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리얼리스트, 강경애

[혁명을 꿈꾼 여성들]

  1930년대 동아일보에 실린 강경애 사진

한국 근대 여성문학의 출발은 1920년대 나혜석, 김일엽 등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의 여성주의적 시각은 몸의 성적 자유에 치중함으로써 여성해방의 문제를 성 해방과 동일시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925년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결성 이후 문학지형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 근대문학의 방향이 식민지 모순을 극복하는 계급해방의 실현과 외세에 대한 저항을 실천하는 반봉건 반식민의 역사적 과제를 일관되게 견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1930년대 여성문학의 방향도 식민지 사회 내부의 계급구조 모순과 여성의 사회적 실천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강경애다.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네 살 되던 해인 1909년 아버지가 죽자 가족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극심한 가난에 직면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이듬해 이웃 마을 장연에 사는 최도갑과 재혼했고, 강경애는 어머니를 따라 장연으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비루했다. 최도갑은 부유했지만 나이가 많고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봐야 했다. 말이 가족이지 거의 몸종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런지 강경애는 최도갑의 자식들과 종종 싸우면서 원만한 가족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가족에 대한 기억이 어둡고 부정적인 이유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나는 다섯 살에 의붓아버지를 섬기게 되었으며, 의붓아버지에게는 소생 아들딸이 있었으니 그들이 어찌나 세차고 사납던지, 거의 날마다 어린 나를 때리고 꼬집고 머리를 태를 뜯어서 도저히 나는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만 빨래나 혹은 어디 볼 일로 집에
안 계시면 언제나 쫓겨나서 울 뒷산에 올라 망연히 어머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이러한 성장배경은 훗날 그의 작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작품이 가난한 가족의 현실과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가족의 고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서서히 계급문학으로 변모하면서 여성적 체험이 매개 돼 훌륭한 계급문학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1920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 휴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때의 경험은 “불합리한 사회의 질서”의 현실과, 일제 강점기 자본주의적 현실의 본질과 사회적 모순을 인식하게 된 중요한 계기처럼 보인다.

이후 장연으로 내려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양주동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강경애는 양주동을 따라 서울에 와서 동덕여학교에 편입해 1년간 공부했다. 강경애의 창작활동은 1924년 5월 양주동이 참여한 잡지 《금성》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시 〈책 한 권〉을 발표함으로써 시작했다. 이어서 〈가을〉(조선문단 1925년 11월), 〈다림불〉(조선일보 1926년 8월) 등의 시를 발표하지만 사실상 습작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저 문학소녀다운 감성적인 정서를 보여줬다.

양주동과 헤어진 후 장연으로 돌아간 강경애는 친지와 마을 사람들의 냉대를 견디지 못하고 1926년 북만으로 가게 된다. 유교적 도덕과 윤리가 삶의 원칙인 친지들에게 봉건적 관습을 정면으로 비판한 양주동과의 자유연애는 부도덕한 것이었다.

강경애가 간 지역은 북만의 하이린(海林)과 닝안(寧安) 일대인데, 이 지역은 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관련된 지역이며 만주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곳에서 만주항일무장투쟁을 직접 목격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자들과 가까이할 기회도 가졌다. 특히 사회주의자 김봉환을 만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강경애가 사회주의 이념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봉환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강경애 본인도 경찰서에 불려 가는 등 불안한 생활이 지속되자 다시 장연으로 돌아왔다. 장연에서는 직접 ‘흥풍야학교’를 세워 무산계급의 아동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1929년에는 당시 가장 대표적인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강경애는 근우회 장연지회 서무부장으로서 근우회가 주최한 상당한 규모의 야유회에서 개회사를 담당할 만큼 근우회 내에서도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9년 8월 중국 용정시 비암산 기슭에 세워진 <강경애 문학비>

그녀의 근우회 활동은 1929년 10월 조선일보에 발표한 평론 〈염상섭 씨의 논설 『명일의 길』을 읽고〉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작품이 강경애 창작활동의 본격적인 출발이다. 그녀는 염상섭 작품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지적하면서 부르주아 문학을 맹종하는 소부르주아지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드디어 1931년 1월 조선일보에 발표한 단편 소설 〈파금〉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파금〉은 평론 〈염상섭 씨의 논설 『명일의 길』을 읽고〉에서 보여준 민중에 주목하는 문학관의 구체적 형상화다. 민중의 문제를 작품세계에 끌어들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이러한 강경애 문학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본인이 겪은 북만에서 경험과 근우회의 여성주의 노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근우회는 여성차별의 역사적 원인이 사유재산 제도에 있다고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을 해결해야만 비로소 여성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낡은 질서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유일한 계급이라고 규정했다. 이와 같은 근우회의 입장과 노선은 1930년대 여성문학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이념적 지표가 됐다.

그리고 장연 군청의 서기로 있던 장하일과 결혼했다. 장하일은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해방 이후 북조선노동당 황해도 대표, 노동신문사 부주필 등 고위 관료를 지낸 것으로 보아 강경애와 결혼 생활 당시에도 사회주의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강경애는 또 한 사람의 사회주의자를 만나게 된다. 장하일의 동향 친구 김경재다. 김경재는 조선사회주의 운동의 하나 분파인 화요파의 대표적 이론가로 강경애의 문학작품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강경애의 문학작품에 영향을 준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주의자였다.

강경애는 특히 그녀의 남편 장하일을 정신적 지주로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언제나 글을 쓰게 되면 맨 – 먼저 남편에게” 보이고, 그의 평가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남편의 인정을 바랐다. 장하일이 곁에 없는 상태에서의 집필은 매우 답답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그녀는 창작활동에서 남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장하일과 결혼한 강경애는 1931년 6월경 장연을 떠나 인천에 잠시 머물다 간도로 가게 됐다. 이때부터 신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1940년 초까지 간도에서 줄곧 생활하고 문학활동을 펼쳤다. 강경애는 간도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자기 작품에 반영했다. 따라서 소설의 주인공은 사회 최하층에서 천대받고 멸시받았던 봉건적 여성과 농민, 노동자들이었다.

첫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1931)을 통해서는 식민지 시대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드러내는 한편 가부장적인 상황 속에서 여성이 남성 의존적인 태도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며 여성 해방의 가능성을 조명하고 있다.

간도 이주 후에 쓴 첫 소설 〈그 여자〉(1932)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면서 각성한 농민에 주목하였다. 〈동정〉(1934)에서도 지식인의 소시민성을 중점적으로 비판한다. 지식인의 비판에서 더 나아가 여성의 계급적 각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소설은 〈원고료 이백원〉(1935)이다. 입으로만 부르짖는 사회주의 작가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성찰적 작가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강경애의 소설에서 처음으로 간도의 농민을 작품의 전면에 등장시킨 것은 〈채전〉(1933)이다. 이 작품은 착취자에 대한 피착취자들의 조직적인 투쟁은 승리를 거둔다는 이념이 생경하게 드러나 있다. 〈채전〉도 그런데 〈지하촌〉(1936) 같은 완성도 높은 단편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지하촌〉은 ‘빈곤의 여성화’라는 제3세계 여성의 상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가장이 없는 상태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존재가 바로 여성들이다. 〈어둠〉(1937)은 일제의 검열 아래 감히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간도 공산당 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소설이다.

《인간문제》(1934)는 인천을 주요 배경으로, 계급의식의 현실이 매개된 작품이다. 식민지사회 농촌에서의 소작농과 지주의 대립 그리고 도시에서의 노동자와 공장감독의 대립이라는 갈등 구조를 기본 축으로 하고 있다.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식민지 여성 모순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성폭력을 여성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자각하는 중요한 계기로서 제시했다. 젠더에 따라 계급투쟁이 가지는 의미의 차이를 나타냈다. 여성의 계급적 각성을 통해 사회주의 여성서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무엇보다 사회의식과 여성의식의 적극적인 결합을 바탕으로 계급성과 여성성의 총체적 구현을 실현하고자 했던 강경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모순의 총체적 공간으로서의 간도의 현실을 하층계급 여성의 삶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중편소설 〈소금〉(1934)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일제가 간도에서 감행한 무자비한 토벌은 농민을 각성시켰고 각성한 농민은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줬다. 여성이 홀로 노동과 양육을 감당하기란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이 작품 또한 강경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강경애는 1944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짧은 생애 동안 두 편의 장편소설과 20여 편의 단편소설 그리고 평론과 수필들을 남겼다. 강경애의 문학은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일관성 있게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모순을 해결할 주체와 실천을 추구했다. 강경애는 사회주의적 이념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을 창작했다. 때문에 강경애가 카프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이라면 그녀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참고문헌〉
배상미, “식민지시기 무산계급 여성들의 사적영역과 사회변혁”, 《상허학보》 44집, 2015.
배상미, 《혁명적 여성들》, 소명출판, 2019.
이덕화, “강경애의 작품 속에 나타난 계급의식과
여성성의 길항관계”, 《현대문학의 연구》 No.37, 한국문학연구학회, 2009.
이상경 편, 《강경애 전집》, 소명출판, 2002.
전국국어교사모임, 《강경애를 읽다》, 휴머니스트, 2021.
최학송, 〈강경애 소설의 주제와 변모양상 연구〉,
인하대 대학원 한국학과 문학박사학위논문, 2009.
하상일, “식민지 여성의 현실과 사회주의 여성서사”, ≪비평문학≫ 22호, 한국비평문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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