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에 대한 무지와 공포가 ‘혐오’를 부추긴다

[기고] ‘노조혐오’를 ‘혐오’라 말하자①

‘노조혐오’를 ‘혐오’라 말하자

①노조에 대한 무지와 공포가 ‘혐오’를 부추긴다
②노조혐오를 먹고 자란 귀족노조론
③신문과 방송이 노조를 혐오하는 방식

‘혐오[嫌惡]’, 국어사전에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라 설명하고 있다. ‘어떤 것을 싫어하고 미워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으로, ‘어떤 이유, 경험에서든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강한 느낌. 거부와 분리의 감정과 행동을 동반’하기도 한다.

사적 영역에서 특정한 것에 대한 호불호를 두고 혐오로 범주화 하지는 않는다. 호불호가 사회적 영역에서 표현되고 누군가 배제되고 분리되거나 공공연한 조롱거리가 될 때 ‘혐오’ 표현, ‘혐오’ 행동이라 불린다. 상대적으로 강자가 약자에게 사용할 때 혐오의 범주에 들어선다. 혐오는 사회적 논의 수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혐오로 분류되는 대상 또한 변한다.

예를 들어 인종과 국가, 지역 등에 대한 멸시나 차별과 같은 표현과 행동은 전통적 혐오의 범주다. 반면 어느 분야의 초보자거나 미숙한 사람들을 뜻하는 ‘주린이, 요린이, 갬린이’와 같은 표현이 아동을 비하하고 차별한다며 사용 자제를 권고한 인권위의 발표는 혐오의 대상과 표현 방법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조합은 여러 이유로 멀리해야 하는 대상이자 금기의 역사였다. 한때는 빨갱이라는 낙인찍기로 분리 배제됐고, ‘순수?한 노조’라는 이름으로 연대와 활동범위가 제약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최근 화물연대 파업 관련 기사와 댓글에서 혐오 발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성노조의 떼쓰기’ ‘기득권’ ‘귀족노조’ 따위의 표현 또한 빈번히 등장한다.

‘떼쓰기, 기득권, 귀족노조’로 낙인찍는 표현은 그 자체로 혐오의 범주에 속한다. 헌법에 명문화된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 행사를 두고 떼쓰기라면 헌법과 관계 법령이 보호하고자 하는 노동삼권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노동삼권을 적극 행사하는 노동조합을 귀족노조, 기득권이라 칭하며 분리 배제하려는 것은 또 온당한가?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무지와 공포가 혐오를 부추겨

타자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공감하며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자신의 이익 또는 사회,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해서 공감하고 분노하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 발언들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을까.

대개의 혐오는 무지와 공포에서 나온다. 노조혐오도 마찬가지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사실상 임금노동자이거나 그의 가족임에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노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노동삼권을 객관식 문제로 고를 수는 있으나 그 내용을 세세히 알고 체화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냥 노동자라고 불리기보다 회사원, 직장인, 공무원, 연구원, 00직원으로 불리기를 선호하는 현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런 노동자, 노조 멀리하기는 ‘노동조합=빨갱이=탄압’이 등치되는, 과거 공포의 기억도 한 몫 한다.

‘이재용, 정의선, 최태원, 정용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 회사에 취직했다’ 와 ‘고속 승진’이라는 공통점이다. 그리고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새 정부 들어 ‘공정채용법’이란 이름으로 고용세습을 차단하겠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임직원 자녀 채용을 골자로 한다는데, 대주주의 자녀도 포함될지는 모르겠다. 대주주가 자녀에게 주식을 양도, 상속하는 거야 자본주의 개인재산에 관한 것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아버지가 회장이라고 대주주 자녀까지 일찌감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아버지 회사에 입사해 자리를 물려받는 건 공정 채용, 공정 경쟁일까? 위에 언급된 또는 다른 재벌가의 많은 자녀들이 입사하고 임원으로 고속 승진하는 것은 공정하기에 아무 문제없는 것일까? 고용세습이라는 잣대로 귀족노조라는 혐오를 부추기고 확대하는 움직임이 아닌, 부디 대주주 자녀의 입사도 제한되는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헌법 가치인 노동조합을 비하, 혐오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사회발전에도 도움이 안 되는 혐오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와 공포에서 시작되고 이해관계에 따라 확대 재생산되는 혐오! ‘노조혐오를 혐오라 말하자’는 ‘귀족노조 프레임에 대한 팩트체크’, ‘미디어는 어떻게 노조를 바라보고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는지’를 살펴본다. 최소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땀 흘려 일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욕하고 조롱하고 배제하려는 시도, 이에 동조하는 행위들을 ‘노조혐오’라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일 당신이 노동자와 노조라는 이름에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다면, 노조를 향해 부지불식간에 욕을 하고 있다면 스스로 알아보길 바란다. ‘노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노동삼권을 시험문제에서만 배웠던 것은 아닌지?’ ‘나의 무지와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가 혐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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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창기

    마약쟁이 이재용을 다시 감옥으로 보내주세요
    삼성전자 베트남법인 현지채용 한국인근로자에 갑질, 언어폭력을 일삼고 개선에 응하지 않고
    한국인 근로자를 억압하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 악덕기업주 이재용
    - 주요 내용
    1. 부당해고 : 입사 설명회 시 정년 보장 약속 하였음
    ☞ 그러나 매년 몇 명씩 퇴사 조치하고 있음, 언제 해고 될 지 모르는 상태 근무하고 있음
    2. 주말(토,일) 강제 출근 요청에 의한 강제노동으로 주말 휴식 미 보장
    ☞ 쉬는 토요일 강제 근무시키고 특근비 미 지급
    3. 주재원과 현지채용 한국인과는 갑과 을의 관계로 갑질 만연 : 신 노예제도라 할 수 있음
    ☞ 화가 났을 때 언어 폭력 및 자신과 맞지 않으면 부당해고 조치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연락(+84914999083, 1325h20@gmail.com)주십시요
    감사합니다.

  • 울산 김석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노동착취와 이윤극대화를위한 야만적인 자본의 질서 원,하청노동자 하나되어 반드시 척결해야한다. 민주노조! 열사정신을!! 외친다면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몇마리가 수백마리의 물소때를 흩어지게 만들고 그중 한마리를 잡아 먹는것을 볼수있다. 그런데 수백마리의 물소때가 뭉쳐서 사자를 공격하면 그들은 아무런 희생과 걱정없이 살아갈수 있을텐데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노동자와 자본가 물소때와 사자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우리 노동자들의 의식은 어디에 머물고있는가?

  • 울산 김석진


    마지막 결투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양심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전선이다 무덤이다 감옥이다
    도대체 형제의 살해 앞에서 저항하지 않고
    누가 자유일 수 있단 말인가
    동지여 자본주의를 반대하여 싸우지 않고
    착취 받고 억압당한 민중들을
    옹호하여 싸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혁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김남주>



    녹두장군을 추모하면서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 없는 투쟁
    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우리는 그의 이름을
    키가 작다 해서
    녹두꽃이라 부르기도 하고
    농민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수령이라 해서
    동도대장, 녹두장군
    전봉준이라 부르기도 하니

    보아 다오, 이 사람을
    거만하게 깎아 세운
    그의 콧날이며 상투머리는
    죽어서도 풀지 못할 원한, 원한
    압제의 하늘을 가리키고 있지 않는가
    죽어서도 감을 수 없는
    저 부라린 눈동자, 눈동자는
    90년이 지난 오늘에도
    불타는 도화선이 되어
    아직도
    어둠을 되쏘아보며
    죽음에 항거하고 있지 않는가
    탄환처럼 틀어박힌
    캄캄한 이마의 벌판, 벌판
    저 커다란 혹부리는
    한 시대의 아픔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대의 상처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대의 절망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보아다오 보아다오
    이 사람을 보아다오
    이 민중의 지도자는
    학정과 가렴주구에 시달린
    만백성을 일으켜 세워
    눈을 뜨게 하고
    손과 손을 잡게 하여
    싸움의 주먹이 되게 하고
    싸움의 팔이 되게 하고
    소리와 소리를 합하게 하여
    대지의 힘찬 목소리가 되게 하였다
    그들 만백성들은
    이 위대한 혁명가의 가르침으로
    미처 알지 못한 사람들과
    형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 세상을 겨냥한 동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한번도 맛보지 못한
    자유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과 동지를 분간하여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전투에 가담할 줄 알았으니

    보아다오, 그들은
    강자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자유를 위해 구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부호의 담벼락을 서성거리며
    밥을 위해 토지를 위해
    걸식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판관의 턱을 쳐다보며 정의를 위해
    기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성단의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선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돈뭉치로 선을 사지도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이빨 빠진 사자가 되어
    허공에 허공에 허공에 대고
    허망하게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만인을 위해
    땅과 밥과 자유의 정복자로서
    승리를 위해 노래하고 싸웠다
    대나무로 창을 깎아
    죽창이라 불렀고 무기라 불렀고
    괭이와 죽창과 돌멩이로 단결하여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양반과 부호의 다리를 꺾어
    밥과 땅과 자유를 쟁취했다

    보아다오, 보아다오
    새로 태어난 이 민중을
    이 민중의 강인한 투지를
    굶주림과 추위와
    투쟁 속에서 더욱 튼튼하게 단결된
    이 용감한 조직을 보아다오
    고통과 고통과의 결합
    인간의 성채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이 끊임없는 싸움, 싸움을 보아다오
    밥과 땅과 자유
    정의의 신성한 깃발을 치켜들고
    유혈의 전투에 가담했던
    저 동학농민의 횃불을 보아다오
    압제와 수탈의 가면을 쓴
    양반과 부호들의 강탈에 항쟁했던
    저 1894년 갑오년
    농민혁명의 합성을 들어다오
    그리고 다시 우리 모두 이 사람을 보아다오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 있고
    영구히 살아남을 이 사람을
    녹두 전봉준 장군을 보아다오.

    <김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