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명을 돌보는 노동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녹색 스트라이크] 노동과 환경 이분법을 부수자


'노조 조끼 입고 그 집회 나가도 되나'

내가 만난 민주노총 조합원 중 몇몇은 속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토로했다. 일터 내 노동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의제를 다루고 연대하는 노동조합에서 왜 노조 조끼에 대해 스스로 검열하게 되었을까, 속상한 마음이 드는 한편 이유가 궁금했다. 그들에게 구체적인 답변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 집회’가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집회였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조 조끼’에 대한 자기 검열은 분명 노동조합의 운동을 왜곡하는 자본 권력 집단의 프레임에서 비롯된 면도 있겠지만, 이른바 ‘환경’과 관련된 사회운동의 장에서 느끼는 국내 노동조합의 자기 검열은 좀 더 복잡한 속내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거의 대부분의 산업은 구조적으로 생태계 파괴를 부추기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된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전 지구적 파괴행위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너지를 생산하는 과정,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폐기하는 과정 모두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공장이 아닌 의료·돌봄 산업에서도 온갖 재활용 불가능한 폐기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반생태적이며, 낭비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택배를 배송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비닐랩을 씌우는지, 건강보조식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폐기물들이 나오는지, 식품 생산 공정에서 얼마나 많은 물을 사용하고 폐기물을 버리는지 손과 눈이 기억하고 있다.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에 대해 노동자가 느끼는 죄책감과 무력함은 소비자의 위치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기후위기는 제국주의적 생활양식을 민중에게 강요하거나 부추기고 있는 과개발 사회의 물리적 토대, 즉 경제 영역에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환의 핵심에는 ‘노동’과 ‘노동자’가 있다. 그러나 노동자 자신의 생존과 생계를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의 집단적 투쟁조차 여러 난관에 봉착해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노동자가 사업장과 산업의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행위에 대해 통제력을 갖는다는 건 더욱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나는 노동자가 생존과 생계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정도의 통제력을 일단 갖추고 난 다음에야 생태적인 노동의 전환에 힘쓸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오히려 인간 동물, 인간 노동자의 몸과 생명을 갉아먹는 체제가 비인간 동물과 ‘비인간 노동자’를 비롯한 지구의 데모스를 죽이는 체제와 같다는 인식이 확장될 때, 지금의 파괴적인 정치와 경제 체제를 가로지르는 싸움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전환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확장을 넘어선 투쟁의 확장이 필요하다. 오늘도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자본주의 지배동맹 대 지구의 데모스 사이 싸움터의 맨 앞’으로 이해하고 이 싸움에 여러 주체가 동참하는 움직임이 생겨나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을 철폐하고자 하는 투쟁은 인간-비인간을 구별하는 차별 의식을 철폐하고자 하는 투쟁과 맞닿아있다. 석탄발전소 노동자 고 김용균과 같은 죽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투쟁은 석탄발전소를 퇴출하려는 탈석탄 운동과 연결돼 있다.

2022년 여름, 홈리스행동,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가를 포함한 다양한 이들이 기후정의버스를 타고 폐쇄를 앞둔 당진 화력발전소를 찾아가 발전노동자들을 만났다.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을 설명하던 송상표 공공운수노조 금화PSC지부장이 그날의 모임을 보고 ‘이상한 조합’이라고 하며, 이런 이상한 조합이 많아져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몇 달 뒤 서울에서 열렸던 924기후정의행진에는 다양한 정체성과 직업을 가진 이들이 모여 ‘화석연료와 생명파괴 체제’를 종식해야 하며 모든 불평등을 끝내야 한다고 외쳤다. 그날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 체제의 피해자이며 대안은 우리 안에 심겨져 있음을 확인했다.

노동과 환경 사이 갈등을 만드는 자본권력의 전략

현행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노동자가 지구의 데모스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생태적인 사회에 필요한 노동을 새롭게 만들어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충분히 사유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덧씌워져 있는 죄책감의 그물을 먼저 벗겨내야 한다. 노동자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노동에 종사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자본권력이 그러한 노동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해내고자 온갖 권력을 행사해 그 일자리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야말로 가장 먼저 재해자본주의 체제에 노출된 최일선 당사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자가 입은 산업재해는 자본주의 체제가 남긴 폭력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단순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근골격계 질환과 3교대 근무를 하느라 체력을 소진한 전선 공장 노동자의 지친 몸은 기후위기의 다른 모습이다.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해온 오래된 전략 중 하나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분법이었다. 그들은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의 차이를 강조하며 동물 종(種) 사이에 위계질서를 부여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에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노동의 일방적인 측면만을 부각했다. 땅과 흙을 매개로 다양한 지구 생명이 상호작용하는 노동은 자본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인간이 행하는 인위적이고 일방적인 생산관계로 해석됐다.

증기기관의 발명 등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근대 과학기술은 강하고 빠른 기계의 출현을 도왔다. 생체 리듬과 조응하지 않는 기계의 운동은 기존에 자연과 맺고 있었던 생산 양식을 파괴하는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노동과 맺는 방식을 파괴했다. 생산 기계와 자본을 독점한 자본권력은 자연과 노동자 양측에 대해 무소불위의 물리력을 행사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 사유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대상화됐다. 빠르고 많이 생산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이 분절화(분업화)되자 노동과 상품 그리고 자연을 연결 짓는 통합적 사고는 수공업 시대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리고 수선할 줄 아는) 도구를 빼앗겼고 자본가가 마련해준 기계 앞에 앉았다.

우리는 여전히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고, 흙에서 삶에 필요한 재료를 얻는다. 21세기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 중 하나인 반도체의 주원료는 규소(실리콘)이고 규소는 모래에서 추출한다. 신재생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태양전지의 주원료 역시 모래에서 나는 규소다. 모래에서 규소를 추출하는 방법과 규소를 잉곳(Ingot: 반도체와 태양전지의 기초재료)으로 만드는 과정은 생태계 고유의 작용 범위를 넘어선다. 그리고 엄청난 전기 에너지가 사용된다. 대다수 민중은 이 기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알아도 사용할 수 없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결부된 기술에 대해 알지 못하며 언제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학습할 뿐이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드는 물건, 제조 방법 그리고 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역사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를 계속해서 증진시킨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구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경제학은 이론적으로 이 부조화에 대해 해명하거나 대안을 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오늘날 노동자와 자연이 서로 구별된 채로 멀어지고 갈등하게 된 것은 자본가가 민중의 자립적인 생산 수단을 밀어내고 자신의 생산 기계와 기술력에 의존하게 만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일련의 사건들에서 비롯됐다.

이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실업의 공포를 양산해온 맥락과도 일치한다. 자본주의는 현 체제에 종속되는 것 외에는 생존할 수 없다는 강박을 제도와 일상 곳곳에 심어놓았다. 자신을 고용한 자본이 어떤 일을 시키든, 그 일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든, 생태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든 간에 먹고 살기 위해서는 고용돼야 한다는 강박을 말이다. 자본권력에 똘똘 뭉친 정치 집단, 언론매체, 이론가들, 즉 자본주의 지배동맹이 만들어낸 세상은 어떠한가? 지구가 네다섯 개 있어도 부족할 경제 규모를 갖추었음에도 대량 해고와 실업 사태는 계속되고 기아와 빈곤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아파트 단지는 계속 올라가지만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어디도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자립과 공존의 조건을 모두 앗아간 채 괴물처럼 몸집만 불리고 있다.

노동의 재조직: 어떤 노동이 필요한가

자본에 종속된 노동만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노동만이 공식적인 노동이라는 자본주의의 전제는 구체적인 법 체제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주요 기둥 중 하나인 법 체제의 어느 한 면을 살펴보자. 국내의 제도화 된 노동 가장 밑바닥에는 19세기 독일(영업법)과 이를 계승한 일본(노동기준법)의 자본주의 경향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노동법이 있다. 그중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사업주가 노동자를 부려서 남긴 이윤의 일부 몫(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을 한국 사회는 노동자라고 본다. 이와 같은 정의 규정은 반대로 자본가에게 종속된 노동이 아닌 노동은 공식적인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음을 뜻한다. 노동이 아닌 ‘무엇’이 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이렇듯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에 위계질서를 부여한다. 앞에서 살펴본바 ‘누가’하는 노동인가에 따라서 위계를 부여하기도 하고 ‘자본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서 서열을 나눈다. 전자의 경우 남성, 서구, 고학력자, 전문직에 높은 가치를 매긴다. 후자의 경우 자본가의 권력(이윤) 창출 과정에 깊숙이 연관될수록 중요한 노동으로 간주한다. 그 노동이 실제로 다른 사회구성원과 지구 생명에게 어떤 기여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자본주의 헤게모니에 저항하며 새로운 경제이론을 제시하는 페미니즘 경제학자의 작업은 노동을 재조직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중 국내에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2013, 알트)로 소개된 캐서린 깁슨과 줄리 그레이엄의 공동 작업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자본권력으로부터 공식 노동으로 인정받지 않는 경제영역의 3분의 2가 전체 경제활동의 무려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이 경제 영역에서 이뤄지는 노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사 노동, 친인척 돌보기, 마을 작업, 자원 활동, 자기 재충전형 노동과 같은 미지급 노동과 협동조합에서의 노동, 서로 돕는 노동, 더부살이의 대가로 하는 노동, 현물로 대가를 받는 노동 등 대안적 지급 노동. 이같은 연구 결과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조건의 상당 부분이 자본주의에 종속되지 않는 경제 체제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진실을 역설한다.

기후위기가 인간사회에 요구하는 노동은 뭔가 특별한 노동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하대해왔던 서로를 돌보는 노동, 관계를 맺기 위한 노동, 연대하고 연합하는 노동, 위로하고 애도하는 노동이다. 이러한 노동은 인류가 존속하는 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기여해오고 발전시켜온 노동이다. 그리고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는 인간됨’에서 ‘인간-비인간 구별 없이 연대하는 동물됨’을 향하도록 이끄는 노동이다. 과다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계 노동에서 에너지의 원천인 들과 강, 해와 바람의 힘을 받아들이는 노동이다.


노동자의 재조직: 누가 노동자인가

지난해 초 꿀벌 수십억 마리가 집단 실종됐을 때, ‘꿀벌이 없다면 인류는 4년밖에 더 못 산다’는 오랜 격언이 벌 대신 떠돌아다녔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꿀벌은 식물의 꽃가루받이(수분) 역할을 해 식물이 열매를 맺도록 하기 때문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조사·연구에 따르면 꿀벌은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주요 작물 중 71종의 수분 작용을 돕는다고 한다.1 수박 농사로 유명한 이곳 충북 음성군에서도 비닐하우스마다 벌통을 임대해주는 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 생존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는 꿀벌의 활동을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이라고 부르는가? 식량 위기가 코앞에 닥쳐오기 전까지는 그저 윙윙대는 곤충으로 여겨질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비인간 존재의 노동과 그 노동의 결과물을 이용의 대상, 개발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비인간 노동자의 존재는 아예 지워버린다. 기후위기 시대 악명 높아진 각종 탄(炭)은 나무와 같은 식물이 땅속 깊이 묻히고 오랫동안 지압과 지열을 받으며 만들어진, 우리의 행성 지구의 노동이 깃든 결과물이다. 시적 비유가 아닌 과학적 사실로서 말이다. 엽록소가 있는 식물은 햇빛을 받아들여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물을 이용해 유기물(포도당)을 만들고, 산소를 내보낸다. 이때 이른바 (이산화탄소가 유기물이 되는) ‘탄소 고정’이 이뤄진다. 요즘 자본가들이 탄소중립을 이루겠다며 그렇게 애를 쓰며 만들려고 하는 CCUS(탄소포집·활용·저장장치)는 이미 엽록소라는 자연 식물에 허다하게 있는 미세한 안테나 색소에서 실현되고 있다. 인간 동물이 지구에 살 수 있는 건 엽록소의 노동 덕분이라고 말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막대한 자본과 전기 에너지를 들여 CCUS를 만들 것이 아니라 제주 비자림로에 있는 나무 한 그루 베지 않는 것이 지구와 모두를 위한 길이다.)

생태적인 노동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지탱하고 있는 생태계가 갖는 노동의 지위를 높이고 관찰하고 배워야 한다. 인간이 생태계의 일부이며, 인간의 몸 역시 미생물을 비롯한 다양한 노동자들의 연합임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과학이 확인한 진실을 과학 교과서에 가둘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경제 이론의 중요한 준거로서 여겨야 한다. 비인간 노동자의 노동, 생태계의 노동을 가리기 위해 지배동맹이 지어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다. 그 손바닥의 위용을 업신여기며 과감히 뿌리치는 지구 데모스의 동맹, 지구 노동자의 연대를 만들어 내자.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꿀벌의 노동에, 푸른 식물의 노동에 연대하는 집회를 상상한다. 멸종 위기에 처한 지구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존을 외치는 시위를 상상한다. 지구 생명을 돌보는 노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밑그림을 그려보자. 우리에겐 오직 다른 이의 고통과 죽음에 지금보다 조금 더 예민한 감각을 길러내는 것 외엔 필요한 것이 없다. 낯선 감각이 데려다주는 곳에 함께 손잡고 걸어가자. 온갖 이분법을 부수며, 차별하는 마음을 잠재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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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생태적인 노동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지탱하고 있는 생태계가 갖는 노동의 지위를 높이고 관찰하고 배워야 한다. 인간이 생태계의 일부이며, 인간의 몸 역시 미생물을 비롯한 다양한 노동자들의 연합임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과학이 확인한 진실을 과학 교과서에 가둘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경제 이론의 중요한 준거로서 여겨야 한다. 비인간 노동자의 노동, 생태계의 노동을 가리기 위해 지배동맹이 지어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다. 그 손바닥의 위용을 업신여기며 과감히 뿌리치는 지구 데모스의 동맹, 지구 노동자의 연대를 만들어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