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과 봉기, 혐오와 차별의 역사

[코로나19 특별기획] 19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전염병 시대

코로나19 보고서: 멀고 낮은 곳부터 파괴했다

차례


전염병의 역사는 혐오와 차별의 역사다. 전염병의 공포와 불안이 퍼지면, 가장 먼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격리가 이뤄진다. 강제로 배제되거나 격리된 이들은 종종 폭동과 시위를 일으키며 부당한 혐오와 차별에 저항했다. 때로는 가짜뉴스 같은 ‘괴담’이, 때로는 직접적인 폭력이 계기가 됐다. 《참세상》이 19세기 천연두와 콜레라 폭동부터, 21세기 코로나19 인종 차별 반대 시위까지, 그 혐오와 차별의 역사를 짚어봤다.

[출처: Wikipedia]

1899년 텍사스주 러레이도 천연두 폭동

1899년 3월 19일, 미국 텍사스주 러레이도에서 주민 폭동이 일어났다. 5~600명의 무장한 주민들은 텍사스주의 천연두 방역 정책에 거세게 항의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한쪽에서는 주 보건담당관과 의료진의 환자 격리 작업을 막아섰다. 대치가 격화되며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날 시위대 한 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튿날에는 마을에 군 경찰이 투입됐다. 이들은 시위 주동자를 찾기 위해 가택 수색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 조사관이 천연두 감염 증상이 있던 주민을 격리병원으로 이송하려 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격리병원에 옮기기 전, 믿을 만한 의사에게 먼저 진단받게 해 달라며 이송을 막아섰다. 언쟁이 격해지면서, 또다시 무장한 주민과 군 경찰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가족 중 한 명이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환자와 그의 친구도 총상을 입었다.

텍사스주는 프랑스, 스페인, 멕시코의 지배를 거쳐 1845년 미국에 편입된 도시다. 텍사스 주의 러레이도는 리오그란데 강을 사이에 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도시다. 그래서 이곳엔 백인과 멕시코 이주민,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았다. 당시 주민들의 삶과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폭동이 단순히 백신과 방역 정책에 대한 반발이 아닌,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저항이었음이 드러난다.

1898년 미국 전역에서 천연두가 집단 발병했다. 러레이도에선 10월부터 천연두 전파가 시작됐다. 이듬해 2월 150명의 천연두 감염자가 발생하면서 시는 의심 환자 수색과 격리, 구금 등의 방역 정책을 실시했다. 그런데도 감염자 수가 폭증하면서, 시는 더욱 강력한 방역 정책을 꺼내 들었다. 러레이도 시장은 조사관을 임명해 주민 신체를 수색하고, 가정 내 위험 요소가 발견될 경우 주택이나 물건을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고, 감염 위험군과 비 위험군을 구분했으며, 부랑자와 행상인의 이동을 단속했다.

당시 미국 전역에선 감염병 확산과 함께 인종 및 계층 간의 혐오가 넘쳐나고 있었다. 폭력적인 방역 조치에 따른 반발도 상당했다. 많은 사람이 백인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미국에서 천연두는 ‘깜둥이 가려움증’, ‘이탈리아 가려움증’, ‘멕시코 혹’이라고 불렸다. 방역 정책은 흑인과 유색인종, 빈민층에게 유독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됐다. 뉴욕에서는 이민자가 많이 사는 지역에 경찰이 투입돼 강제 백신 접종이 이뤄졌다. 흑인 거주 지역에서는 경찰이 흑인 머리에 총을 겨눠 강제 접종시키기도 했다. 상류층과 하층민에게 불평등한 방역 기준이 적용됐고, 빈민가는 수색과 단속의 표적이 됐다.

러레이도의 방역 정책 역시 이민자와 하층민에게 유독 차별적이며 폭력적이었다. 텍사스의 보건 담당자는 러레이도의 주요 천연두 감염원으로 ‘멕시칸 빈곤층’을 지목했다. 이에 따라 빈민과 멕시코 이민자가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 집중적인 수색과 소독, 백신 접종, 가정용품 폐기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주민 대표들은 성명을 발표해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방역 조치를 비판했다. 강제 백신 접종의 위험성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개인의 건강 상태가 백신 접종에 부적합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의사의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전역에 백신 부작용 사례가 다수 보고되며 백신 불안이 커진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백신을 생산하는 민간 기업에 대한 규제가 없어 안전성 문제가 증폭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민의 건의와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폭력적 진압과 통제, 체포가 되풀이되면서 주민 소요 사태 또한 끊이지 않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1892년 타슈켄트 콜레라 폭동

1892년 6월 24일, 리볼버 권총과 단도로 무장한 이란계 사라트인 5천여 명이 앙코르 운하를 건너 러시아 거주지로 몰려갔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 전염병을 러시아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러시아가 그들을 독살하기 위해 앙코르 운하에 독극물을 풀었다는 괴담을 믿었다. 화가 난 군중은 상점을 약탈하고 시민에게 돌을 던졌다. 부지사 푸스틴시노프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그를 돌로 쳐서 죽였다. 러시아인들은 이들의 폭동을 제국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러시아 지역의 참전용사와 성직자, 시민들이 경찰 및 군대에 합류해 반란을 진압했다. 사라트인을 구타하고 시신을 앙코르 운하에 던졌다. 다음날 앙코르 운하에서는 약 80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1865년 러시아 차르 군대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자 중앙아시아 최대 도시인 타슈켄트는 러시아의 점령지가 됐다. 러시아는 이곳을 중앙아시아 문명화를 위한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이와 함께 앙코르 운하를 중심으로 러시아 정착지와 중앙아시아인 거주지의 구역을 설정해 인종 간 분리를 강제했다. 러시아에 중앙아시아는 후진적이고 더러운 무슬림의 땅이었다. 러시아 점령 직후 타슈켄트 승마 경기에서 발생한 사건은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시 승마 경기에서 우승한 중앙아시아 소년에게 러시아가 건넨 상품은 세면대였다. 한 러시아 특파원은 “더러운 얼굴을 한 어린 소년이 받은 이 상은 매우 가치가 있다”라고 보도했다.

콜레라 감염병은 19세기 중앙아시아와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맹위를 떨쳤다. 1982년 6월 7일, 한 차례 기근이 덮쳤던 타슈켄트 지역에도 콜레라가 상륙했다. 러시아 정착민들은 아시아에서 시작한 콜레라 감염병이 동양의 후진성과 원시성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사실 타슈켄트 지역의 첫 감염지는 러시아 거주 구역이었고, 첫 감염자 역시 러시아 정착민이었다. 하지만 시 사령관은 모든 위험성을 타슈켄트의 아시아 구역에 집중시켰다. 그는 감염된 주민을 찾기 위해 이 구역에 수십 명의 의료기사를 파견했다. 특히 의료 교육을 받지 않은 비전문가 사찰단원과 경찰이 강제 수색을 위해 집안에 들이닥치면서 갈등이 고조됐다.

결정적으로 무슬림의 분노에 불을 지핀 건 문화와 관례의 억압이었다. 러시아는 타슈켄트 점령 직후, 지역 엘리트들과 종교와 문화, 일상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콜레라 방역 정책과 감염자 시신 처리 과정에서 협정은 무용지물이 됐다. 타슈켄트 아시아 구역에는 차르의 관리들이 배치됐다. 시는 차르의 관리 감독 없이는 모든 시신의 이동을 금지했다. 대규모 운구 행렬이 따르는 이슬람식 장례도 금지했다. 지인과 친지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장례식도 미뤄졌다. 콜레라 희생자들의 시신은 시 외곽에 마련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슬람식 염습도 공동무덤가의 특정 우물에서만 허락됐다. 위생 당국이 시신을 검사하기까지는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이는 빠른 매장을 해오던 무슬림의 관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름 더위로 희생자의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무슬림의 분노는 폭발 직전으로 치달았다.

감염병의 전파자로 지목돼 또 다른 혐오와 차별에 시달렸던 집단은 또 있었다. 기근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도시 외곽으로 몰려든 러시아 하층민들이었다. 타슈켄트는 러시아 특권층과 하층민, 무슬림 엘리트와 하층민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다층적 차별의 공간이었다. 시 사령관은 감염병의 주된 전파자로 가난한 슬라브인 정착민을 지목했다. 이들이 위생 규정을 따르지 않고 만취한 상태에서 전염병을 전파했다는 주장이었다. 의사들 역시 도시 변두리에 형성된 불법 거주자 정착지가 질병의 번식지라고 주장했다. 타슈켄트시 위원회는 하층민의 수를 제한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로써 러시아 하층민은 무슬림과 함께 더럽고 후진적인 존재들로 낙인찍혔다.

콜레라 폭동은 비난 타슈켄트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동유럽과 러시아 전역에선 크고 작은 폭동이 도시를 휩쓸었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른 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폭동이었지만 분노의 대상은 다르지 않았다. 도시를 집어삼킨 ‘괴담’의 양상도 비슷했다. 영국에서는 1831년 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최소 72건의 콜레라 폭동이 일어났다. 첫 번째 시위는 1831년 12월 26일에 발생했다. 영국 에버딘의 군중은 ‘집을 불태우고, 상점을 무너뜨린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도시의 해부학 대학을 불태웠다. 대학에 해부학 시체를 공급하기 위해 시신을 수출 · 탈취 · 거래한 사건이 폭로되며 분노가 확산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와 프랑스 파리에서도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대부분 사회 엘리트와 부유층이 하층계급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콜레라를 전파했다는 괴담에 분노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동은 빈곤층과 소외된 이들이 국가 기관과 귀족, 엘리트에 도전하는 양상을 띠었다.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gedankenstuecke/49977926696]

2022년 세계적 코로나 시위

코로나19 감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던 2020년 5월 26일 화요일 오후. 미국 미네소타주 동남부에 있는 도시 미니애폴리스에서 수천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교차로에 모여 “숨을 쉴 수가 없어”, “나였을 수도 있어”라는 구호를 외쳤다. 사건 발생의 책임이 있는 경찰관 4명이 해고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군중은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경찰관들이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오후 6시경, 시위대는 경찰관들의 근무지 방향으로 가두 행진을 시작했다. 일부 군중은 유리창을 부수고, 건물을 파괴하고, 순찰차에 페인트를 뿌렸다. 진압 장비로 무장한 경찰을 향해 돌멩이와 물병 등을 던지기도 했다. 경찰 병력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섬광 수류탄을 발사했다. 시위와 진압은 그날 자정까지 이어졌다.

이날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시위는 이후 미국 전역으로 확산했다. 그해 여름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 시위 참가자는 최소 1,500만 명에서 2,600만 명으로 집계됐다. 시위가 확대되면서 6월 말까지 미국 내 최소 200개의 도시에서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일주일 사이에 6만 2천 명의 미 방위군이 배치돼 시위를 진압했다. 같은 시기, 4천 400명 이상의 시민이 체포됐다. 미국 켄터키주 북부 도시 루이빌에서는 한 남성이 경찰과 대치하다 사망하면서 경찰서장이 해고되기도 했다.

계기는 코로나19 봉쇄 조치 속에서 일어난 경찰의 인종 차별과 폭력 살인이었다. 첫 시위가 일어나기 하루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들이 46세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위조 달러를 사용한 혐의로 그를 체포한 후, 수갑을 채워 거리에 엎드리도록 했다. 그리곤 무릎으로 그의 목을 압박했다. 조지 플로이드가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했음에도 압박은 9분 넘게 이어졌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이 시위는 전 세계적인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으로 확대했다. 사건 발생 후 100일 동안 미국에서만 약 8천 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전 세계적으로는 최소 60여 개국의 2천 곳 이상의 도시에서 연대 집회가 열렸다.

전 세계적 시위에도, 코로나19 기간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확대했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발원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 차별도 극심해졌다. 2020년 3월, 미국 텍사스에서 21세 남성이 세 자녀를 둔 버마인 가족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해 식칼로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아버지와 당시 6살이던 자녀를 칼로 찔렀으며, 이를 저지하는 직원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체포된 후 질병을 퍼뜨린 나라에서 온 사람을 살해하려 했다고 말했다. 일 년 뒤에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스파 총격 사건이 벌어져 8명이 사망했다. 이 중 6명은 아시아계 여성이었다. 사망자 중 4명은 중국 교포였고, 1명은 한국 국적이었다. 미국 ‘Stop AAPI Hate’ 포럼에 따르면 2020년 3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9,081건의 아시아인 학대 사례가 접수됐다. 사건 피해자의 63% 이상은 여성이었다. 31%는 공공장소에서, 30%는 기업에서 발생했다.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도 코로나19 확산 책임을 유색인종에게 돌리며 차별을 조장했다.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 전 내무장관 마테오 살비니(Matteo Salvini)는 코로나 확산을 아프리카계 망명 신청자들에 전가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 이민자로부터 코로나19가 발병한 사례는 없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역시 2020년 9월 열린 유엔총회에서 “중국 코로나”라고 부르며 중국을 맹비난했다. 코로나19에 따른 인종 차별은 유색인종의 건강권 역시 취약하게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유색인종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 코로나19 전염 및 사망자 상위 지역으로 꼽혔다. 코로나19 사망률이 가장 높은 미국 상위 10개 중 7곳은 유색 인종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다.

〈참고자료〉
1. 이현주, 〈유행병과 폭동: 1899 텍사스 러레이도에서의 인종,
계급, 그리고 질병통제〉, 《동서인문》 제14호, 2020. 10
2. 율라 비스, 《면역에 관하여》, 열린책들, 2022. 6. 1
3. Jeff Sahadeo, 〈Epidemic and Empire: Ethnicity, Class, and “Civilization” in the 1892 Tashkent Cholera Riot〉, 2013, 3
4. University of Glasgow, 〈Cholera revolts: a class struggle we may not like Samuel Kline Cohn, Jr〉, 2017. 1
5. 〈'It's Real Ugly': Protesters Clash With Minneapolis Police After George Floyd's Death〉, CBS NEWS, 2020. 5. 26
6. Isaac Yeboah Addo, 〈Double pandemic: racial discrimination amid coronavirus disease 2019〉, Social Sciences & Humanities Open, 2020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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