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성, 노동의 기록]

성평등 관점에서 성희롱·성폭력·성매매·가정폭력 등의 예방 교육을 수행하는 폭력예방통합교육 전문강사로 활동한 지 14년 차. 14년 동안 교육의 내용도 많이 바뀌었는데 요즘엔 조직과 사회의 역할과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아닌 제3자, 주변인의 역할에 대한 내용을 강의하곤 한다. 같은 상황에서 모두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으니 분명 가해자 개인의 문제도 존재하지만 그런 가해자를 존재할 수 있게 한 조직, 사회의 문제가 더 크고, 피해자가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도 역시 조직의 몫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충남도지사였던 안희정은 자신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 씨를 성폭행한 사건으로 징역 3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리고 얼마 전인 8월 4일, 안희정이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피해자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로. 그 긴 시간, 피해자에게는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안희정의 복역 기간 수많은 논란 속에서도 부모상이라는 이유로 공개적이고 당당하게 그의 곁에 섰던 이들은 여전히 감옥에서 나온 그의 곁에 서 있었다. 2018년 미투운동이 전 사회를 뒤흔들었던 그때 우리는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구호를 들었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 구호는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타내는 반증이다. 그리고 안희정의 곁에 선 정치인들의 모습이 여전히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1년이면 ‘사건화’가 되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거나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사건이 평균 5개. 상담과 조력 등을 통해 ‘사건화’ 전에 정리되는 것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상담과 조사를 통해 만나게 되는 수많은 피해자와 그들의 조력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일상으로의 복귀다. 그것이 가능할지,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사건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 그것이 어떤 폭력이든 조직 안에서 자신의 피해를 밝히는 데엔 상상할 수 없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직 조직 안에서 살아남아 회복한 피해자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피해를 밝히기까지 피해자는 수백 번을 참았을 것이고, 수백 번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싸워줄 사람을 스스로 찾아야 했을 것이고, 그 과정 역시 외롭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직은 피해자를 살려야 한다.

내게 상담해오는 이들에게 나는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당신 탓이 아니라고 가장 먼저 이야기한다. 모든 피해자가 그 말에 오랜 시간, 말 그대로 통곡한다. 나의 탓이 아니라는, 미안하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는 이유다. 어떤 누군가가 내게 폭력 피해를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나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감사함과 책임감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확률보다는 주변인이 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그러니 주변인으로, 조직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만난 피해자 중 일상으로의 복귀를 이뤄낸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길었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도 하다. 사건의 조사와 결과, 징계 절차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 이후 우리 조직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이다. 그 노력에 따라 피해자의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능하다.

한 조직은 조직의 대표가 직접 사과문을 쓰고 그것을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했다. 그 사과문 안에는 이후 교육을 시작으로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실천할 수 있는 여러 계획이 적혀 있었다. 또 한 조직은 토론을 통해 일상에서 폭력과 차별을 없애기 위한 자신들의 규칙을 만들어 냈다. 다른 조직은 현장과 가장 가까이 있는 간부들에 대한 교육을 정기적이고 강제적으로 진행하고 점검하고 있다.

또 다른 조직은 조력자들이 떠났던 피해자를 다시 현장으로 복귀시키고 여전히 단단히 피해자의 곁을 지켜내며 조직의 변화를 끌어내고 있다. 성폭력 사건 이후 우리 조직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사람이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를 보면 우리 조직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 조직은 피해자가 살 수 있는 조직인가, 가해자가 살 수 있는 조직인가. 작지만 유효한 변화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조직에서 가해자는 돌아오고 있지만 피해자는 돌아오지 못한다.

피해자들은 이야기한다. 사건이 있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그렇기 때문에 피해를 딛고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조직과 사회의 준비와 변화가 필요하다고. 피해자와 함께 하기 위해 조직과 사회, 그리고 그들의 조력자들이 함께 어떤 준비와 변화를 만들어 갈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다.

가해자가 감옥에 있는 4년 동안 피해자인 여성 노동자 김지은 씨는 일상을 찾았을까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그녀의 일상을 위해 함께 싸우고 연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김지은, 그녀의 하루하루가 무료할 만큼 평범했으면 좋겠다. 모든 여성 노동자의 하루하루가 변함없이 안전하고 평범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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