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 시위 1년 “시민이 아니라 ‘기재부’와 싸웁니다”

[이슈] 다시 시작된 장애인 농성…여의도 T4 폐지 농성부터 삼각지역 천막농성까지

  지난 11월 21일, 삼각지역에서 열린 장애인권리예산책임 촉구 천막농성 선포 결의대회 현장 [출처: 박다솔]

오는 12월 3일은 서른 번째 ‘세계 장애인의 날’이다. 1982년 12월 3일 열린 유엔 총회에선 ‘장애인권리증진을 위한 세계장애인 10년’(1983~1992년)과 그 실천전략인 ‘장애인에 관한 세계행동계획(World Program of Action, WPA)’을 채택하고, 장애인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을 제창했다. 그리고 1992년, 10년 계획을 종식하면서 유엔이 이 날짜를 기념해 12월 3일을 세계장애인의 날로 정했다. ‘완전한 참여와 평등’을 조금 더 풀어쓴다면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 참여와 평등한 기회의 실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서른 번째 세계 장애인의 날을 앞둔 한국에서 이런 목표가 어느 정도 실현됐느냐를,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는 12월 3일은 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오전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는 방식으로 이동권 보장 시위를 본격화한 날이기도 하다. 이후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라는 이름의 시위는 11월 18일 기준 46차까지 진행됐다. 장애인 당사자 및 활동가들이 삭발하는 ‘삭발투쟁결의식’은 132회, 지하철 승강장 등에서 벌인 ‘지하철 선전전’은 230회까지 진행됐다. 전장연은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 예산안에 관련 예산이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3일, 5호선 여의도역에서 기습 시위를 벌인 뒤 찾은 곳도 홍남기 당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공덕동 자택 앞이었다. 전장연을 비롯한 장애계가 요구하는 정책들이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의 문턱 앞에서 막혔다.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권리보장을 위해 법을 만들고 고쳐도, 예산이 수반되지 않았다.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장애인 권리예산을 일정 부분 반영하자 국민의힘에선 “전장연이 마침내 정부여당을 삥뜯는 데 성공했다”라는 발언이 나왔다. 보건복지위원회는 전장연이 증액을 요구했던 사업 중 가장 덩치가 큰 장애인활동지원사업에 대해 정부안 대비 5,500억 원을 증액함에 따라 6,539억 원 증액을 제시한 전장연의 요구를 약 85% 수용했다. 장애인 자립지원 시범사업과 자립생활지원센터 예산 역시 정부안보다 각각 179억 원, 41억 원을 늘려 전장연은 “보건복지부 주관 장애인 권리예산이 100%는 아니지만, 정부안 대비 장애인 활동지원과 탈시설시범사업 예산 등이 의미 있게 반영됐다”며 11월 14일부터 5일간 ‘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유보하기도 했다.

  11월 21일 삼각지역. 천막농성장을 설치하려는 활동가들이 경찰, 보안관들과 충돌하는모습. [출처: 박다솔]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우리 투쟁에 대해 정치인들이 ‘떼를 쓴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 것에 큰 모멸을 느낀다. 기본적인 권리 보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정부나 정치인을 상대로 우리의 기본권을 주장하는 것 아닌가”라며 “이준석 전 대표처럼 정당의 대표라는 사람도 대놓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이 장애인들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얼마나 낮은 위치에 있는지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건 없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장애인 이동권을 아우르는 다른 상임위인 국토교통위원회의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에선 이미 기재부에서 삭감한 예산이 다시 삭감되는 등의 후퇴도 발생했다. 전장연은 내년도 이동권 예산으로 총 5,288억 원을 요구했으나, 일부만 반영돼 총 3,130억 원이 의결됐다. 장애인 이동권 예산은 크게 세 가지다. 저상버스 도입 보조, 시외이동권 보장(시외·고속버스), 그리고 특별교통수단(장애인콜택시) 운영비 및 신규 도입 지원이다. 장애계는 해당 예산으로 각각 3,434억 원, 31억 원,1,823억 원 편성을 국회에 요구해 왔다. 윤석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 2,159억 원과 비교해보면 총 3,129억 원을 더 증액하라는 요구다. 그러나 국토위에서는 이 중 973억 원만 반영됐다.

“장애인권리보장 예산이 상임위에서 반영된 것은 예선에 불과하다. 기재부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 본선이다. 예결위(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논의가 남았는데 최종적으로 예산이 통과하려면 기재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재부의 행태로 미뤄봤을 때 예결위에서 기재부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여소야대라는 국면에서 기대감이 있지만, (기재부가) 계속 조폭 두목처럼 배후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기 때문에 이를 알리는 싸움이 필요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지난 11월 21일 한성대역 승강장에서 지하철 선전전을 끝낸 직후 기재부 상대의 투쟁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 위의 정부’ ‘기재부의 나라’라는 말처럼 기재부는 예산에 있어 가장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집단이다. 기재부는 정부 예산안에 대한 반발이 나오면 ‘부처간 협의’를 강조하며, 각 부처가 협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반영한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기재부가 전면에 내세우는 또 하나의 논리는 ‘재정건전성’이다. 지난 7월 4일 추경호 기재부 장관은 전장연과의 면담에서 장애인 권리예산 편성을 요구받자, “그거 다 담아내면 대한민국 나라 망하는 겁니다”라고 응수했다.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예산은 이동권과 탈시설, 거주권, 교육권, 취업지원과 같은 비장애인들에겐 당연한 권리들이다.

박경석 대표는 최소 30만 명의 장애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의 T4 작전을 거론하며, 기재부를 “한국판 T4 본부”라고 칭했다. 우생학적 관점에서 장애인을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간주하고, 장애인에 대한 복지 지출을 ‘돈 낭비’라고 규정하며 학살을 자행한 T4 작전이 기재부의 인식과 사실상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나치는 장애인을 비용으로 생각했고, 국가 재정 강화를 위해 죽여버렸다. 기재부도 예산의 문제로 장애인의 권리를 아주 잔인하게 자르고 있다”라며 “삼각지역 천막 농성은 그런 기재부의 실체를 드러내는 투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삼각지역 역사 안에 차려진 천막농성장

지난 11월 21일 전장연은 대통령 집무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역인 삼각지역에 천막농성장을 차렸다. 역사 안에서 천막농성장이 쉽게 차려질 리 없었다. 천막농성장은 삼각지역 동대문 방향 1-1 승강장에서 설치될 예정이었다. 이날 오후 2시에 시작된 ‘삼각지역 천막농성 선포 결의대회’를 마칠 때쯤 농성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천막이 지하철을 타고 도착했다. 지하철 보안관들이 천막의 하차를 막았고, 전장연 활동가들은 천막을 부여잡고 내릴 타이밍을 살폈다. 지하철 정차가 길어지자 천막이 어렵게 지하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천막을 든 전장연 활동가들이 겨우 한 걸음을 옮기자 이를 막기 위한, 동시에 이를 사수하기 위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전장연 활동가들을 비롯해 연대를 위해 모인 활동가, 지하철 보안관, 경찰, 기자가 한데
뒤엉킨 아비규환의 상황이 약 20분 정도 지속됐다. 지하철 보안관과 경찰은 말로는 위험하다, 밀지 말라 하면서도 더 많은 인원과 더 거친 힘으로 결의대회 참가자들을 밀고 있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활동가들은 울부짖으며 넘어진 활동가들을 일으켜 세웠다. 몇몇 경찰들은 비속어를 쓰며, 활동가들을 잡아끌기도 했다. 결국 농성장은 승강장이 아닌 개찰구 앞에 설치하는 것으로 전장연과 교통공사측이 합의했다.

  11월 21일 삼각지역. 전장연 활동가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출처: 박다솔]

박주석 활동가는 격한 상황이 정리되고 발언 기회를 얻자 “경찰은 왜 그쪽에 서 있나. 욕하고 화내고 때리던 경찰들은 뭔가. (장애인들이) 살겠다고 목소리를 내는데, 왜 항상 경찰은 죽이는 데 서 있나”라고 눈물을 흘리며 경찰을 규탄했다. 이어 “여기 있는 장애인이 한 명이라도 넘어지면 이들을 실을 응급차가 한 대도 없다는 걸 알고 있나. 활동지원사, 부모가 동반하지도 못해서 매번 병원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그러다 지체돼 사망한 사건이 몇 건인지는 알고 있나”라며 “우리나라에선 근대 국가형성 이후 단 한 번도 권력이 생명을 살리는 데 쓰인 적이 없다. 시민들이, 장애인들이, 취약계층들이 투쟁해서 만든 복지들이고, 그 투쟁이 사람들을 살렸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우린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외쳤다.

광화문 농성이 마무리되고, 여의도 농성이 시작됐다

서울 광화문광장 지하엔 2012년 8월 21일부터 2017년 9월 5일까지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농성장이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부양의무제를 대폭 완화하겠다고 공약했으나 임기 3년이 지나도록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새로운 장애 종합 판정 체계를 도입하기 위한 민관 협의 기구까지 꾸려져 논의를 시작했으나 장애등급제는 폐지가 아닌 개편으로 후퇴하고, 사실상 장애등급제 폐지 공약은 파기 수순으로 가고 있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국무총리 면담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은 없었다. 철저한 외면 속에 그렇게 언제부턴가 장애인 농성장은 광화문의 풍경으로 자리 잡는 듯 했다. 하지만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지를 전격적으로 약속하면서 1842일간의 농성이 마무리됐다.

광화문 농성장 공동대표단은 농성 마지막 날 저녁 ‘광화문 농성장 5주년 · 전장연 10주년 문화제’에서 감사 인사를 전하며 “농성은 끝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5년의 성과를 딛고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손을 잡읍시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자기준, 장애인수용시설 완전 폐지를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1라고 외쳤다.

벅찬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장애인들의 삶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정부 스스로도 장애등급제 폐지를 두고 “31년 만의 장애인 정책 변화”라고 강조할 정도로, 중요한 기점이 돼야 했지만 이후 논의 과정은 장애인들로 하여금 ‘가짜 폐지’라는 반발이 나오게 했다. 역시 예산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의 장애등급제 폐지는 등급을 ‘정도’로 말만 바꾸고, 장애등급에 가려진 장애인의 필요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예산을 반영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퇴임 1년을 앞둔 상황에서 장애계는 다시 농성을 택했다. 장애인의 기본적 권리 및 장애인 정책의 기본 이념을 제시하는 장애인권리보장과 탈시설 체계를 구축하는 장애인탈시설지원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이었다.

2021년 3월 16일, 전장연은 장애인권리보장법과 장애인탈시설지원법의 성안 및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서 컨테이너 농성 투쟁을 시작했다. 그 해 7월엔 컨테이너 옥상으로 농성장을 확대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구성된 탈시설민관협의체를 거쳐 나온 탈시설로드맵이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늦게 나온 것에 더해 내용조차 부실해 이에 대한 적극적 수정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후에 ‘T4 철폐 농성장’(장애인 권리예산 · 권리입법 쟁취 한국판 T4 철폐 농성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농성을 지속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애인 권리예산보장을 재정 낭비로 여기는 정부가 독일 나치와 다를 것 없다는 의미를 담았다. 24시간 열려있는 T4 철폐 농성장은 전장연을 구성하는 190여 개의 지역 장애인 · 시민사회 · 노동 · 인권 · 문화예술단체들,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주·야간 농성장을 사수하고 있다.

4·20 장애인차별철폐 투쟁 결의대회 같은 각종 큰 결의대회나 기자회견 등이 열리기도 하고, 활동가들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1월 18일 T4 철폐 농성장에서 만난 박철균 전장연 조직국장은 “T4 철폐 농성은 장애인권리보장법과 장애인탈시설지원법을 필두로 장애인 권리를 위한 다양한 법들이 제대로 제정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며 “핵심은 예산 반영으로, 장애인 지원 관련 예산을 체계적으로 확보해 나가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박 국장은 지난 1년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비롯해 높은 강도로 이어졌던 장애인 투쟁에 대해 “우린 시민이 아니라 기재부와 싸우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난 1년 욕도 많이 먹었지만 관심과 사랑도 많이 받았다”라며 “장애인의 속도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시민들이 더 늘어나길 바란다. 우리가 ‘함께 살자’고 외치는 그 구호엔 우리 모두가 포함돼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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