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콜비츠 3

케테 콜비츠에 대한 마지막 글로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일상의 그림들, 조각, 그리고 자신과 대화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세계와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살펴본다.

독일 제국의 선거를 앞둔 1932년 7월 18일, 케테 콜비츠는 아인슈타인, 하인리히 만, 아놀드 츠바이크 등과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좌파들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히틀러가 제국의 수상으로 선출되자 1933년 2월 5일 두번째의 ‘긴급호소!’를 발표하였다.

사민당과 공산당이 반파시즘 전선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의 대변인은 아인슈타인이었고, 콜비츠 부부, 하인리히 만 등이 함께 하였다. 케테 콜비츠와 하인리히 만은 2월 15일 프로이센 아카데미를 탈퇴하였다. 그리고 하인리히 만은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콜비츠는 ‘국내망명’생활에 들어갔다.

1936년에 당국으로부터 전시 금지통보를 받고, 아카데미 전시회의 ‘쉴뤼터에서 현대에까지 이르는 베를린 조각가 전’에서 바를라흐와 레브루크의 작품과 같이 그의 어머니상과 소형 청동부조가 전시회장 밖으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 작품은 파괴되지 않을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1942년에 아들 페터의 이름을 가진 손자 페터를 2차 세계대전에서 잃으면서, 1914년 아들을 잃은 고통을 다시 한번 짊어지게 된다.

<죽음>연작을 마친 10년이 흐른 1945년 4월 22일 드레스텐의 모리츠부르크에서 그가 갈망하던 ‘떠남’이 이루어진다. 그의 죽음은 독일이 완전히 붕괴된 이후 사망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1944년 7월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며 자신의 삶을 담담히 되돌아보며 삶을 마무리했다.


[죽음]연작

작품속에서 죽음을 직접 해골로 묘사했던 그는 1934년과 1935년에 집중적으로 죽음을 주제로 작품을 하였다. <죽음> 연작은 여덟개의 판화로 구성되었고, 1934-1937년에 인쇄되었다.

일생동안 “죽음과 대화했다”는 케테 콜비츠는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죽음>연작을 하면서 “죽는다는 것, 그것은 나쁘지 않다”할 정도로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1935년에 자신의 묘지에 쓸 부조까지 제작하였다.

<소녀를 무릎에 앉힌 죽음, 석판, 1934>. <죽음이 덤벼들다, 석판, 1934>, <부랑자의 죽음, 석판, 1934>에서의 두려움이었던 죽음이 <친구로서의 죽음, 석판, 1934-1935>,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1934>, <죽음의 부름, 석판, 1934-1935>에서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대상(친구)이 되고 있다.


그림1 <소녀를 무릎에 앉힌 죽음, 석판, 1934>



그림2 <죽음이 덤벼들다, 석판, 1934>



그림3 <친구로서의 죽음, 석판, 1934-1935>
여인은 죽음을 신뢰한다. 죽음은 친구가 되었다



그림4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1934>



그림5 <죽음의 부름, 석판, 1934-1935>
케테 콜비츠의 어깨에 죽음의 손이 얹혀있다.


플랑카드 및 포스터

케테 콜비츠는 <우리가 소비에트를 지킨다, 1932>, <러시아를 도우라!> 등 국제적 연대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과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석판, 1924>, <빵을!, 석판, 1924> <시립보호소, 석판, 1926>,< 살아남은 자들, 석판, 1923> 등등의 독일 노동자계급의 처참한 상황을 고발한 작품,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일하는 부인, 석판, 1927>, <어머니에게 안겨있는 소년, 석판, 1931>, <노부부, 목탄, 1932년경>, <담소하는 두여인, 1930>, <어머니와 아이, 펜과 수채, 1934>, 등의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을 잔잔히 그리는 등 다양한 접근을 통해서 그에게 내재되어 있는 정치사상적인 지향을 담아내었다.

특히 <러시아를 도우라!, 플랭카드, 1921>는 ‘국제 노동자 자조회’의 청탁을 받고 제작한 작품이다. 러시아의 볼가강에 혹심한 가뭄이 휩쓸고 지나가자 레닌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연대를 호소했다. 당시 독일의 반동적 정치분위기 속에서 제작되었다. 케테 콜비츠의 예술적 당파성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1921년 9월 12일자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러시아의 극심한 기근에 맞서 싸웠다. 다시금 내 의지를 거스르며 정치에 개입하였다. 쓰러져가는 한 남자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치는 내용의 플랑카드를 그렸다. 잘되었다. 다행이다.”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석판, 1924>는 인플레이션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다시 한번 국제노동자 자조회의 청탁을 받고서 제작한 것이다. 이 당시의 극심한 경제상황과 사회상황을 1923년 11월의 일기에 적고있다.
“ 모든것이 극단화되고 있다. 약탈과 학살이 횡행하고 있다. 바이에른은 북독일과 교전상태다. 기아! 빵 한 조각에 1조 14억이라니! 그러다가 800억으로 하락했지만...”
이 그림의 어린아이들의 눈빛과 모습은 당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어린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빈 그릇을 치켜들며 먹을 것을 달라고한다.


그림6 <우리가 소비에트를 지킨다, 1932>



그림7 <러시아를 도우라!, 플랭카드, 1921>



그림8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석판, 1924>



그림9 <빵을!, 석판, 1924>



그림10 <담소하는 두여인, 1930>


또한 그는 “다시 태어나면 조각을 하겠다”고 할 정도로 조각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초기 조각작품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오래된 사진으로나 볼수 있다. 남아있는 작품으로는 <부모>외 일곱 점의 조각이 전부이며, 시기도 추정하기 어렵다. 그의 조각은 대부분 시간을 많이 투여한 작품들로 <부모>는 1915-1932년 까지 17년의 긴 시간이 걸렸고, <쌍둥이와 어머니>는 1924-1937년 까지 13년이 걸렸다.

“형식은 사실적이어서는 안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형식과는 전혀 다른 무엇일 수도 없다. 형식은 정제되어야만 한다.”는 그에게 맞는 형식이 바로 <부모>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콜비츠는 에른스트 바를라흐와 예술적인 교류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그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귀스트로프의 천사, 1927> 작품의 얼굴은 케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바를라흐는 “그 천사의 얼굴을 보면 케테 콜비츠가 떠오르네. 애당초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만일 처음부터 의도했던 거라면 실패했을 걸세.”라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고있다.

바를라흐가 1938년 10월에 죽은 후 케테는 “때때로 나는 고인이 된 바를라흐가 제게 자신의 축복을 남겨두고 간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나는 작업을 잘할 수 있다. 계속해서 자극을 받고 있다.”는 일기를 적고 있다. 이 당시의 작품으로 <애도,1938-1939>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과 고통, 고뇌를 억누르는 두손으로 답답하고 슬픈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 히틀러 정권하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그림11 <부모, 1915-1932>



그림12 <쌍둥이와 어머니, 1924-1937>
동베를린의 케테콜비츠 거리의 옛집에 보존, 유일한 나신상.
그의 조각 중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풍만하고 성숙한 형식과
완결성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13 <애도, 1938-1939>



그림14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귀스트로프의 천사, 1927>


ET 같은 케테 콜비츠

100여점의 자화상을 남긴 케테콜비츠는 당시의 조류와는 달리 자기과시나 여성임을 강조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였다.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하면서, 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자신을 지켜 온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자화상은 그의 생애를 꿰뚫는 하나의 심리적 이정표임을 알 수 있다.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그의 삶의 깊이가 느껴지며 항상 무덤덤하고, 말도 웃음도 없이, 외부로부터의 고통과 내부로부터의 고통과 싸우는 자신의 힘겨움이 묻어나 힘겨운 그를 살짝 안아주고 싶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살아있는 그를 만난 듯 하다. 그리고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은 1914년 아들 페터의 죽음 이전과 이후의 자화상의 느낌이 다르다. 그의 자화상을 통해서 느길 수 있는것은 그의 작품은 그의 사상과 그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의 케테는 외계인처럼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림15 <두개의 자화상, 동판, 1892>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자화상


그림16 <테이블 앞의 자화상, 동판, 1893>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들>을 본 시기인 작품으로 젊은 케테의 날카롭고 이성적인 눈은 저돌적인 인상을 준다.



그림17 <이마에 손을 얹은 자화상, 동판, 1910>
거친 선으로 표현한 첫번째 이마에 손을 얹은 자화상



그림18 <자화상, 목판화, 1924>간결한 선으로 밝은 면만을 나타낸 자화상


그림19 <자화상, 크레용화, 1924>



그림20 <이마에 손을 얹은 자화상, 1920년경>
이 자화상은 케테의 자화상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1925년 목탄으로 그린 자화상과 흡사한 이미지로 이마에
손을 얹고 있는 형상이다.



그림21 <자화상, 목탄, 1934>너무나 지쳐있는 자화상



그림22 <왼쪽을 향한 옆얼굴. 석판, 1938>
온갖 풍파를 겪은 작가가 그대로 걸어나온 듯 조금은 기운이
빠져나간 모습으로, 여전히 고집스러운 내면이 드러나 보이며
케테의 특유의 구부정한 모습이 표현되어있다.



그림23 <칼 콜비츠와 함께 한 자화상, 목탄, 1940>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채 나란히 앉아있는 부부.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케테콜비츠



민중의 고통스런 삶을 통해 희망을 그린 케테콜비츠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삶의 고통과 저항, 그리고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시각이다.
민중의 편에 서지 않으면, 여성이 아니면 그리고 어머니가 아니면, 내면 깊숙한 철학이 없이는 표현 할 수 없는 그 만의 독특한 창작방법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방직공의 노래, 인터내셔널, 게오르그 베르스의 시와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칭할 수 있는데, 그의 예술방법은 실제적인 삶과정을 재현하고 삶 자체의 형식으로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조형예술작품 고유의 정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역동성과 역사적 발전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이것은 여타의 지식인들이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관념으로서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을 벗어나 사회주의 ‘전형’을 창출한 것이다. ‘아름다운’빛을 띠고자 하는 부르조아 예술의 결점을 간파한 것일까? ‘아름답지 않은’ 그의 작품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미(美)’를 간직하고 있으며, 어두운 주제가 오히려 행복해보이는 주제를 다룬 작품보다 더 많은 힘과 긍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고 그림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케테 콜비츠는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불어넣어 준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예술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케테 콜비츠 자신이 사상적 동요를 부끄러워하며 노동자계급 예술가라는 영예를 거부한다 해도 역사는 기꺼이 그에게 그런 영예를 부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1936년경 독일에서 활동금지를 받아 케테콜비츠가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시류를 거슬러 부단히 활동하고자 했다. 케테 콜비츠는 러시아에서 ‘탁월한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대명사’로 불렸다. 소련의 독일망명작가들이 발행하는 <말> 1월호에는 송가형식의 ‘생일축하’기사까지 있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그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작품전을 열고자 제의하였고 콜비츠작품 수집가인 뉴욕의 에리히콘은 미국이민까지 주선할 정도였다. 중국의 노신은 ‘이 위대한 여류예술가는 오늘날 침묵을 선고받았지만 그 작품은 점점 극동에까지 퍼지고 있다. 예술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판화는 중국의 목판화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일일히 나열하지 않아도 그의 영향은 전세계적으로 지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각 어느 노동자는 케테 콜비츠의 작품 하나로 새 의지을 잡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우리의 곁에 살아있다.

이 시대를 진취적으로 살아가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케테콜비츠의 장점을 아는것 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의 한계까지를 이해하고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현재의 필자로서는 감히 그의 삶을 평가하기에 너무 부족하다는 자괴감만 들 뿐이다. 그의 반 만큼이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금 필자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 그의 삶과 예술은 진실로 나 자신을 낮추게 한다. 그리고 그의 장점만이 아니라 그의 한계까지 안을 수 있게 해 준다. 가슴 뭉클하게 전해져오는 그의 삶과 예술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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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osee

    ■ 전시제목 : Kaethe Kollwitz
    - Oliginal und Reproduction-
    ■ 전시기간 : 2006년 5월 10일(수) ~ 6월 6일(화)
    ■ 장 소 : Gallery Godo, Seoul
    ■ 기자간담회 : 2006년 5월 10일 오전 10시부터~
    ■ 오 프 닝 : 2006년 5월 10일 17:00시
    ■ 교 통 편 : 지하철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안국로터리 한국일보방향 15 m
    ■ 내용 문의 : Tel. 02 720 2223 H.P. 011 9498 0258
    ■ 후원 : 주한 독일대사관
    이번 전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20세기 독일의 판화가인 캐테콜비츠(1867~1945)의 드로잉과 판화작품을 우리 화단에 처음 소개하고 원작을 감상할 기회를 가지며 그녀의 명성만큼이나 진한 감동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람 바랍니다
    더 많은 이미지등의 자료를 원하시면 아래에 주소에서 다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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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하니

    이것저것 구글에서 사진검색을 하다가..
    케테콜비츠의 사진을 보고 울컥하고 갑니다..
    좋은 그림, 이렇게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회 다시한번 했으면 좋겠네요..
    사무실에서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 이은지

    좋은자료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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