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온 ‘인권실사 의무화법’

[INTERNATIONAL2]

인권실사 의무화

유엔(UN)이 2011년 발표한 ‘UN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은 (초국적) 기업이 발생시키는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유엔 차원에서 제시한 원칙이란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비록 법률 문서는 아니었지만, (초국적) 기업으로부터 발생한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할 주체가 국가임을 확인하고, 기업에 인권을 존중할 책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이후 유엔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같은 국제기구는 물론 유엔 회원국들이 관련 법률과 정책을 수립할 때 근거로 쓰이고 있다.

특히, 기업에 부여된 인권존중 책임의 핵심은 기업의 공급망에 이르는 사업영역에서 ‘인권실사(Human Rights Due Diligence)’를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즉, 기업들은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사업영역 전반에서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방지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또 이를 평가하면서 이해관계자들(지역사회, 시민사회, 노동조합, 소비자 등)과 소통해야 한다고 인권실사는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인권실사는 점차 유럽연합(EU) 국가들을 중심으로 법률에 따라 의무 사항이 되고 있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입법화됐고,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추가로 입법을 검토 중이다. 아예 유럽연합 차원에서 인권실사 의무화에 대한 지침도 현재 추진 중이다. 주로 일정 규모 이상의 대기업들에 우선 적용되는 이 법들 외에도 아동노동이나 특정 산업 분야에 대해서 인권실사를 의무화하는 법률들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도 인권실사 의무화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권고와 압력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나비효과

그러나 한국에서는 ‘인권실사’라는 이름이 아닌 ‘ESG경영’이란 차원에서 이 논의가 다뤄져 왔다. 문재인 정부와 현재의 윤석열 정부는 일종의 가이드라인 형태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인권침해 요인을 살펴보도록 유도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던 와중에 미얀마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한국 시민들의 높은 미얀마 민주주의 지지열기와 함께 국회에서는 여야 국회의원들 60여 명이 ‘미얀마의 평화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국회의원모임(이하 미얀마지지 의원모임)’을 결성했다. 한국 국회에서 외국의 민주주의 이슈에 관해 여야가 함께 모임을 만들고 활동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국회 차원의 지지는 높은 상황이었다. 전국 106개 단체가 모여 결성한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이하, 미얀마 지지시민모임)’은 미얀마지지 의원모임에 성명서 발표로 그칠 것이 아니라 관련한 법을 제정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핵심적으로 요구한 것이 바로 해외자원개발사업법 개정이었다. 한국은 해외자원개발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해외자원개발 사업을 하는 기업에 예산을 지원하는데, 정부 예산이 지원되고 있음에도 인권 및 환경대책을 기업들에 요구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내전이나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분쟁지역’에서 자원개발사업을 하는 기업들만이라도 인권실사를 의무화하자는 해외자원개발사업법 개정안은 현재 미얀마에서 가스개발사업을 하고 있는 포스코 인터내셔널 때문에 개정된 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2월 8일, 이미 사업을 시작했더라도, 사업지역이 분쟁지역으로 지정되면 인권실사를 시행할 것을 의무화하는 법이 발의됐다.1)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비판하는 국회결의안을 통과시킨 국회 입장에서, 이 정도 법이라도 발의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요청을 외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18일, 해외자원개발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는 국회 공동기자회견이 열렸다. [출처: 나현필]

인권실사 의무화법, 한국에서 제정될 것인가

제한된 조건에서만 인권실사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발의했지만, 이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기업 측의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2) 자원개발사업 지역의 인권침해 문제가 심각해질 경우, 사업 철수까지 할 수 있게 한 조항을 문제 삼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에 발의된 해외자원개발사업법 개정안이 원안대로 통과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만약 원안대로 통과되더라도, 정부가 꼼수를 부릴 여지도 많다. 이를테면 ‘분쟁지역’ 지정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이 협의해서 결정하기로 했는데, 분쟁지역을 정부가 지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사실, 인권실사 의무화는 그 자체로 기업의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방안은 아니다. 인권침해 예방대책 수립을 핵심 목표로 하는 인권실사는 기업들이 스스로 설정한 기준 혹은 평가를 통해서 알리바이를 만드는 방식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업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만이라도 의무화하자는 취지이기 때문에, 기업이 인권실사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어떻게 담보하고, 또 어떤 기관이 이를 평가할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인권실사 보고서의 공개범위와 방법도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 공급망에까지 인권실사를 의무화하는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다소라도 완화될 것이 기대된다. 때문에 시민사회는 인권실사 의무화법을 한국에서도 제정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해외자원개발사업법 개정안과 별도로, 유럽연합 국가에서 제정되고 있는 인권실사 의무화법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통과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인권실사 의무화법이 제정되기보다, 한국기업들에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수 있는 법률 제정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윤석열 정부의 노골적인 친기업 행보를 감안하면, 기업에 알리바이나 만들어주는 인권실사 의무화법마저도 정부가 반대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인권실사 의무화법은 분쟁지역의 한국기업이 최소한 인권침해에 기여하거나 연관되지 않도록 책임을 지우는 법률이다. 이런 법률도 만들지 못하면서, 한국 정부와 국회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일말의 진실성도 담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기업으로 인한 인권침해 피해자들을 어떻게 구제할지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인권실사 의무화 법안이 적어도 국제기준에 걸맞게 제정되도록 노동계의 관심도 필요하다. 앞으로 국회에서 논의될 인권실사 의무화법을 기업이 주도할 수 있어 우려가 크다.

각주
1) http://www.news33.net/news/articleView.html?idxno=90084
2)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3132406632560160&mediaCodeNo=257&OutLnkCh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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