 인수위의 미진한 답변에 22일 만에 지하철 시위를 재개하자, 그는 또다시 “비문명” 카드를 꺼내 들었다. 수많은 시민에게 “불편을 야기한” 홍콩 민주화 투쟁을 지지한 바 있으며, 심지어 정부를 향해 총구를 겨눈 제주 4·3 항쟁, 여순항쟁 희생자 유족의 한을 풀어드리겠다 공언한 이 대표에게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문명이고, 어디까지가 비문명일까?

이 대표의 발언은 수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어쩌면 그는 의도치 않게 문명의 진실을 폭로했는지도 모르겠다. 문명이란 단어가 가진 찬란한 아우라 이면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피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문명’이란 단어는 라틴어 ‘키위타스(Civitas)’에서 기원했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치체’이자, ‘시민들이 공적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의 ‘공공선’과 ‘정치적 권리’란 노예 및 바바리안(barbarian)에 대한 착취와 배제 속에서만 가능했다. 한편, 이에 저항한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는 ‘자격 없는’ 비-시민들이 문명에 가한 야만적 폭력일 뿐이었다.

‘인권의 승리’를 선언한 근대에는 어땠을까? ‘문명(civilisation)’은 서구 선진국의 진보성을 대변하는 단어였지만, 이 역시 비-시민에 대한 수탈과 착취 속에서나 가능했다. 자본-국가 간 제국주의 동맹은 ‘팽창을 위한 팽창’이라는 숭고한 목적과 함께 식민지를 확장해갔고, 이를 문명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자국에서라고 다르지 않았다. 가진 게 몸뚱아리밖에 없는 노동자는 문명을 건설하는 데 자신의 온 생명을 갈아 넣었고, 역설적으로 그 탓에 ‘먹고 사는 것밖에 모르는’ 비문명인은 최소한 ‘덜 문명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문명은 양복을 입고 변호사를 대동한 이들, 고상한 토론을 즐기고 교양을 쌓을 여유가 있는 신사들의 대명사일 뿐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장애인’ 역시 이 문명 속에서 비로소 탄생했다. 자본주의 시초축적기 ‘피의 입법(Blutgesetzgebung)’은 기존 경작지에서 사람들을 내쫓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던 임금노동을 강제했다. 새 노동규율에 적응할 수 없던 이들은 부랑자가 돼 구빈원에서 노동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거쳐도 여전히 ‘임금 노동을 할 수 없는 자’들은 ‘능력이 없는 사람(dis-abled people)’, 즉 ‘장애인’으로 분류됐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내 문명 외곽에 자리한 시설에 수용된다. 19세기 문명은 ‘쓸모없는 생명’을 ‘경제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금세 발명할 정도로 이미 고도로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어떤 장애인들은 프릭쇼(freak show)에 올랐다. 비문명을 전시하는 것만큼 문명의 찬란함을 부각해주는 건 없는 법이다. 한편, 어떤 장애인들은 존재 자체의 소멸을 주문받기도 했다. 수십억의 문명인들이 조국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여기에 동참했고, 수많은 과학자는 이를 ‘자연법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문명의 상징이라던 ‘인권’마저도 이 거대한 경제 논리, 자연의 필연 법칙 앞에서는 너무나도 허약할 뿐이었다.

문명적인, 너무나 문명적인: 왜 우리는 지하철을 막는가?

착취와 배제가 ‘문명’의 전통이라면, 한국은 이 전통에 가장 충실한 나라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은 문명의 진부한 문법에 따라, 법과 제도,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적 조건들을 비문명인을 배제한 채 설계해 갔다. 그 결과는 장애인에게 특히나 치명적이었다.


장애인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었다. 2001년 시작된 ‘비문명적’ 이동권 투쟁으로 상황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서울지하철 역사 22곳에는 엘리베이터가 미설치돼있고, 전국 저상버스 도입률도 27.8%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31일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개정되며 이제 시내버스는 대·폐차 시 의무적으로 저상버스로 교체해야 하지만, 고속·시외·마을버스 개선은 요원한 일이다. 장애인 콜택시도 이준석이 ‘대중교통의 생명’이라던 ‘정시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신청 후 20분 안에 차가 오는 경우도 있고,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대부분의 지자체가 장애인 콜택시를 민간위탁운영 하다 보니, 공공성을 담보하지도 못하고, 요금·운행시간·운행 범위도 지역마다 제각각이다. 대다수 지자체에서 장애인 콜택시로는 광역 이동이 불가능하며, 심지어 며칠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콜택시를 이용할 수 없는 곳도 있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다른 권리침해와 직결된다. 이동은 자유의 전제조건이며, 따라서 이동의 자유가 얼마만큼 보장됐는가는 곧 다른 권리들이 얼마만큼 실현됐는가의 시금석이 되곤 한다. 실제로 이동권 투쟁 전까지 상당수 장애인은 이동할 수 없어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등록 장애인의 37.6%의 최종학력은 여전히 초등학교 이하다(2020년 기준). 교육을 받지 못하니, 노동력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 한 번도 임금노동을 경험한 적 없는 장애인들이 수두룩하다. 자본 증식에 기여할 수 없는 그 어떤 활동도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 문명에서, 도무지가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애인이 노동 영역에 들어설 여지는 없다. 중증장애인의 경제활동참가율이 21.3%에 머물러 있는 것은,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 노동자가 9천여 명에 달하고, 장애인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율이 59.4%에 달하는 것(2020년 기준)은 이 문명의 당연한 결과다.

한편, 앞서 말했듯 ‘쓸모없는 이들’은 가둬두는 게 가장 ‘경제적’이다. 소위 ‘선진국’에서는 ‘탈시설’이 상당 부분 보편화됐지만, 한국은 아직도 3만여 명의 장애인들이 시설에 있다. 시설 내 인권침해는 비일비재하고,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고 해봐야 장애인은 그곳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해야 한다. 개인 공간 따윈 없으며,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친구를 만나고 싶을 때 친구를 만날 수 없다. 그 와중에도 온갖 그럴싸한 이미지로 포장된 시설은 문명인들이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그래도 문명은 아름다워 보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까? 착취와 배제로 유지되는 이 문명을 재생산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들조차 이제는 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탈시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목표 자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진 못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만으로는 장애인 삶이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려면, 그 요구에 합당한 만큼의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의 성장에 목을 맨 정치인들은 비문명에 쏟을 돈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탓에 장애인은 언제나 예산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 왔다. 장애인의 권리예산 요구에 정치인들은 언제나 이렇게 응답할 뿐이다. “문명에 위기가 찾아왔잖아요. 장애인만이 아니라 다들 힘들고 예산이 투입될 곳도 많아요. 어떻게 장애인들만 신경 씁니까?”

전장연이 인수위에 요구한 예산 증액분을 합쳐봐야 1.3조원이다. 윤석열 당선인조차 장애인 공약집에서 “우리나라 장애인 지원 정부 예산은 GDP 대비 0.6%로 OECD 평균인 1.9%의 3분의 1 수준”인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전장연의 요구만큼 예산을 증액해도 한국 장애인 예산은 여전히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예산이면 부족하나마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도 시외·고속·마을버스를 탈 수 있고, 장애인 콜택시를 공공성 있게 운영할 수 있다. 장애인 자립 지원·활동 지원을 기존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고, 이로써 탈시설을 반대하는 장애인 당사자 부모들이 탈시설을 찬성하는 장애인들과 첨예하게 대립할 가능성도 적어진다. 장애인도 이제는 배움을 즐길 수 있고, 경쟁에서 밀려날 걱정 없이 노동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번 인수위 역시 결국에는 이 예산에 대한 책임을 기획재정부에 떠넘겼다. 지난 5년간, 문재인 정권이 보인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허구적인 GDP 성장 신화를 이어가는 것은, 자본가와 건물주의 부를 증식하는 것은, 심지어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는 데 드는 예산은 딱히 비문명적 과정을 겪지 않고도 잘만 투입된다.

‘너무나도’ 문명적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문명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막아서고 ‘바바리안’스러운 리듬으로 “21년 외쳤다”고 소리를 지르는 건, 문명에 문명적으로 대응해봤자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명이라면: ‘비문명연대전선’을 제안하며

난데없이 출근길이 막힌 비장애인 노동자들은 매일 고함을 친다. “오늘 늦게 가서 내 일당 날리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내가 얼마나 먹고살기 힘든 줄 알아? 지하철이 장애인들 거야? 나도 권리가 있다고!” 비문명인들 입장에서야 이 문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이 ‘문명을 멈춰 세우는 것’밖에 없어 이 방법을 택했지만, 노동자들의 고함에 미안한 마음이 솟구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전장연은 지하철을 막을 때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그러나 제발 우리 좀 함께 삽시다.”

더 비극적인 건 성난 노동자들이 외치는 ‘권리’의 정체다. 이 문명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노동을 할 수 없다. 노동자는 이 사회가 시급하게 요구하는 어떤 사안에 동참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심지어 반드시 노동을 멈춰야 하는 그 어떤 비상사태에도, 자본에 자기 노동력을 양도하기로 계약한 그 시간에 딱 맞춰 출근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 ‘의무’를 어쩔 수 없이 이행할 수 없을 때, 잔뜩 출근하기 싫은 표정을 짓고 매일을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명이 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인류 모두를 시·분·초 단위의 사슬로 옭아매고, 당신들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 시간성을 준수해야만 한다고, 그것이 바로 문명이라고 가르쳐온 결과일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출근할 권리’란 사실 ‘착취당할 권리’인지도 모른다.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자본이 강탈해 가는 걸 용인하는 생산 라인에 ‘제시간’에 당도하기 위해, 정시출근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권리’인 것 마냥 외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노동자는 자신을 그 시간에 억지로 출근시킨 자본가가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문명의 피해자인 장애인을 적으로 오인하게 된다.

비문명적 시위는 문명이 처벌한다. 그런데 이 ‘피해자들 간의 적대’라는 비극을 양산하는 문명의 범죄는 도대체 누가 처벌할 수 있단 말인가?

일본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급진 당사자주의 단체 ‘푸른잔디회’는 행동강령에서 “비장애인의 문명을 거부한다”라고 선언했다. 1960~70년대 이들은 실제로 전투적으로 문명과 맞섰고, 심지어 비장애인들을 배척했다. 그러나 이들만큼 전투적일지언정, 전장연은 비장애인들과의 연대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장연은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의 문명 안에서 함께 살아갈 것을 요구하며, 이로써 이 문명을 대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비장애인-장애인 간 연대저항전선을 구축할 때, 비로소 이 문명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변혁할 수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을 막아 세우는 것이 이 문명의 범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총파업 대오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지역사회에 살면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삶, 배움을 즐길 수 있는 삶, 내가 필요한 만큼, 원하는 만큼 노동을 할 수 있는 삶, 자본과 직업정치인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우리’가 이 사회의 생산과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삶, 그 ‘소박한’ 요구의 아우성이 만나 이 문명을 멈춰 세울 때, 그제야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지하철이 멈춰 설 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잊지 말자. ‘우리’는 모두가 이 문명의 피해자다. 그리고 이것이 문명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바바리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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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을 막아 세우는 것이 이 문명의 범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총파업 대오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지역사회에 살면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삶, 배움을 즐길 수 있는 삶, 내가 필요한 만큼, 원하는 만큼 노동을 할 수 있는 삶, 자본과 직업정치인들, 고위 공무원들이 아니라 ‘우리’가 이 사회의 생산과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삶, 그 ‘소박한’ 요구의 아우성이 만나 이 문명을 멈춰 세울 때, 그제야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지하철이 멈춰 설 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 너무너무 달라요

    오늘 윤석열대통령 취임식생중계를 하는데 윤석열 대통령백과사전에는 장애인들에 대한 인권자체가 없다는것을 알아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