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호/기획특집>'스포츠 노예'들의 인간선언

기획/프로야구선수회
'스포츠 노예'들의 인간선언
구단주 전횡으로 '계약의 자유' 박탈, 직업선택권까지 침해
KBO, 와해공작으로 일관…프로스포츠 '노사관계' 시험대

힘든 출발이었다. 가시밭길은 길기만 하다. 그러나 끝까지 간다. 가시밭길 끝에는 '야구하는 기계'가 아니라 진정한 스포츠맨으로 다시 태어난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지난 1월22일 여의도 63빌딩에서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선수권익보호를 위해 자주적으로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선수회·회장 송진우)를 결성하며 '인간선언'을 했다. 보류제, 트레이드, 드래프트(지명제), 연봉제에 묶인 이들은 지금까지 '현대판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선수회 출범은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장하기까지 했다. 선수회는 대표 8명이 '구단의 방해로 동참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참석할 때까지' 무기한 농성을 선언한지 몇 시간만에 어렵사리 창립총회에 성공하는 산고를 겪었다. 그럼에도 이 시작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이들이 드디어 주인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총회장을 가득 메운 야구팬 3백여명과 선수 75명의 가슴은 홈런을 날리고 있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총재 박용오)와 구단의 일방적인 전횡을 단번에 담장 밖으로 날려 선수들을 위한 새로운 그라운드를 만들겠다는 멋진 타구였다.
KBO와 구단의 계약파기, 재계약거부, 경기출장 금지 등 엄청난 탄압과 심하면 선수생명을 끊는 제명조치까지 예상되는데도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선수회를 결성하게 됐을까.

이들은 자신들을 '노예'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선수계약부터 자유계약의 원칙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선수회 결성을 지원해온 한 관계자는 "KBO가 정한 통일계약서에 따른 계약이 강제돼 계약방식을 자유롭게 고를 수도, 계약내용을 바꿀 수도 없는데다 드래프트제·보류선수제에 의해 일정 구단과 계약을 체결토록 돼있어 계약상대를 고를 자유조차 없다"고 전했다.

반면 KBO와 구단쪽은 "경기가 재미없으면 관객이 몰려들지 않는다"며 "우수선수를 각 구단에 적절히 배분해야 하기 때문에 계약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도 이같은 제도를 운용하고 있으나 한국과 달리 선수보호장치가 마련돼 있어 사정이 다르다. 그 내용이 너무 지나쳐 직업선택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같은 족쇄를 걷어내기 위해 지난 80년대와 96년 최동원(롯데)과 이상훈(LG) 주도로 노조결성이 시도된 바 있다. 그러나 KBO와 구단의 집요한 방해로 모두 좌절을 겪어야 했다. 미국에서 동계훈련중인 이상훈은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뭉쳐 선수들의 권익을 꼭 찾게 되길 바란다"며 "방법만 있다면 꼭 동참하겠다"고 선수회를 격려하기도 했다. 이밖에 박찬호·이종범 등 해외진출 선수 대다수도 선수회에 대한 격려와 지지를 표명했다.

그럼에도 KBO와 구단의 탄압으로 선수회의 장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 삼성선수들이 불참을 선언하고 현대소속 42명이 단체가입 하룻만에 모두 탈퇴하는 등 조직확대에 난관을 겪고 있다. 최대 1백32명까지 확대됐던 가입자수는 27일 다시 52명으로 줄었다.

KBO와 구단주들은 동료선수들까지 동원해 선수회의 와해를 꾀했다. 김기태(삼성), 이호성(해태) 등 4개 구단 주장들은 24일 KBO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기획단을 이끌고 있는 권시형(새천년 민주당 정책전문위원)씨가 선수들에게 접근해 선수회 창설을 권유했다"며 "대부분의 선수들이 기획단의 실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1차 가입원서에 서명했을 뿐만아니라

선수회도 선수보다는 사업에 초점을 맞춘 기획단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이 말하는 기획단이란 창립총회까지 선수들을 도와 자문활동을 했던 변호사, 교수, 체육인 등과 스포츠마케팅회사인 SM1 관계자들이다. 이날 회견의 여파로 선수회는 25일 기획단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앞서의 관계자는 "기획단은 자발적으로 선수회 창립을 도왔을 뿐 이권개입이니 조종이니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매도"라고 항변했다.

그렇다고 선수회의 장래가 마냥 비관적인 건 아닌 듯하다. 국민여론이 선수회를 전폭 지지하고 있으며,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도 KBO와 구단의 선수회 탄압을 비난하고 나서는 등 여론은 확실히 선수회 편이다. 네티즌들도 선수회지지위원회를 구성했다. 선수회 송진우 회장과 양준혁은 각각 1천만원을 선수회에 기부했다. 이들은 "이 기회에 선수들에게 불리한 각종 제도들이 철폐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면서 "현역선수를 그만둘 각오를 하고 임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다고 한다.

한편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선수 대다수가 1천4백만∼1천7백만원의 연봉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인간으로서의 기본권도 유린돼왔다. 선수회 설립은 이같은 '야만적 대우'에서 벗어나기 위한 당연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프로야구 선수회의 설립은 그 성공여부에 따라 축구, 농구 등 다른 프로스포츠 종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 점에서 프로야구선수회의 운명은 프로스포츠 분야 '노사관계'의 내일을 가늠할 시험대라 할만하다.
정경은 joungke@kctu.org

태그

선수회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편집국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