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워커스 사전]


에너지 문제는 기후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다. 탄소 배출 주범인 화석연료 에너지가 기후위기의 핵심 원인이기 때문이고, 자본주의적 생활양식 변화에 따른 에너지 소비 증대가 에너지의 부족, 고갈, 불평등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며, 재생에너지 등 대안 에너지에서도 과거와 같은 채굴주의와 식민주의적 방식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 에너지는 녹색성장의 전략 산업으로 부상하고, 에너지 투자 개발 분야는 부동산 투자 개발과 함께 자본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지금 에너지 전환은 독점과 사유화로 갈 것이냐, 공공 관리와 통제 하에 둘 수 있을 것이냐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격전장이다. 그러나 대체로 재계, 정치권, 제도권 전문가 집단에서 논의되는 에너지 문제는 에너지원의 전환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관점은 대체 신소재 개발처럼 에너지원 또한 개발 관점에서 바라보며, 에너지 체제의 전환을 ‘연료 체제의 전환’으로 축소하고, ‘탈탄소 사회’를 ‘전기 사회’로 상상한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에너지 전환은 지배 권력과 사회 체제의 변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지구 공학과 사회 공학의 논리로 흡수된다.

근대 문명을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않는 과학주의와 합리주의는 문명사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점에도 여전히 지배적이다. 탈근대적 조류 속에서 사회 문제는 솔루션 디자인과 프로그래밍이란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로 변형됐고, 시민사회와 환경운동 내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에너지는 과학과 경제의 결합으로 표상되는 대표적인 전문적 분야다. 전문가 발언권이 강하고 시민들의 참여가 제한돼 기술관료지배(technocracy)의 위험성이 항시 노정돼 있다. 시민사회의 에너지 관련 단체들도 기후위기가 공동의 과제라는 인식하에 자본의 대체에너지 투자 및 개발에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기후정의운동은 당면한 에너지 문제를 재생에너지의 확대와 전환이란 틀에서 사고하는 것을 비판·경계하며, 에너지 주권과 불평등 등 정치사회적 문제임을 강조하고, ‘생태적·민주적·공공적’ 전환을 에너지 전환의 원칙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기후정의운동 안에서도 노동과 에너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발전소 노동자의 실직 대책이나 일자리 문제 중심의 논의에 머물러 있고, 지역과 에너지의 관계 또한 새로운 개발 지역과 철수 지역의 주민들에게 닥친 위기와 주민들의 고통과 피해 대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더 강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에너지를 중심으로 노동과 생태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소비와 탄소배출이 기계화, 자동화 및 금융화와 밀접히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주목되지 않고 있으며, 세기적 과제라 할 수 있는 에너지 전환은 최첨단 기술과 결부되지만 여전히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낙후된 광산업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주목되지 않고 있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관점에서 에너지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종종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길항 관계로 표출되는 노동운동과 생태운동, 지역 경제와 지구적 생태주의 간의 잘못된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에너지를 과학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 가야 한다.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첨단 산업을 포함해 모든 산업이 캐내고 뽑아서 쓰고 버리는 광업의 원형과 유사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농업조차 ‘생명 산업’ 또는 ‘바이오산업’으로 분류되면서 생명 자체를 채굴하는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한다. 자본은 20년을 살 닭을 2개월 만에 속성으로 키워내는 기술이나 노지에서 3개월이 걸리는 작물을 시설에선 3주 만에 출하하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다. ‘규모의 경제’에는 속도와 강도가 반드시 수반된다. 이 과정에는 전기, 사료, 운송 등에 드는 에너지도 고투입 되지만, 그 대상인 생명체도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한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찌운(살찌워진) 몸은 짧은 생존 주기를 마치고 빠른 속도로 쓰레기가 된다.

순환경제와 돌봄경제의 표상이던 농업이 광업적 생산양식으로 전환되는 양상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이윤 확대와 시장 팽창을 위한 농업 분야의 기계화, 자동화, 전기화는 생명을 에너지 소비자로, 에너지를 생명 착취의 수단으로 만든다. 대규모 기술 농업은 전근대적 농업 생산 관계에서 가해졌던 농민의 가혹한 육체노동의 노고를 덜어주는 수단이 되기보다는, 수많은 소농을 노동의 자율성을 박탈한 채 자동화된 기계의 지시에 따르는 농업노동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일은 농업만이 아니라 교육에서도 나타난다. 사람의 역량과 능력도 자원을 채굴하는 방식으로 추출된다. 닭에게 빨리 살찌우라는 명령이 인간에겐 능력을 키우라는 명령이다. 채소를 더 빨리 키워 재료로 조달하라는 시장의 명령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재료)를 빨리 육성시켜 조달하라는 교육에 대한 명령과 그대로 연결된다. 능력주의는 추출경제를 위한 인력 생산을, 교육과정을 통해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노동착취의 형태도 점점 더 채굴주의적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다. 생산 현장에서의 직접적인 노동 통제와 노동 강도를 통한 추출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로부터 뽑아내는 시간과 에너지의 추출도 엄청나다. 이를테면 자동화는 사회적으로 거대한 그림자 노동을 만들어낸다. 정부의 공공서비스나 기업이 이윤을 위해 영리적 목적으로 제공했던 서비스–예를 들어 세무 서류 작업이나 은행 창구 업무 및 각종 영업 상담 업무–까지 모두 개인들에게 전가되고, 이 과정에서 개인들의 정보 처리 활동은 데이터로 변환, 상품화돼 돈으로 바뀐다. 정보통신산업 분야의 에너지 소비와 탄소배출량 측정은 이런 식으로 전가된 막대한 그림자 노동에 수반되는 에너지 비용을 계산하지 않는다. 덕분에 IT기업들은 사무실과 영업장, 데이터센터 같은 직접 관리 영역만 재생에너지로 조달해도 아주 쉽게 ‘RE100’을 달성할 수 있다. 실제로 RE100 그룹에 가입된 기업들을 살펴보면 금융, IT기업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비결은 간단한데 이들 업계가 발전산업이나 제조업처럼 탄소를 직접 뿜어내는 공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산업은 살아있는 생명 존재들의 몸과 삶 자체를 광산으로 삼고 공장으로 삼는다.

에너지에는 죽은 에너지와 산 에너지 두 가지가 있다. 우리는 주로 전자인 화석에너지에만 주목하고 후자인 생명에너지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산업혁명과 이후 산업자본주의 발달이 화석연료와 결합해 있다면, ‘4차산업혁명’ 시대 창조경제, 혁신경제는 생명에너지의 추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후위기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인류가 산업혁명 이후 지금껏 가장 많이 연료로 사용해온 화석에너지다. 이것은 지구에 살았던 존재의 죽은 몸으로부터 뽑아낸 것이다. 생명에너지는 현재 활동 중인 살아있는 생명체로부터 추출하는 에너지다. 전자가 과거의 자원을 고갈시킨다면 후자는 미래의 자원을 고갈시킨다. 자본의 생명에너지 수탈은 새로운 에너지 위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에너지의 생산자다. 우리의 노동은 생명의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활동이다. 퇴근길의 노동자들은 종종 ‘에너지가 바닥났다’고 말하곤 한다. 이 말은 단지 인간 몸을 기계에 대입하는 비유만은 아니다. 에너지란 말의 어원인 고대 희랍어 ‘에네르게이아(energeia)’는 엔(en: in)과 에르곤(ergon: work)의 합성어로, ‘일(work) 속에 있음’을 의미하며, 활동, 활성, 생성 중의 존재 상태를 이른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자기의 대사, 생명활동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다른 살아있는 생명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 한 생명은 다른 생명의 에너지원이 된다. 과거의 농업 기반의 경제에서는 에너지의 순환이 경제의 순환과 함께 이뤄졌다. 그러나 지금 모든 산업에서 나타나는 쓰고 버리는 추출경제, 채굴장이 바닥나면 다른 채굴장을 찾아 나서는 채굴주의는 에너지의 생태적 순환을 끊어버린다.

서구의 백인들이 땅속에서 죽은 생명의 에너지를 고농축한 화석연료인 검은 돌과 검은 물을 찾아내기 전까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노동은 경제를 돌리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가축과 노예, 민중은 돌을 나르고, 길을 만들고, 집을 짓는, 함께 ‘짐을 끄는 짐승들’이었다. 짐을 끄는 짐승들에게 해방의 길은 기술과 에너지 혁신으로 오지 않았다. 화석에너지는 누군가에겐 선물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재앙이었다. 선물은 재앙과 함께 퍼져나갔다. 근대 인간은 하데스의 영토를 파헤치는 일에도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새로운 에너지와 기계의 압도적인 힘이 인간과 가축의 힘(에너지)을 대체했지만 그 놀라운 힘이 ‘짐을 끄는 짐승들’의 무게를 덜어주지 않았다. 베를 짜던 노동자들은 방적기계 앞에서 쓰러졌다. 기계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다. 기계는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는다.

나막신을 던져 기계를 멈춰 세운 러다이트 운동은 인간 노동을 기계의 보조 동력으로 투입하는 새로운 생산방식에 대한 항의고 저항이었다. 화석연료라는 새로운 동력원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에겐 생산속도와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생산의 통제권과 노동자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다준 ‘선물’이었지만, 노동자들에겐 재난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에너지 전환에는 기술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기술이 누구를 향하느냐는 물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찰리 채플린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계의 리듬에 따라 단순 동작을 반복하다 미쳐버린 노동자의 모습을 풍자했다. 오늘날 채플린 시대보다 ‘스마트하게’ 통제되는 생산라인은 노동자에게 할당된 작업 시간과 달성 기준을 초 단위까지 계산해낼 정도에 이르렀다. 폭스콘 공장의 노동 실태를 고발한 책 《아이폰을 위해 죽다》는 노동자들의 에너지가 어떻게 아이폰에 빨려 들어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폭스콘의 노동자들은 옆의 동료와 대화할 시간도, 얼굴을 쳐다볼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작업장 전체를 한번 돌아볼 여유도 없다. 그만큼 노동자의 1분 1초까지 철저히 관리하는 폭스콘의 통제시스템 하에서, 노동자들은 약정기간 2년 후면 구식이 될 불량 없는 ‘아이폰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고갈시킨다.


인간 노동을 대체한 자동화는 일자리를 빼앗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와 노동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요즘은 작업장뿐만 아니라 식당이나 편의점 같은 곳도 어디에나 CCTV가 설치돼 있다. 이 장치는 도난이나 사고 등 비상시의 대비 장치지만, 상시적으로는 노동 감시 수단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노동 감시와 통제에 투입되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노동강도와 탄소배출의 상관관계는 연구도 통계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고강도 추출에는 그만큼의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애플도 RE100을 선언했지만 폭스콘 공장의 에너지를 100% 재생에너지로 조달한다고 해도, 그것을 ‘생태적인 에너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10월 15일 파리바게뜨 SPC 평택 공장에서 소스 배합기에 끼여 숨진 노동자는 사고 당시 12시간 맞교대 근무제에서 10시간째 야간노동 중이었다. 지난해 12월 24일 쿠팡 동탄 물류센터에서 숨진 노동자의 만보기 앱에는 하루에 3만 5,700보가 찍혀 있었다. 20km가 훌쩍 넘는 걸음수다. 기계는 자지 않고 일할 수 있지만 인간을 그럴 수 없다. 살아있는 생명 존재인 인간은 잠을 자야 한다. 12시간 맞교대 근무는 반생태적인 노동을 강제한다. 사회를 위해 필수적인 분야 외에 이윤을 위한 야간의 노동을 멈춘다면, 우리는 연료와 생명에너지를 모두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의 낭비는 생산과 소비에 사용되는 화석연료나 재생에너지 같은 광물성 물질에너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노동자)을 낭비한다는 점이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은 지속가능한 착취를 위해서라도 노동자의 신체를 보존하고 노동력의 재생산을 고려해야 했다. 자본의 필요에 따라 고안된 임금체계, 사회보장체제 등은 서구 사회에선 1970년대 이후로, 세계적으로는 90년대 이후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 오늘날 인지 자본주의는 코기토(cogito)를 채굴하고, 생명 자본주의는 엑스텐자(extensa)를 채굴한다. 이제 노동착취는 일터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인간 존재의 활동에 수반되는 생명 에너지를 무한 채굴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24시간 노동은 24시간 생산체제이자 24시간 생태파괴를 의미한다. 생산의 감축 없이 소비 감축, 탄소 감축은 불가능하다. 생산 통제는 탄소 감축만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잠과 쉼을 돌려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전기 불빛 아래서 밤낮없이 성장을 강요받고 있는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 존재들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모든 자연의 존재들이 누려야 한다.

간호사로 일하는 친구는 자신이 종종 느끼는 에너지의 고갈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감정도 체력도 모두 바닥이야, 소파에 몸을 던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아, 그러면 간신히 리모컨을 찾아서 티비를 켜, 그리고 이렇게 말해, 이제 너희가 엔터테인할(즐겁게 해줄) 차례라고. 나는 아무것도 안할 거야. 나를 웃기고, 위로하고, 돌보라고, 이제 내가 복수하듯이 기계에게 명령하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번창에는 이유가 있다. 소비자를 만족시키느라 지치고 아픈 노동자들은 소비 행위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소비가 소비를 낳고 에너지가 착취적으로 전가되는 체제를 끝내야 한다. 에너지의 생태적 전환은 노동의 생태적 전환 없이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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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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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살이

    큰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필자는 61살인데, 사업으로 큰 돈 벌어보겠다고 좋은 직장 일찍 관두고 깝죽되다가 쫄땅 망하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그래도 자본주의체제가 쉽게 망하지않을것이니 어떻게든 돈을 벌수있는 내그릇만큼 벌어보자고 금융분야 한 부분을 특화해서 15년정도 독학함..이젠 거의 장인수준이 된듯해서 조만간에 본격적인 돈벌이를 할 것인데....문제는 그 돈으로 뭘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것인가 고민 많이함..오랜 생각끝에 내린 결론...우리 민족의 오랜 염원인 대동세상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실제 가능한지를 찾아보자..혼자서는 불가능하니,,,,내 돈그릇이 커져서 돈을 많이 벌면 그 분야 연구자들을 찾아서 적극 밀어주자. 등등.....물론 개인적으로도 본격적으로 관련 분야 공부를 해야하는 데,,,,,,,,뭐부터 해야할지???? 우선 북한의 사회운영과 원리, 실제 등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답니다.......이렇게 긴 글을 쓰는 것은 오늘 읽은 내용들에서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있던 문제들에 대해 너무도 명료하게 언급을 해서 느낀게 진짜 많습니다.....이름을 꼭 기억해두리다 .. 혹시 인연이 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