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탈당한 이들의 민주주의

[녹색 스트라이크]

비상선언 그 이후

2019년 9월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은 정부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기후위기 비상 선언을 요구했다. 한 달 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겠다고 선언했고, 이듬해 6월 전국 226개 지방자치단체가 기후위기 비상선언을 발표했다. 문제는 ‘선언’만 했다는 점이었다. 전국 광역시도 중에 가장 먼저 기후위기 비상상황을 선포했던 인천 지역 활동가의 허탈한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끝내 비상경보는 ‘물리적인 신호’로서 울리지 않았고, 단지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관련 보도자료만이 휩쓸려 지나갔다. 도시에서의 생활과 일터에서의 노동은 의식하든 안 하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전과 같이 유지됐다.

그렇다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와 지자체의 비상선언은 규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2015년 유엔 파리기후협약에 근거한 신(新)기후체제에 호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앞선 칼럼(1)에서 살펴봤듯이 파리기후체제는 빠른 속도로 탄소중립체제로서 전파됐다. ‘탄소중립’이라는 철저하게 반생태적인 이데올로기가 전방위적으로 확산한 이면에는 새로운 에너지 발전, 전기·수소차, 정보통신산업과 같은 새로운 시장에 야심 차게 뛰어든 자본가들이 있었고, 그 이전에 이를 전적으로 지원해주고 그들의 자유로운 약탈을 허용해준 정부와 의회가 있었다.

정부의 기후위기에 대한 비상 선언과 대응을 관찰하다 보면 민중의 삶과는 동떨어진, 특정 집단의 이익에 부합하는 기본계획과 정책, 제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한국판 뉴딜(그린 뉴딜을 포함한)은 경기부양책으로서 신산업을 육성하는 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돈을 풀었다. (2022년 기준 한국판 뉴딜 예산은 50조 원. 올해 정부 전체 예산이 421조 원이다.)


생태파괴 시나리오는 어떻게 쓰였나

비슷한 시기 우리는 2050탄소중립위원회(현재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이하 ‘탄중위’)가 재계의 영향력 아래서 정책기술자(관료)들의 손을 거쳐 탄소중립 사회의 비전과 시나리오를 만드는 과정을 똑똑히 목격했다. ‘탄소중립 시나리오’ 작성은 더 극심한 생태적, 사회적 위기가 오기 전에 우리 사회의 진로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탄소중립을 목표로 둔 시나리오는 사회 전반에서 심화하고 있는 불평등과 체계적인 생명파괴 행태 혹은 관행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오로지 탄소배출량과 흡수량에 모든 초점을 맞춰 작성된 허무맹랑한 기획이었기에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 (또는 민중)이 시나리오에 대해서 토론하고 의견을 낼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다는 점이다. 시나리오는 앞서 언급한 정책기술자들에 의해 ‘비밀’리에 만들어졌다. 초안 작성 작업은 ‘관료제’라는 두꺼운 성곽 안에서 민중의 개입을 배격한 채 엘리트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파괴적이고 불합리한, 독점적인 정치경제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나마 이 과정에 개입할 수 있었던 이들은 지배 엘리트들의 입맛에 따라 선발된 ‘민간위원’들이었다. 정부는 이들을 회의장에 불러 토론시켰다. 민간위원의 압도적 다수가 교수, 연구원과 같은 중산층을 대변하는 전문 인력들이었고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자동차와 같은 전통적인 화석연료 기반 산업의 대표자들이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저들의 구미에 맞게 ‘거의 완성된’ 시나리오 초안(정부안)은 근본적인 수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청소년기후행동 오연재 활동가는 민간위원직을 사퇴했다.(2)

“당사자들은 여전히 배제된 채로 정부와 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작동되는 거버넌스는 여전했습니다. 탄소중립위원회가 치열하게 논의를 해나간다고 발표한 것과 달리, 위원회 논의의 결과로 나온 탄소중립시나리오는 정말 처참했습니다. (중략) 탄소중립시나리오는 지금까지의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탄소배출을 하도록 만든 사회 시스템’은 어떻게든 그대로 두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수단'이 무엇이든 일단 ‘탄소’만 줄이면 된다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에너지 수요'를 줄이지도, 지금의 사회 시스템을 바꾸지도 않고, 오직 불확실한 기술을 통해 ‘온실가스 감축’을 문서상에서만 하는 것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탄소중립 시나리오의 1, 2안은 탄소중립 달성 실패를 담고 있으며, 석탄발전을 포함한 온실가스 다배출 산업을 그대로 유지하는 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 과정을 ‘숙의 민주주의’라고 칭했다.

민중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탄중위 구성과 운영방식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민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감각’, ‘민중에 의한 통치’, ‘독점적인 권력관계의 철폐’ 등으로 민주주의를 설명한다면 과연 이 세계에 단 한 순간이라도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이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민주주의는 단지 우리가 근대적인(보통·평등·비밀·직접·자유 원칙에 입각한) 선거제도를 가졌다고 해서, 독재 정권을 철폐했다고 해서 온전히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

한번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의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토지, 금융, 노동, 교육, 문화에서 민중의 지위는 어떠한가? 여기서 ‘민중’이라는 단어가 자칫 독자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민중의 속성(“가난하고 다수이기도 한 자유인”(3))을 예리하게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참고해 보다 다양한 질문들을 던져보자. ‘대한민국 사회 전반을 통치하고 있는 자리에는 누가 있는가? 그는 가난한가? 길거리나 버스, 지하철, 시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인가?’, ‘가난한 이들이 공익을 위한 법을 만들 수 있는가? 행정에 참여할 기회가 있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가?’, ‘가난한 이들은 국내 통화 정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소수의 집단이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는가?’

현재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대의정치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 정부들)에서 살아가는 민중은 자신의 토지를 수탈당하고, 원치 않는 노동을 하면서도 정당한 이윤을 배당받지 못하고, 복잡하게 설계된 금융통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빚더미에 오른 낙오자 신세에 처해있다. 민중이 스스로 법률을 만들고, 재판에 배심원으로서 참여하고, 공적인 행정 업무를 맡을 수 있는 제도와 기회는 전무한 실정이다. 국민청원제도가 있어 법안을 발의할 수 있지만 여의도에 있는 국회에만 들어가면 대표자(국회의원)들과 그 배후에 있는 정당, 기득권들의 이해관계 셈법에 의해 법안은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전태일 3법(5인 미만 사업장 종사자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기준법 개정안·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는 노조법 개정안·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모두 10만 명의 시민의 동의를 거쳐 국회로 들어갔으나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외하고는 2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이다.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석탄화력발전소 신규 건설을 취소하기 위한 ‘탈석탄법’이 924기후정의행진 이후에 5만 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에 회부됐지만 이 법안 또한 대표자들의 발밑에 깔려있을 공산이 크다.

대의정치에 파산을 선고하자

영국의 도예가이자 작가인 이보 모슬리는 오늘날 극심한 생태적·사회적 위기 속에서도 정치가 제대로(민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주목했다. 그는 『민중의 이름으로-가짜 민주주의 세계를 망쳐놓다』에서 대의정치체제(대표자에 의한 통치)가 곧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단이라는 ‘잘못된’ 통념이 어떻게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됐는지, 대의정치체제가 중산층에 의한 통치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고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는지 역사적인 연설과 논쟁을 근거로 논증한다.

“우리는 대의제 정부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 최악의 무분별한 소비주의 충동이나 미디어, 사회공학에 의해 조종되면서, 경제성장과 진보의 이름으로 문화, 인격, 공동체, 자연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거대한 골이 생겨나고 있다. 한편 이 와중에 우리(민중)는 바로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있고,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신화이다.”(4)

한국 정치체제 역시 모슬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선거와 정당제도로 대표되는 ‘대의제’라는 정치 기술을 이용해 ‘과두정’과 거대한 ‘관료제’로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정치체제에 대해 민중은 동의하고 있을까? 우리는 당적을 가진 후보자들이 선거철만 되면 얼굴색을 바꾸고 환심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막상 당선되면 자신이 속한 당 지도부의 충성 요구와 다른 여러 이해관계의 홍수 속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숱하게 봐왔다. 선거철에만 민중을 주권자로서 대접하는 세태는 정치에 대한 환멸과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정당은 파벌을 만들어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관료제는 자신이 위임받은 정치적 책임과 권한을 회피하고 법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사이 정말 중요한 과제들에 대한 숙고와 행동은 계속해서 연기된다. 현재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대안 사회로의 전환은 끝끝내 미뤄질 것이다. 하루빨리 지금의 정치체제에 파산을 선고하자. 당신들 채무불이행이야!


우리가 길이고 우리가 대안이다

대다수 사람은 다른 이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삶을 원하지 않음에도 지금과 같이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 민중은 자신의 권한을 소수의 대표자에게 넘기고 그들의 통치에 의존해왔다. 지금의 대의제가 곧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징표라는 속임수에 더 이상 놀아나지 말자. 그들은 민중을 수시로 배반하며 체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이뤄낼 비전을 갖고 있지 않다. 저들이 하는 일을 보라. 저들은 소수의 지배 엘리트, 인기 있는 정치인의 신변과 안위, 정당의 이익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는 반면, 민중의 삶과 몸이 파괴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언론은 두 거대 양당의 권력 침탈 전쟁을 일일 드라마처럼 방영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기반과 정치적 역량을 박탈당해 온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토지를 몰수당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땅과 함께 공동체를 잃어버렸다. 서로를 연결해주던 노동과 의식을 빼앗겼다. 924기후정의행진에서 우리는 외쳤다. “우리가 길이고 우리가 대안이다.” 정치체제의 전환을 이뤄내는 주체는 길 위에 짓밟혀 있는 민중일 것이다. 대안적인 정치체제는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와 수단이 훨씬 더 많은 체제여야 한다. 특히 교수, 법조인, 기업인 같은 정치 엘리트가 있는 자리에 가난하고 자유로운 평범한 사람들이 차별 없이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문가 그룹은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역할이 그쳐야 하고, 부자들의 권력은 효과적으로 통제당해야 한다. 권위주의에 찌든 어떤 이는 민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거라고 우려할 것이다. 그런 생각은 그동안 민중의 자율성을 박탈해온 지배계층이 만들어낸 논리다. 우리가 길이다. 우리가 대안이다. 비틀거리더라도 우리의 걸음으로 비틀대고, 넘어지더라도 우리의 잘못으로 넘어져야 한다.

서로 다른 우리에게 공통의 언어가 있다면 ‘고통’과 ‘슬픔’일 것이다. 여기 ‘우리’에는 지구상의 모든 데모스, 거주지에서 내쫓겨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할 권리를 박탈당한 모든 이들이 속한다. 산불이 지나간 잿더미에 홀로 남아 코알라, 광산 개발로 서식지와 가족을 잃은 오랑우탄은 지구의 민중이다. 우리는 하염없이 아프고 슬프지만, 우린 고통을 통해 다른 존재와 연결될 수 있다. 슬픔이 데려다주는 낯선 세계를 향해, 여기 낡은 세계를 부수고 달려갈 수 있다.

(1) 박윤준, “‘탄소중립’이 외면하는 진실들”, 《워커스》, 2022.9.
(2) 청소년기후행동 홈페이지 <탄소중립위원회 사퇴 선언문>을 보라. https://youth4climateaction.org/y4ca_de
(3) “가난하고 다수이기도 한 자유인들이 통치할 때, 그런 정부의 형태가 민주주의다.”《정치학》 4권. 이보 모슬리, 『민중의 이름으로-가짜 민주주의 세계를 망쳐놨다』, 녹색평론사, 2022, 73쪽 재인용.
(4) 앞의 책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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