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단심의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 이현경

[혁명을 꿈꾼 여성들]

  이현경 [출처: 수원박물관]

“후리후리한 키와 반짝반짝하는 백금치(白金齒)에 영리하고도 이해 잘 따지기로 유명한 수원인(水原人)의 특징을 소유한 그는 기자로서 남을 방문하거나 또는 무슨 기사를 취급할 때에 상대자에게 호감을 주고도 민첩하게 잘하였다. 그는 안광천(安光泉)군의 애인이요,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의 간부이니 만치 기자 직업은 역시 부업으로 하고 사회운동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개벽》이라는 잡지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분이다. 이 글에서 ‘그’는 수원 출신의 기자로서 지혜로운 호감형의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바로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섰던 이현경(1899~?)이다. 안광천(1897~?)은 김재봉, 강달영, 김철수에 이어 조선공산당 4대 책임 비서를 지낸 인물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이 아닌 ‘혁명적 인민공화국’ 건설을 구상했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현경은 수원을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여성운동가인 나혜석만큼 유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 면면을 보면 수원을 대표할 만하다. 이현경은 수원시 산루리(현 교동)에서 태어났는데, 산루리는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수원청년동맹과 수원노동조합 역시 산루리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이현경의 바로 밑 여동생인 이선경(1902-1921)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독립투사다. 이선경은 서울 숙명여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참여해 체포된 전력이 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수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단 ‘구국민단’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떠나려던 찰나에 일제에 발각돼 고문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고문이 너무 지독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풀려났다. 이때 이선경의 변호사가 김우영인데, 바로 나혜석의 남편이었다. 나혜석과 이선경 자매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그는 석방 9일 만인 1921년 4월 21일 순국했다. 그의 나이는 유관순과 같은 19살이었다. 막냇동생 이용성(1906-1974)도 ‘수원청년동맹’, ‘수원체육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해방 후에도 수원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누나들의 장엄하고 열성적인 민족해방투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현경은 동생들과 달리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이다. 이현경의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은 전형적인 부유층 자제의 평범함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성공회 수원교회에서 운영하던 사립 진명학교를 다녔다. 1914년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진학해 1917년 3월 25일에 졸업했다. 그리고 1918년쯤 경남 밀양의 보통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교편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경성여고보 절친인 이덕요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일본 동경에서 일본여자대학에 입학한 이현경은 1920년과 1921년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다 검거됐다. 1920년 3.1운동 1주기 만세 시위에서 이현경은 연행됐으나 단순가담자로 판단돼 하루 만에 석방됐다. 이듬해인 1921년 3월 1일에도 조선 유학생들은 3.1운동 2주기를 맞이해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를 불렀다. 140여 명의 유학생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펼친 것이다. 이때 20명의 조선 학생이 검거됐는데, 1921년 3월 6일자 〈조선일보〉에 ‘조선 학생 20명 검속 후문, 검속된 학생 중에는 조선 여학생 이현경 외 오명이 함께 검속’이란 기사가 실렸다. 이현경은 만세 시위 운동의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동생 이선경이 수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때 언니 이현경은 ‘일본제국주의 심장부’ 동경에서 옥고를 치른 것이다. 이들 자매의 비장한 결기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이현경(오른쪽)과 이선경(왼쪽) [출처: 수원시청]

이처럼 3.1운동은 단순한 만세운동이 아니다. 여성이 앞장서서 민중을 각성시키고 비로소 근대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든 혁명적 사건이다. 민주공화국을 새로운 체제의 대안으로 내세우면서 봉건적 잔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활발히 진행됐다. 특히 가부장제의 관습을 강요받던 여성들이 봉건 의식에서 벗어나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운동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의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운동은 이념적 분화를 겪게 된다. 하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운동이다. 이때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 등장하면서 1920년대 여성운동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게 된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1920년대의 세계적 조류로 미국, 중국, 일본 유학생 중심으로 수용됐다. 이들은 여성 억압의 근원이 사회구조에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사회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했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누구나 한 번은 사회주의자가 될 만큼 동경심이 강했다. 이러한 사상적 소용돌이 중심에 이현경이 있었다.

1925년 3월에 이현경은 동경에서 황신덕, 정칠성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성사상단체 삼월회 결성했다. 이들은 “조선 여성은 계급적·봉건적·인습적 압박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으므로 무산계급 남성과 제휴하여 인류의 압력을 근본적으로 일소하고 민중 본위의 새로운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조선 여성의 해방’과 ‘무산계급 남성과의 제휴’라는 선언문을 채택, 강령과 규약을 발표했다. 삼월회는 일본의 조선노동총동맹과 일월회 등 사회주의 단체와 연대해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다.

이현경은 1926년 3월 일본여자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잠시 국내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어 동아일보 기자로도 활동했으며, 국내 여성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에도 가입해 간부로 활동했다. 기자로서의 활동보다는 사회운동에 전념하다 보니 많은 기사를 남기지는 못했다.

이현경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한 시기는 조선 사회주의 운동에서 ‘운동선의 통일’과 새로운 운동노선이 제기되는 때였다. 즉, 노선을 통합하자는 운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1926년 그해 여름, 안광천이 일본에서 귀국했다. 조선 민족해방 투쟁을 위해 역량을 강화해야 했고, 그에 적합한 사회주의 운동의 단일적 조직이 필요했다. 12월 6일 개최된 조선공산당 2차 당대회는 조선공산당이 ‘통합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려는 시도였다.

같은 시기 이현경도 황신덕과 함께 여성 사회주의운동의 통합을 위해 구체적인 활동에 나섰다. 먼저 파벌로 인해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경성여자청년동맹과 경성여자청년회의 합동을 추진했다. 1926년 11월 14일 서울 시내 여성 운동가들이 원동 조선여자청년회관에서 열린 ‘재경부인운동자간친회’ 자리에 모였다. 여성 사회주의운동의 통일과 단일 조직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는 조선여성동우회의 이현경, 황신덕, 강아그니아, 경성여자청년회의 박원희, 김수준, 신기숙,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심은숙, 조원숙, 심은숙, 김정은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마침내 1926년 12월 5일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 두 단체가 통합을 결의하고 중앙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이러한 노력은 민족주의 및 종교계 여성운동 세력과 협력적 관계를 모색하는 기반이 됐다. 1927년 근우회를 결성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해를 넘겨 1927년 1월에는 신간회가 발기인 대회를 개최했다. 이제는 좌파 내 통합 운동을 넘어 좌우 연합 운동으로 확대됐다. 여성운동에서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의 운동가들을 아우르는 전국적 통일기관의 시급성이 제기됐다. 그 출발은 유학생 출신들의 친목 모임으로부터 시작됐다. 1927년 2월 14일 서울에서 동경 여자 유학생들의 친목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동경 여자 유학생 친목회를 상설기관으로 조직하기로 결정했고 이현경은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4월 16일에 외국 여자유학생 친목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전국적인 단일여성단체의 결성을 결의했다. 이어 4월 26일 발기인 총회를 열어 단체의 명칭을 ‘근우회’로 결정하고 창립 준비위원을 선정했다. 이현경은 17명의 준비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1927년 5월 27일, 마침내 근우회가 결성됐다. 이현경을 비롯해 정종명, 박원희, 주세죽 등 조선여성동우회 출신의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여자교육회 및 YWCA의 기독교계 인사 등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단체지도자들이 함께했다. 근우회 창립대회에서 이현경은 황신덕, 박원희, 김활란, 이덕요 등과 함께 집행위원을 선정하기 위한 전형위원으로 선정됐다. 이어 이현경은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정돼 조사부에 배치됐다.

한편, 이현경은 여성해방론의 일반적 확대를 위해 대중 강연에 참여하고 매체를 활용하기도 했다. 1927년 이현경은 〈사회인으로의 부인의 사명〉에서 사회의 무산계급과 유산계급,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분석하고 “피지배층이 궐기하는 것은 당연한 정의이며 사명이다. 여자가 사회적으로 사람이 아니었음을 자각하고 당당한 주체로 각성할 것”을 역설했다. 여성의 사명 가운데 경제에서의 해방이 가장 중요함을 역설했다.

또한 《현대평론》에 ‘경제 상태의 변천과 여성의 지위’를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현경은 경제조직의 변천에 따른 여성 지위의 변화 과정을 설명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 이현경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지위는 경제 상태의 변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했다. “여성이 가정적으로 해방되고, 교육적으로 해방되고, 경제적으로 해방되고, 그리고 정치적으로 해방될 사회가 온 때, 비로소 여성은 완전히 해방된다. 그때 지구는 아름다운 낙원이 된다. 진보하여 가는 인류사회는 여사한 미래를 향하여 돌진한다”라고 글을 맺었다.

근우회에서 이현경은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근우회 내부 운동론을 둘러싸고 노선 차이로 갈등이 증폭돼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공산당원에서 제명됐지만, 남편인 안광천에 의해 복당되는 과정에서 당규를 위반하는 사태가 발생해 부부가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됐다.

그 후 이현경과 안광천은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1929년부터 1930년대 전반기까지 김원봉과 함께 베이징에서 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현경은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여성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해방된 조국에서도 잊힌 사람이 됐다.


[참고문헌]

– 박철하, “같은 길, 다른 선택-혁명과 친일의 갈림길에 서다”, 《수원지역 여성과 3·1운동》. 경기도. 2008.
– 박철하, “수원출신 사회주의 여성 혁명가 이현경”, 《수원역사문화연구》 제7호. 수원박물관. 2019.
– 이배용, “한국 근대 여성의식 변화의 흐름”, 《한국사 시민강좌》 제15집. 일조각. 1994.
– 한동민,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선경과 이현경”, 《수원역사문화연구》 창간호. 수원박물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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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또한 《현대평론》에 ‘경제 상태의 변천과 여성의 지위’를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현경은 경제조직의 변천에 따른 여성 지위의 변화 과정을 설명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 이현경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지위는 경제 상태의 변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했다. “여성이 가정적으로 해방되고, 교육적으로 해방되고, 경제적으로 해방되고, 그리고 정치적으로 해방될 사회가 온 때, 비로소 여성은 완전히 해방된다. 그때 지구는 아름다운 낙원이 된다. 진보하여 가는 인류사회는 여사한 미래를 향하여 돌진한다”라고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