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과 차별, 국가의 무책임이 강화하는 일상 속의 참사: 여성살해

[이슈] 권력이 아닌 권리의 자리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차례

① 노동자는 왜 죽는가? 아니 왜 죽임을 당하는가?
② 불평등과 차별, 국가의 무책임이 강화하는 일상 속의 참사: 여성살해
③ 애도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④ 용균이에게


지난 9월, 신당역 여성 노동자 살해 사건을 계기로 한겨레가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보복범죄로 입건된 피의자 중 91.6%는 남성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보복살인의 피의자는 모두 남성이었다. 피해자는 58.5%가 여성이었다. 무엇에 대한 보복일까. 검색창에 ‘만나주지 않아 살인’을 입력하면 “날 만나주지 않아 홧김에”, “헤어져 만나주지 않아”, “왜 안 만나줘”로 시작하는 여성 살해 사건 기사의 목록이 몇 페이지씩 이어진다. ‘2022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서 조사된 바에 따르면 스토킹 사건에서도 총 481건 중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393건으로, 전체의 82%에 달한다. (이 와중에 여성가족부는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올해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으로 바꿨다.) 수많은 여성이 단지 이별을 원했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보복’ 살해당하고 있다. 비단 신당역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왔던 사건들, 여성살해는 조용히 계속되고 있는 일상 속의 참사다.

살해의 동기에 자리하는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

전 세계적으로 반복되는 여성살해의 현상을 ‘페미사이드’라는 이름으로 개념화한 다이애나 러셀은 페미사이드를 “역사적으로 불평등한 남녀의 권력관계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성에 대한 증오, 경멸, 쾌락 혹은 소유 감각이 동기가 되어 남성이 자행한 여성에 대한 여성혐오적 살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지 가해자가 남성,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페미사이드가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여성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살해 사건이 반복되는 것은 개인적인 동기인 듯 보이지만, 실제 그 동기의 기저에는 “여성이라면 내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권력관계에 기반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해자의 이러한 동기는 이를 정당화하거나 방기하는 수많은 구조적 환경을 통해 강화된다.

신당역 사건의 경우를 보자. 서울교통공사는 여성 직원의 비율이 10.3%에 불과했고, 성별 임금 격차는 35.7%에 달했다. 2016년에는 무기계약직 전환 과정에서 여성 지원자들의 면접 점수를 조작해 모두 탈락시키는 일도 자행됐다.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한 환경이었기에 가해자가 피해자를 불법 촬영하고 피해자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음에도 조직 내에서는 가해자에게 적극적인 차단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가해자를 신고한 사람이 도리어 소문과 비난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심지어 신당역 사건 이후 서울교통공사 내부에서는 이 사건 가해자의 행위와 유사한 스토킹, 성폭력 가해자나 가족이 피해자를 찾아와 합의를 종용하는 행위 등 2차 가해 사례들이 추가로 보고되기도 했다. 조직 내에서 이미 이러한 일들이 상당수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사건 후에서야 피해자들이 다른 유사한 경험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불평등한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당역 사건보다 앞선 7월, 인하대에서는 한 남학생이 동급생인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건물 위에서 밀어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사건 이후 온라인에서는 피해자의 신상을 찾거나, 오히려 학교의 명예를 운운하며 피해자를 모욕하는 글이 게시됐고, 심지어 한 언론에서는 사건의 원인으로 ‘캠퍼스 내 무분별한 음주 문화’를 지적하기도 했다. 성폭력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의 행동 탓으로 돌리는 ‘강간 신화’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고, 이는 사건 이후에도 다른 구성원들에게 권력의 위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 재강화하려는 의도로 진행된다.

‘위계 관계를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성적 괴롭힘을 가하고, 이를 통한 조직 내 통제 권력을 확보하는 일련의 행위’, 현재 한국에서 ‘성희롱’이라는 용어로 번역된 ‘sexual harassment’는 원래 실질적인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성적 괴롭힘’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특정 조직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의 ‘성적 괴롭힘’이 이를 통한 통제 권력의 확보를 위해 벌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사건 이전에 이를 가능하게 하는 불평등의 구조를 반드시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분명한 ‘구조적 원인’을 방치한 채,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저 ‘묻지마 살인’으로, 개인 간의 ‘치정’ 관계로, 개인적 원한에 의한 ‘보복’ 행위로 치부해 온 국가는 사실상 이 연속된 여성 살해의 참사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셈이다.


안전을 위해 필요한 건 ‘더 강한 처벌’이 아니라 ‘권리의 보장’이다

매번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비슷한 수준으로 갱신되는 신고 시스템,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와 피해자 지원책은 이 반복되는 참사를 해결해 줄 수 없다. 신고 시스템이 있어도 쉽게 신고조차 할 수 없는 구조가 버티고 있는 이상, 사건 이후에야 사후 대책을 반복하는 답답한 처사는 반복될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안전’은 여러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됐고, 젠더 폭력에 있어서도 안전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하지만 안전에 대한 요구나 대책이 그저 개별 사건에 대한 신고, 처벌, 지원 체계에만 집중되는 경우, 이는 자칫 사회를 오히려 더 경직시키고 보수화할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안전은 단지 ‘위험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이나 집단을 일방적으로 전제해 사전에 차단하거나 분리한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전자발찌나 더 많은 CCTV가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또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의 목록을 교육하는 것이나, 위험 시 대처 방법을 훈련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지난 몇 년간 반복된 참사에서 우리 사회가 확인했던 것들은, 위험을 감지하고도 “가만히 있으라” 지시하는 권력의 문제, 안전을 위한 구조적 예방책보다는 권력 기관의 안위를 지키기에 집중된 행정력과 경찰력의 문제, 삶의 기반과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이들이 겪어온 재난 앞에서의 무력함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참사를 되새기며 지금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공허한 애도와 꼬리자르기식의 처벌이 아니라 권리의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또한 그 권리는 불평등과 차별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바꿔 나가야 마련될 수 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정부는 여성살해라는 반복되는 일상 속 참사의 원인이고, 방관자이며, 책임자이다. 우리에게는 ‘피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 ‘위험에 처하지 않을 권리’, ‘피해를 입증해 선별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아니라 평등하게 삶의 자원과 기반을 보장받고, 자신의 요구를 말하고, 불평등에 대응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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