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이 많은 도시, 차별은 같았다

[코로나19 특별기획] 음성군 이주민들은 감염병을 어떻게 견뎠을까

코로나19 보고서: 멀고 낮은 곳부터 파괴했다

차례

① 코로나 재택 치료 72시간, 엄마는 깨어나지 못했다
② 코로나19의 정부, 차별과 배제를 더 넓게 더 깊게
③ 코로나19 이후, 국민은 ‘의료 인력·공공병원 확충’ 원한다
④ 간호사들은 왜 ‘사람 잡을까’ 공포에 떠나
⑤ 의료민영화 흐름 속 공공의료 확대 가능한가<1>
⑥ 의료민영화 흐름 속 공공의료 확대 가능한가<2>
⑦ 돌봄 노동자에게 감염병이 특히 버거웠던 이유
⑧ 이주민이 많은 도시, 차별은 같았다
⑨ 장애인의 일상이 여전히 재난인 이유
⑩ 코로나19 2년, 안녕하지 못했던 사람들
⑪ 전염병과 봉기, 혐오와 차별의 역사
⑫ 감염병은 ‘혐오’를 먹고 자랐다
⑬ 10명 중 6명 “코로나19 이후 혐오 표현 늘어”...‘사회적 양극화’ 때문
⑭ 질문들 감염병 시대, 처벌이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⑮ 99%의 경제 코로나19 대응, 시장 솔루션의 한계


외국인 주민이 전국 시군구에서 가장 많은 충청북도 음성군. 코로나19를 거치며 이곳 거리에선 이주민을 예전만큼 보기 어려워졌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음성에 머물렀던 많은 이주노동자가 본국으로 돌아간 영향도 있지만, 사업주들이 이주노동자를 기숙사 밖으로 못 나오게 했던 탓이 컸다. 이주민 비율이 높은 지역이라고 해서 차별이 없지도 않았다. 이곳의 이주노동자들은 감염병 시기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참세상》이 제조업, 축산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음성을 찾았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음성군은 2020년 기준 총인구 대비 외국인 비율(시군구 기준)이 14.6%로 가장 높은 지역이다. 그해 이주민 수는 1만 3천여 명이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이주민들이 본국으로 떠나고, 신규 입국도 어려워지면서 지난 6월 30일 기준 음성에는 8,521명의 이주민이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음성군의 서쪽에 있는 대소면과 바로 옆에 있는 금왕읍에 가장 많다. 이곳에 공장이 많기 때문이다. 북부의 생극면과 그보다 더 위의 감곡면에는 농업 분야 이주민들이 주로 거주한다. 대소터미널 인근 택시 승강장에 있는 손님의 70%는 외국인이라고 한다. 한 택시 기사는 본인 소유 승용차가 없는 이주민들이 주말만 되면 일주일 치의 식료품을 사기 위해 택시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한때 금왕읍의 무극시장에도 이주민이 바글바글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말, 봉고차를 타고 나타난 법무부 출입국 직원들이 미등록 이주민들을 잡아가면서 이주민의 발길이 부쩍 줄었다. 이 사건에 코로나19까지 겹쳐 버리니 일요일 저녁인데도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들이 기숙사 앞에 서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수밋 씨. [출처: 은혜진 기자]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수밋

코로나19 확산세가 주춤했던 시기라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수밋 씨를 그의 기숙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저녁 시간에 찾아간 기자에게 수밋 씨와 동료들은 직접 재배한 토마토와 청양고추를 넣은 샐러드와 바게트를 줬다. 기숙사에서 네 명의 스리랑카 이주노동자와 함께 사는 수밋 씨는 음성의 스리랑카 커뮤니티의 대표도 맡고 있다.

한국에 온 지 12년째가 된 수밋 씨는 현재 금왕읍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 다니고 있다. 그의 회사는 쌍용자동차와 일본 자동차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고 있다. 관리자를 포함해 약 54명이 일하고 있는데 이 중 20명 정도가 이주노동자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수밋 씨도 다른 이주노동자들처럼 고용허가제 비자로 알려진 비전문취업(E-9) 비자로 일했다. 그러다 4년 전 특정활동(E-7) 비자로 바꾸면서 지금 회사에서 주임으로 직급이 올랐다.

수밋 씨는 현재 시간당 임금으로 계산해 회사로부터 임금을 받고 있다. 주 52시간을 근무하는 그는 일이 많을 땐 시간당 임금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주임이 되고 현재 매달 240만 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수밋 씨는 나중에 본국의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전했다. 벌써 12년을 한국에서 살았으니 본국에 있는 아이, 아내를 불러 함께 삶을 꾸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부도 사태에 빠진 스리랑카의 경제 상황 때문이다. 그의 동료들도 스리랑카에 있는 가족들의 생각이 많이 났을 것이다. 이들은 본국의 상황에 대해 “기름 부족으로 사람들이 차가 아닌, 말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밥도 나무를 잘라다가 지어 먹는다”라고 전했다.

  스리랑카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자동자 부품 공장. [출처: 은혜진 기자]

한편, 수밋 씨를 통해 미등록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앞서 지난해 나주시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기 위해 보건소를 방문했던 미등록 이주민들이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정부가 이주민들의 코로나 검사를 장려하기 위해 미등록 이주민을 단속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한때 수밋 씨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친구들도 체포될까 두려워 보건소를 방문하지 못했다. 출신 국가별로 커뮤니티가 잘 갖춰져 있는 음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마 중인 렌즈들. [출처: 은혜진 기자]

베트남 이주노동자, 린

수밋 씨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다음 일정을 위해 고소피아 음성외국인도움센터 센터장이 베트남 이주노동자 린(가명)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밋 씨는 린 씨에게 “얼굴 한번 보자,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생극면에 있는 광학렌즈업체에서 일하는 린 씨는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 수밋 씨와 한국어 수업을 같이 들은 친구다.

고용허가제 비자로 일하는 린 씨는 한국에서 5년을 살았다. 린 씨는 산속에 위치한 공장에서 렌즈를 연마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 12시간 반을 일하는 그는 내내 서 있어야 하는 근무 환경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한 번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계에 손등을 찧은 적도 있었다. 다행히 바로 작업을 할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니었는데, 똑같은 방식으로 다친 그의 동료는 한 손으로 일을 이어가야 했다. 동료는 상처를 입은 그날 병원에 갔지만, 뼈에 이상이 없단 얘기를 듣고 다음 날부터 이틀간을 한 손으로 일했다. 자신과 동료가 다루는 기계를 보여준 린 씨는 “회사가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광학렌즈업체의 기계들. [출처: 은혜진 기자]

네팔 이주노동자, 니르멀

네팔 출신인 니르멀 씨는 지난 5년 동안 축산업에서만 일했다. 처음 3개월은 돼지 농장에서, 다음 1개월은 닭장에서 일했고, 현재까지는 또 돼지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가 처음에 일하던 돼지 농장을 그만둔 이유는 농장장이 일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무턱대고 일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일한 닭장에서는 한 공간에 열 몇 명이 들어가 자야 하는 숙소가 견디기 힘들었다. 사실 고용허가제 비자인 니르멀 씨의 경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을 보장하지 않는데, 두 사업장의 사업주는 사업장 변경을 동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니르멀 씨의 친구 중에는 사업장 변경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었다.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사장이 사업장 변경 허가를 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니, 친구들에게 며칠 동안 일을 주지 않고 그 기간 임금도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이주노동자가 마음대로 사업장을 바꿀 수 없도록 한 제도 때문이죠.”

니르멀 씨는 돼지의 분만과 관련된 일이라던가, 돼지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제조업 이주노동자들과 다르게 그는 최근까지만 해도 한 달에 쉬는 날이 이틀뿐이었다. 현재는 4일의 휴일을 받고 있다는 그는 연장근무를 제외하고 한 달에 280~290만 원을 받고 있다.

앞서 한 달간 일한 닭장의 숙소 환경 문제를 얘기하며 니르멀 씨는 아직 농촌에서는 냉난방이 안 되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존재한다고 전했다. 이들의 노동환경이 얼마나 구시대적인지를 금왕읍에서 만난 택시 기사가 잘 설명해줬다. 그는 50년 전,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에 음성에서 서울로 올라와 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조립식 컨테이너에서 생활했는데, 추워서 몸을 달달 떨었지. 방바닥에 불을 때는데도 위에는 찬 바람이 훅 불거든. 서울에서는 그냥 어떤 일이든 있으면 해야 했어. 명절이라고 추석에 한 번, 설에 한 번 고향에 가는 것 빼고는 항상 일해야 했지.”

마스크 차별

음성외국인도움센터를 통해 만난 이주노동자들은 모두 ‘잠깐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본국에 있는 가족들을 데리고 계속 살기 위해서는 영주(F-5) 자격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주말마다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한국어 수업이 막 끝난 이주민들에게 ‘코로나19로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한국에 온 지 9년 차가 된 네팔 이주노동자 서러즈 씨는 비자 변경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는 “비행기가 뜨질 않으니, 비자 변경을 위한 서류가 오고 가지를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비자를 바꾸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이주민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사업주가 사업장 밖을 나가는 것을 통제했다고도 말했다. 공장에서 한 명이 코로나19에 걸리면, 집단감염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은 이것이 아니더라도 감염병을 피해 자발적으로 외출을 자제했고 입을 모았다.

이주노동자들은 마스크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음성에서도 마스크에 대한 외국인 차별이 논란이 됐다. 고소피아 센터장은 “코로나19 초기에 군청에서 사회복지시설에는 마스크를 2천 장을 배부했는데, 센터에는 200장을 줬다”라고 꼬집었다. 센터의 회원만 해도 1,500명인 상황에서 터무니없이 적은 수량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지난 2020년 정부는 내국인의 경우 신분증만 있으면 공적 마스크 구매가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외국인은 외국인 등록증뿐 아니라 건강보험증도 제시하도록 했는데, 이 때문에 기껏 약국에 방문한 이주노동자들이 발길을 돌리는 일도 있었다.

“음성의 이주노동자에게
노동·주거·생활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요즘 이주노동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음성외국인도움센터에 따르면,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상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 ‘임금체불’에 관한 것이었다. 사업주가 초과근무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퇴직금 문제도 있었는데, 이를 본국에 가서도 돌려받지 못해 다시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오는 사건도 있었다.

지금은 세계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장기적으로 거주하고 싶어 하는 흐름이 있다고 센터는 전했다. 고소피아 센터장은 “음성에는 2천 개 정도의 공장이 가동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주노동자가 음성에 많이 유입됐다”면서 “한국은 경제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도움을 받는 상황이다. 정치가 이들을 쓰다 버린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주민들이 투표권이 없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정책이 특히 마련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음성의 민간단체들은 지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음성군수 후보에게 이주민들에 대한 정책 수립을 요구했다. △이주노동자 노동·주거·생활 실태 조사 및 개선 대책 수립 △이주민 차별 없는 행정 및 복지서비스 보장 △이주노동자 및 사업주 대상 안전교육 강화 △이주노동자 상담 및 법률지원팀 구성(전문 상담 인력) 등이다.

《참세상》은 음성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을 통해 미등록 이주노동자, 집이 아닌 비닐하우스에 사는 이주노동자 등 드러나기 어려운 이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2015년 36개에 불과했던 음성의 직업소개소는 현재 100개가 넘게 운영되고 있다. 고소피아 센터장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을 받는데, 인력사무소가 대폭 늘어난 만큼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음성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전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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