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이 외면하는 진실들

[녹색 스트라이크]


탄소중립 사회’라는 비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2021년 9월에 ‘탄소중립’이라는 단어를 단 법령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탄소중립이라는 말은 대중에게 낯선 단어였다. 이쯤부터 TV, 라디오, 유튜브에 ‘탄소중립을 실현하자’라는 광고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시내버스 음성 광고에도 심심치 않게 들리기 시작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이 올해 3월 시행된 이후부터는 ‘탄소중립’이라는 이름을 단 캠페인, 프로그램, 학교 동아리 등이 말 그대로 쏟아지고 있다. 대중은 처음에는 낯설던 탄소중립의 공식(온실가스 배출량에서 온실가스 흡수량을 빼면 온실가스 순 배출량이 ‘0’이 된다)을 배우게 됐고, 매체 광고, 학교 교육, 동아리 수업 등의 전방위적인 ‘학습’을 거친 결과 ‘탄소중립’이라는 것이 실천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됐다.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위해 에너지를 절약하고, 업사이클링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시민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탄소중립은 사회적으로 합의한 바 없는 용어이며,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학습시킨 용어다.

탄소중립이란 말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시점은 2018년 10월, 인천 송도에서 열린 기후변화 정부 간 협의체(IPCC) 제48차에서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특별보고서)’를 의결했다는 소식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이것은 산업화 이전 시기 대비 지구 평균 기온이 2℃ 오를 경우와 1.5℃ 오를 경우를 비교하며 인간 사회와 생태계가 경험할 위험의 차이를 예측한 보고서였다. 과학자들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의 평균 기온이 2℃ 오르면 이상 기후, 산호 소멸, 기후 취약 인구, 물 부족 인구, 육상 생태계 파괴, 해수면 상승 등에서 심각한 차이를 보였다. 과학자들은 이 보고서를 통해 2100년까지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50년까지는 ‘Net Zero’(넷 제로, 전 지구 이산화탄소 배출량 0)가 돼야 한다며 ‘새로운 목표치’를 정책입안자들에게 제안했다.

특별보고서는 기후대기 과학자들의 집단적인 연구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 과학적 탐구가 도출한 결과물은 과학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인 ‘숫자’로 표현됐다. 관건은 과학 분야에서 던져진 ‘하나의 진실’을 우리 사회가 어떤 정치·경제·사회적인 메시지로 해석해 낼 지였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넷 제로’를 이산화탄소의 인위적 배출량이 인위적인 흡수량과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설명(1)했지만, 이것이 다른 사회 영역의 ‘균형’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주의적인 생활양식을 유지해왔던 북반구 과(過)개발 국가와, 과개발 국가의 높은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착취와 채굴의 대상이 되어온 저개발 국가 사이의 모순은 설명하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균형’이라는 말 자체는 정치의 언어가 아닌 수학의 언어, 미술의 언어다. 따라서 ‘균형’은 ‘평등’이라는 정치적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넷 제로라는 용어는 잠깐 유행하듯 사용됐고, 국내에서는 ‘탄소중립(carbon neural)’이라는 번역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2020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2050년 탄소중립 선언을 기점으로 정부 기관과 기업, 그리고 시민단체가 ‘탄소중립’이라는 단어를 재생산하면서 현재는 탄소중립이 넷 제로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탄소’와 ‘중립’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중립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처신함. (예: 중립 노선) 2) 국가 사이의 분쟁이나 전쟁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중간 입장을 지킴. (예: 중립 국가) 이런 사전적 정의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화학 원자 기호인 ‘탄소’와 ‘중립’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듣는 이에게 혼란을 일으킨다.

우리 사회는 탄소중립이 불러일으킨 혼란에 제대로 직면하거나 토론하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거버넌스 기구들은 무비판적으로 탄소중립이라는 말을 복제함으로써 공상적인 세계 이미지를 계속해서 현상(現像)하고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이상한 번역어는 정부의 공식 정책이 됐고, 이를 받아쓰는 시민단체, 거버넌스 기구들은 각종 탄소중립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시민에게 알리고 있다. 특히 탄소 배출을 가장 많이 해오던 에너지, 철강, 자동차, 테크 부문의 기업들은 가장 앞장서서 탄소중립 용어를 기업전략으로 가져왔다. 2021년 10월 애플은 “2030년까지 탄소 중립화”하겠다는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는 포스코는 2020년 12월 ‘기후행동보고서’를 발표하며 2050 탄소중립 목표를 세웠다.

2018년 특별보고서를 힘들여 발간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하나의 진실’이 ‘보편적 진실’로 확장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탄소중립은 민중의 삶을 설명하지 못한다.

탄소중립이라는 새로운 목표는 ‘지구와 다른 생명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의도로 쉽게 정당성을 얻고 통용된다. 따라서 탄소중립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퍼지고 있다. JTBC에서 방영한 〈차이나는 클래스〉 239회에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홍종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7.2%에 불과한 재생에너지 비율을 70%까지 확대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을 20배를 늘려야 한다. 우리나라 면적의 3.5~4%가 필요하다. 서울 면적의 5.5~6배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농지 면적이 전체 국토 면적의 약 18%가 된다. 18%에서 농사를 짓지만 대부분 농산물은 수입한다. 남는 4%의 땅을 써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고, 에너지 수입을 줄인다면 우리에게 이득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효율이 올라서 면적은 더 줄어들 수도 있다.”

몇 가지 곱셈과 덧셈, 뺄셈으로 진행되는 그의 논리에서 비수도권 지역의 농지는 ‘남는 땅’으로 쉽게 치환된다. 농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농민을 비롯한 농촌 사람들의 삶은 그의 계산식에 등장하지 않는다. 태양광 발전 시설로 황폐해질 땅과 생명체는 그에게 빈 A4용지와 같이 표백된다. 탄소중립, 온실가스 배출 감축 목표가 가장 높은 목적, 그 자체가 된 사회는 새롭지만 익숙한 전쟁을 선언하고 있다. 이미 지난 수년간 전남 지역에서는 태양광발전소와 해양 풍력발전소가 지어지는 과정에서 아름답던 산천이 파괴되고 농민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2021년 2월 ‘농어촌파괴형 풍력·태양광 반대 전남연대회의’가 출범했다.


탄소중립이라는 목표에 우리의 시야를 가둔다면, 우리는 ‘기체’의 운명만 다루는 지극히 협소한 관점에 그대로 갇히게 된다. 탄소배출과 흡수라는 이산화탄소의 마지막 여정은 앞으로 돌출되지만, 그 수치적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일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편리한 해법’으로서 주목 받는 재생에너지, 전기차 배터리와 같은 ‘녹색기술’이 대표적이다. 정부나 기업,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고 있는 환경 거버넌스의 구호를 보노라면, ‘탄소중립을 이룰 수 있는 녹색기술’은 기후위기에 처한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과연 그럴까?

권승문 연구기획위원(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은 〈프레시안〉(2)에 쓴 기고문에서 기욤 피트롱의 《프로메테우스의 금속 – 희귀 금속은 어떻게 세계를 재편하는가》(갈라파고스, 2021)에서의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전환의 가장 첫 단계는 땅에서 지하자원을 캐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결국, 우리는 석유에 대한 의존을 희귀 금속에 대한 의존으로 대체해야 하는 셈이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또 다른 채굴 산업과 환경 파괴, 그리고 인권 침해의 실상을 언급했다. 그가 인용한 기욤 피트롱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지금과 같은 생산 속도라면 일반 금속과 희귀 금속 15개 정도는 50년 이내에 고갈될 것이고, 철을 포함해 매장량이 매우 풍부하다고 알려진 금속 5종 또한 이 세기가 막을 내리기 전에 바닥을 보일 것이다. 또한 중단기적 관점에서 볼 때 바나듐, 디스프로슘, 테르븀, 유로퓸, 네오디뮴, 티타늄, 인듐 역시 결핍 위기에 놓여 있다.” 칠레 북부지역에서 리튬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물이 고갈되고 오염되고 있다. 배터리에 사용되는 코발트 원석을 채굴하기 위해 콩고민주공화국의 아동의 노동이 착취당하고 있다.

‘탄소중립’은 기업과 정부가 광고하는 것처럼 지구의 뭇 생명체와 민중의 삶을 지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탄소중립은 민중이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물리적인 토대를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으며, 민중의 안전 따윈 안중에도 없는 기업들의 새로운 이윤 창출의 수단이자 전략으로 사용된다. 한편 초록빛의 아름다운 탄소중립 사회 광고 이미지를 지속해서 만들어내면서 민중을 이 새로운 산업의 수혜자로, 소비자로서 포섭하고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행해지는 식민주의적 파괴, 착취 행위는 모두 은폐된다.

올해 여름, 국지성 폭우로 목숨을 잃은 반지하 거주민과 노동자, 노인, 장애인의 상황에 대해 탄소중립은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오히려 탄소중립은 기후위기라는 재난을 이용해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됐다. 마침내 탄소중립은 산업의 비전이자, 우리 사회가 함께 지향해야 할 청사진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를 자꾸 생산하고 나르는 데에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과 거버넌스 조직들이 한 몫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탄소중립은 폭력의 완벽한 은폐(3)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 축적의 역사와 일맥상통한다. 자본가들은 자연과 노동자의 노동력을 전유하면서 남긴 이윤의 대부분을 가져가면서 자본을 불려왔다. 자본가는 많은 이윤을 남기며 재산을 증식했지만, 노동자에게는 제대로 된 몫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두고 ‘착취’라고 말한다. 자연은 무상으로 자본가의 돈줄이 됐기에 자연에 대한 착취라고 얘기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출산노동과 돌봄노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상으로 전유 당했다. 여성의 출산 없이 사회는 존재할 수 없고, 돌봄노동 없이는 임금노동자가 공장에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출산노동과 돌봄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부했고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는 여성의 노동 없이는 단 하루도 굴러가지 못함에도, 여성의 노동을 공식적인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가정주부’로 만들었다.

서구 국가들의 과개발은 인도,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의 저개발과 연결돼 있다. 여성, 노동자, 농민, 농촌 등의 ‘내부 식민지’를 만들어 온 자본주의는 이들 국가를 ‘외부 식민지’로 삼았다. 초국적 기업들은 ‘자급 경제’를 영위해오던 이들 국가와 지역의 자립성을 빼앗고, 생산 공정 중 하나의 라인을 감당하도록 했다. 그들은 자신이 애써 만들어낸 상품을 구매할 돈이 없다. 그 상품은 북반구 부유한 국가의 가정주부의 장바구니로 들어간다. 일해도 가난해지고, 부채에 시달린다. 저개발 국가의 여성 노동자는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모른다. 과개발 국가의 가정주부는 자신이 구매한 상품에 대해 모른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문명화’라는 이미지로 포장돼 지속돼 왔다. 도시화와 산업화는 더 나은 삶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유 임금노동자’였고 노예제도는 철폐된 것처럼 보였다. 기업은 노동자를 가족으로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마치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여성에 대한 차별은 옛말이며, 여성 폭력은 유난히 폭력적인 성정을 가진 범죄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반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저개발 국가는 ‘미개’한 곳이며,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적인 곳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평화가 여성에게는 전쟁’이듯이 자본주의의 평화는 착취 구조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쟁이었다. 문명화됐다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평화는 자연과 여성, 저개발 국가에 대한 폭력을 근거로 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문명화됐다고 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 날아온 최후의 폭탄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무급 노동과 착취, 여성 살해에 저항하는 단결된 여성 운동의 힘을 막아왔고, 노동 착취와 산재 사망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투쟁에도 자본주의 체제는 끄떡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재난을 동반한 총체적인 위협으로서 기후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이때 자본주의 체제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탄소중립’이다.

탄소중립은 지배계층(그들)이 지금의 폭력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어낸 거대한 거짓말이자, 그들만의 아름다운 목표다. 탄소중립 사회에는 민중을 위한 사회는 없다. 저개발 국가들은 탄소중립은커녕 민중의 생존을 담보할만한 물적 토대조차 없다. 스리랑카는 지난 5월 국가부도를 선언했고 에콰도르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튀니지, 파키스탄, 페루에서도 물가 폭등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하고 있다. ‘선진’적으로 탄소중립을 향해 앞서가는 국가들은 이들 나라의 ‘후퇴’를 기반으로 그 목적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탄소중립 목표에는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는 전쟁과 군대 운영 부문은 ‘안보’를 이유로 포함돼 있지 않다. 당신은 아직도 ‘탄소중립 사회’라는 비전에 동의하는가? 대한민국 정부가 내놓은 (숫자로 가득한) ‘탄소중립 시나리오’에는 우리의 삶이 없다! 우리에겐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착취당해온 자들의 언어로 쓰인 새로운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그는 여성일 것이며, 이주노동자일 것이며, 농민일 것이다. 갇혀있는 자들의 눈이 상상하는 새로운 세계가 우리의 비전이 돼야 한다. 그는 외국인 수용소에 갇힌 난민일 것이며, 축산 공장에 갇힌 돼지, 소, 닭일 것이다. 그들의 전쟁이 우리의 현실이다.

(1) “Net zero CO2 emissions: Net-zero carbon dioxide (CO2) emissions are achieved when anthropogenic CO2 emissions are balanced globally by anthropogenic CO2 removals over a specified period.” (IPCC, GLOBAL WARMING OF 1.5 ℃, 2018)
(2) 프레시안, 〈재생에너지 전환의 불편한 진실…"에너지 전환에 필요한 금속은 환경오염"〉(2022.6.27.)
(3) 독일 페미니즘 경제학자 마리아 미즈(Maria Mies)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1998)에서 노동의 성별분업화와 국제분업화 과정을 설명하며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의 식민주의를 주장한다. 이를 주로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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