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국가보안법만 폐지하면 되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법무부장관과 국회의장에게 공식 권고하고, 뒤를 이어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리고, 열린우리당 의원의 다수가 폐지를 주장하는 상황이어서 국가보안법 폐지 여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국가인권위는 24일 하루 전에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국가보안법 태스크포스팀의 연구와 실태조사, 공청회 결과 등을 검토한 결과, "국가보안법이 제정 과정에서 국민여론을 수렴하지 못하고, 법적으로 죄형법정주의와 행위형법에 위배되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제사회에서 그동안 수 차례 국제인권규약에 위배된다는 등의 이유로 우리 정부에 개폐를 권고한 점을 고려해 폐지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26일 제7조 1항(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하는 행위), 제7조 5항(반국가활동을 할 목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제작 소지하는 행위) 규정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한편 열린우리당의 '국보법폐지의원모임'이 82명의 의원을 포함해서 여야 의원 102명의 서명을 받았다. 전체 의원 과반수 서명을 받아 다음 주쯤 폐지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폐지가 열린우리당의 당론으로 결정나고, 다음 주 국회에 제출되면 민중의 숙원이었던 국가보안법 폐지가 마침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1월 발생한 여순 사건을 계기로 좌익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서둘러 제헌의회에서 제정되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모체로 구성됨에 따라 일제 잔재가 법적으로도 계승되었다. 국가보안법은 독재정권의 체제 유지 수단으로 위력을 떨쳤다. 민중운동 탄압의 첨병으로, 인권 유린과 인간성 말살의 무기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인륜적 법으로 한국 현대사를 종횡무진 군림해왔다. 이윽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더 이상 부침을 하지 않고 이번 국회에서 반드시 폐지 결정이 나야 한다. 민의를 받드는 국회의원이라면 반드시 폐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폐지된다면 그것은 국가보안법으로 피해를 입었던 많은 사람들,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해 싸워 온 모든 사람들의 공과로 돌려야 한다.

제1 지배정당의 의원 다수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고 나선 것은 좋은 일이다. 그들 중에도 국가보안법의 직간접적 피해자가 많았던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제1 지배정당과 개혁세력이 국가보안법 폐지로 올인하는 데는 또 다른 정치적 배경도 작용한다. 지금까지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은 여러 국정 현안 처리 과정에서 무능력한 모습이었고, 결정적으로 파병 강행으로 보수세력과 별 차별을 보이지 않았다. 신기남 의원 당의장직 사퇴와 과거사 청산 논란이 이어지면서 보수세력과 개혁세력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은 과거사 청산 시도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해 보수세력과 차별을 부각함으로써 바닥에 떨어진 개혁 이미지를 살려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독립 운동과 역사 재평가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개혁, 언론개혁 등과 마찬가지로 과거사 청산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해 보수세력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보이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열린우리당 주도의 국가보안법 폐지 추진에는 심각한 모순과 역설이 작용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반인권, 반인륜, 반민중적 수단으로 더 이상 존치되어서 안 된다는 생각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건지 아닌지가 의문스럽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로 폐지되어야 한다면 다른 반인권, 반인륜, 반민중적 법안도 동시에 폐지하는 게 온당할 진데, 지금 대한민국에는 국가보안법의 반인권, 반인륜, 반민중적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는 개악 집시법과 추진중인 테러방지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국가보안법이 인권을 유린하고, 인간성을 말살하고, 민중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더 이상 존치되어서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개악 집시법과 테러방지법 추진도 동시에 폐기 처분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저질러온 해악과 비교할 때 개악 집시법과 테러방지법 추진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 또는 국가보안법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렵게 어렵게 여기까지 몰고 온 국가보안법부터 일단 폐지하고 보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형법으로 대체되고, 개악 집시법이 거리를 휘젖고, 테러방지법 추진으로 공포를 조장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국가보안법 폐지는 진정으로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주지하듯 개악집시법은 작년 하반기 열사의 투쟁과 농민, 빈민의 투쟁이 고조되자 등장하었다. 16대 국회는 경찰청의 자문을 받아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의원입법으로 제출된 개악 집시법을 한달 열흘만인 지난해 12월 29일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개악 집시법은 여러 모로 위력을 발휘했다. 올 들어 지난 5월까지 개악 집시법에 따른 '불법폭력시위'는 2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43건에 비해 절반 정도였지만, 현장 검거와 연행자는 되레 75%나 증가하였다.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심각한 개악 법안이 아닐 수 없다.

테러방지법 추진은 더욱 심각하다. 역시 열사 투쟁 국면이자 미국의 추가 파병 요청 이후 파병 반대 여론이 고조되던 작년 11월에 등장하였다. 국가정보원이 입법 예고한 테러방지법안은 테러의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인권침해의 소지가 다분한 데다, 국정원의 지나친 권한 확대 등으로 가히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고 불러도 될 충격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테러방지법은 11월 27일 국무회의에 상정 의결되어, 정부입법으로 국회에 상정된 상태다. 미국 애국법의 아류로 지칭되는 테러방지법은 아직 국회 의결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6월 김선일 씨의 죽음 이후 파병 반대 투쟁이 확산되자 다시 고개를 내민 적이 있었다. 테러방지법 추진 목소리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열린우리당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지하듯 국가보안법은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하고, 이번 국회에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국가보안법 폐지 그 자체를 보기보다, 폐지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함께 보아야 한다. 반인권, 반인륜, 반민중적 법안이었다는 사실을 핵심 문제로 삼는 게 맞다면, 국가보안법과 함께 개악 집시법과 테러방지법 폐지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국가보안법의 반인권, 반인륜, 반민중적 속성이 개악 집시법으로, 테러방지법 추진으로 온전하게 이월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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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 집시법 , 폐지 , 테러방지법 , 조삼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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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꼭두각시

    글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