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삶에서 글을 길어올리는 사람, 추송례

[박수정의 사람이야기](1) - 일하는 사람이 글을 쓰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10월 7일 저녁, 구로 시장 안에 있는 <삶이 보이는 창>의 작은 교육관에서 제2기 여성노동자글쓰기교실 첫 강의가 있었습니다. 첫 강의의 제목은 '노동과 삶에서 길어 올린 글'이었고 강사로 나선 분은 추송례 씨였습니다.

부산에서 20년 넘게 사는 추송례 씨는 오랜만에 서울길을 나섰습니다. 고향 완도를 떠나온 지 벌써 3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이는 고향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향말을 잊지 않은 것처럼, 아니 버리지 않은 것처럼 추송례 씨는 1975년 '동일방직'을 다니면서 처음 만났던 '전태일'도,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도 버리지 않았고, 잊지 않았습니다.

17살, 노동자가 되어

전남 완도가 고향인 추송례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든 땅을 한번 밟아보았으면 했습니다. 섬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 점점이 뚝뚝 떨어져 있는 섬들을 바라보면서 저 섬들에도 자기처럼 뭍으로 나가는 꿈을 꿀 어떤 사람이 있겠거니 했답니다. 그것은 바람난 처녀애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삶이 그이로 하여금 땅을 그리워하게 했습니다. 완도에 다리가 놓여져 땅과 이어졌을 때 그이는 인천으로 올라왔습니다.

인천에 처음 올라와 한두 달 일했던 곳에서는 단지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주인은 '돈 안 받고 기술까지 가르쳐 주는 게 어디냐'고 했습니다. 다행히 2만 명이 일하는 대성목재주식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12시간, 14시간 동안 힘든 일을 하고 한 달 뒤 받은 돈은 1만 원이었습니다. 보리 섞인 쌀 한 말을 넉넉히 살 수도 없는 돈이었습니다. 방세에 전기세, 수도세 등 붙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심지어 집에 들르는 친구들 머릿수까지 세어 오물세를 받아내는 집주인이었습니다. 고향에서 조그만 배로 고기를 잡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돈을 모아 전동기라도 달아드려야지 했는데, 20리나 되는 학교 길을 걸어다니는 동생한테 자전거를 사줘야지 했는데, 그 꿈이 힘든 노동을 견디게 했는데 아무리 일을 해도 그 꿈은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절망에 빠져드는 생활이었습니다. "17살에 미래를 생각하니 한숨밖에 안 나왔다"고 합니다. 땅만 밟으면 세상이 훤히 열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마음을 다지고 있을 때 그이는 동일방직의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동일방직은 당시 인천에서는 꽤 알아주는 회사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려고 노동자들이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요. 3교대 근무로 8시간을 일하니 일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점심까지 주니 추송례 씨는 이런 조건이 어디에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게 느껴진 근로조건은 회사가 거저 만들어 준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로 여성 지부장을 당선시켰던 곳,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운영했던 곳, 바로 동일방직은 노동자들이 단결과 투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추송례 씨한테는 꿈만 같은 곳일 수 있었습니다.

1975년, 추송례 씨가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10%를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싸웠습니다. 추송례 씨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만한 조건이면 됐지 거기에다 10%를 더 올려달라니 말도 안 되었습니다. 마치 도둑놈 심보 같았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함께 싸우지 않았습니다. 단지 참 희한하다 싶어서 구경만 했습니다. 현장에 배치되기 전에 회사에서 6개월 동안 기술교육을 한답시고 '노조는 나쁜 거다, 절대 노조 사무실 앞으로는 지나다니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수줍음 타고 얌전하기만 하던 보잘것없어 보이던 동료 노동자들이 당당하고 힘있게 주먹을 내 뻗으면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추송례 씨의 눈에는 신기했습니다. 동료들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임금이 10% 인상된 겁니다. 조금도 힘을 보태지 않았는데 자신의 임금도 10% 올랐습니다. '너나 내나 하나 하나 떼어놓고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큰 힘이 나오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추송례 씨는 노동조합에 미쳤습니다.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노조 사무실을 들렀다가 일하러 갔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꿈꾸기를 배워버린 노동자

"동일방직은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다. 대성목재에 있을 때는 절망적이었던 삶이 동일방직에서 노동조합을 알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과 만족을 주는 삶으로 바뀌었다. 민주적인 조합의 가치를 알게 되고, 우리도 인간이다라고 외칠 수 있으면서 삶이 바뀌었다. 오늘은 힘들었어도 내일은 나아질 거야, 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분명 똑같은 현실이었는데 의식이 바뀌면서 희망이 생기더라. 단결과 투쟁만이 우리를 둘러싼 억압과 착취에서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겼다."

1975년, 추송례 씨는 '전태일 노트'를 만납니다. '노동운동의 교과서'인 전태일 평전. 지금은 책으로 나왔지만 그 당시는 필사본으로 일일이 손으로 베꼈다고 합니다. 추송례 씨는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닳도록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좁은 자취방 구석이거나 기숙사 한 구석이거나 그 필사본을 손에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온맘으로 읽어냈을 그이와 친구들, 실을 만지던 손으로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옮겨내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던 그이들의 모습을.

"전태일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늘 전태일의 눈으로 보려고 하고, 전태일의 가슴으로 생각하려고 했지. 전태일을 그렇게 사랑했나봐. 지금도 내 안에 그 사람이 있어.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날마다 꿈을 꾸게 했지. 그 사람이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 사람이 꿈꾸었던 아름다운 세상이 같이 봐지고."

전태일의 삶이 변화시킨 삶이 어디 추송례 씨뿐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을 알면서 전태일이 꿈꾼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지요. 전태일을 안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추송례 씨는 전태일에게서 배운 '사람을 사랑하는 법'과 '꿈꾸기'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득이 나는 일을 할라치면 전태일이 만들고자 했던 '모범적인 피복업체' 계획서가 떠올라 그러지 못합니다. 공장 계획서 내용을 낱낱이 기억하는 추송례 씨.

추송례 씨는 전태일 열사처럼 노동자로서 사는 자신의 삶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땅의 노동현실을 깨닫게 된 동일방직에서의 삶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안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이해시키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삶을 기록해 두었는데 지금은 그 공책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노동운동을 한다는 건 거의 목숨을 내거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70년대와 80년대가 추송례 씨가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추송례 씨는 동일방직에서 해고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공장에 들어갔다 하면 사흘이 멀다 하고 쫓겨났습니다. 블랙리스트는 추송례 씨와 동료들을 우리 나라 어느 공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할 수 있는 권리마저 철저하게 빼앗은 나라입니다. 멀리 부산으로 내려가 신발공장인 '삼화고무'에서도 일하고 화장품 판매원으로도 일하고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은 것은 노동자들을 만나고 모으고 함께 고민하는 일이었습니다. 추송례 씨는 그런 자신의 운명이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라는 운명'인가 보다고 합니다. 안 해 본 일 없고, 안 싸워본 일 없는 추송례 씨는 이제 세상에 두려울 것 없이 단련된 한 인간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잡혔다 하면 뭔가 기록해놓은 건 단서가 될 만한 건 다 불태우고 도망가야 했어. 몸 하나만 잘 챙겨야지."

어느 한 곳에 안정적으로 터를 잡을 수 없는 생활. 추송례 씨는 가방 하나만 들고 공장에 들어갔다 쫓겨나면 다시 나와야 했고, 노동운동을 하는 동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도망가야 했습니다. 도망가기 전에 싹 다 불태워야 했던 소중한 삶의 기록들, 노동의 기록들. 아마 그렇게 불태워진 삶의 기록은 추송례 씨만 겪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는 그렇게 사라진 기록들, 사라져야만 했던 기록들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 기록들이 복원되어야겠지요.

가장 힘없는 약자가, 노동자가 글을 써야 한다

부산에 내려가 사는데 동일방직 노조를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된 회사와 한 통속이었던 섬유노조 본조의 위원장이었던 김영태가 통일주제 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출마한다고 했습니다. 추송례 씨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낙선운동에 나섰습니다. 김영태가 노동자들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적은 유인물을 만들어 곳곳에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길로 추송례 씨는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 그이가 들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이 글을 누가 썼는지 불어라."

유인물의 글을 쓴 사람은 바로 잡혀온 추송례 씨인데 글을 쓴 사람을 불라니요.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아무리 내가 썼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 나는 생각할 줄 알고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인데 그걸 인정해 주나. 지금도 그렇지만 30년 전, 20년 전에 여공은 사람도 아냐. '너, 니 이름 석자라도 쓸 줄 알아?'라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무식한 노동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이었어. 하도 억울해서 '종이와 펜을 달라, 당신들 앞에서 글을 써보이겠다'고 했지. 고문을 당해 연필도 못 잡을 정도로 손가락이 퉁퉁 부은 지경에서도 내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했어. 내 안에 든 울분을 흰 종이에 털어놓았지. 분위기가 바뀌더라. 그제서야 내가 좀 사람으로 보였던 거야.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드니까, 저 사람이 날 인간으로 느끼는구나 하니까 고문당할 때는 이를 악물어 눈물 한 방울 안 났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라."

몸을 움직여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누군가는 '생각이 없다', '생각할 줄 모른다'고 얕잡아 보는 세상이 예전에 추송례 씨가 살았던 세상이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하며 힘겹게 세상과 맞부딪치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세상을 깊게 읽어내고 세상을 말할 줄 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책상머리에서 짜낸 생각이나 글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생채기 내며, 세상과 삶에 배반당하며 산 사람들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너무 지친 삶에 그것을 밖으로 꺼낼 수가 없을 뿐입니다.

추송례 씨는 노동자가 글을 쓸 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87년, 추송례 씨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편안할 수도 있는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노동자인 추송례 씨를 사랑해 자기 자신도 철도 노동자가 되어 함께 동지로 산 남편이 아침 출근길에 그대로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추송례 씨가 서른 한 살 때였습니다. 생때같은 남편을 잃고 아무 정신이 없을 그때도 노동운동을 생활로 여겼던, 투사였던 추송례 씨는 남편의 죽음이 과로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과로사라는 말이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집에서 죽었는데 무슨 과로사냐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과로사로 인정받기 위해서 백 통이 넘는 탄원서를 썼다. 다들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일하는 한 노동자가 죽었는데 집에서 죽었든 직장에서 죽었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동안의 노동으로 누적된 병이라면 직장에서 죽을 수도 있고 집에서 죽을 수도 있다."

직장 동료들마저 인정하지 않았지만 추송례 씨는 철도 노동자들의 근무조건과 건강 실태를 하나하나 조사해서 탄원서를 냈습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을 상대로 1년 동안 혼자 싸워서 결국 과로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무슨 힘으로 싸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엄청난 사랑의 힘이다. 남편은 공무원 신분을 버리고 내가 좋아서 노동판에 들어와서 노동자가 된 사람이었다. 내 단 한사람의 보호자였고 세상 사람들이 노동운동을 하는 나를 손가락질해도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이 되어주었고 같이 믿는 것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동지였던 사람이다. 오직 노동운동을 위해 살아온 삶이었는데 그 죽음이 불쌍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삶이 허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단지 나 한 사람만이라도 그의 수고를 인정해주고 싶은 것이 내 혼자만의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하게 한 것이다."

힘없이 앉아서 당하는 삶이 아니라 맞서 싸우는 삶을 선택한 추송례 씨. 그이에게 '말과 글'은 단지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싸우는 무기'이고 '자신을 지키는 무기'입니다. '삶을 지키는 수단'입니다.

"정말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약자일수록 글을 써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써야만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쓰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글을 써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보여줘야 한다. 계속 소리치면서 살아야 한다."

뭔가 빠진 듯한 글이어서는 안 된다

쫓겨다니며 썼던 공책들은 다 불태워 없어지고 추송례 씨는 한참 뒤에 자신의 삶을 생활글로 썼습니다. 컴퓨터의 자판을 한 글자 한 글자 만들다시피 하면서 썼다는데 그 글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전태일 문학상'에 출품되어 제10회 전태일 문학상 생활글 부문 당선작으로 뽑혔습니다. 시상식에 가서 받아온 책 한 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정말은 그 불태워진 공책들에 살아있는데 그것은 다시 꺼내볼 수 없습니다. 상을 타고 나니 그 다음에 글을 쓸 때는 예전에 마음대로 쓰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때부터 글이 무서웠어. 쫄아서 글이 안 되네. 전에는 내 멋대로 썼는데 남들이 볼 것을 염두에 두니깐 글은 매끄러워졌는데 뭔가가 빠져버리더라. 그 뭔가가 중요한 건데. 혼자 쓴 글에는 내가 쓰고 싶은 대로 맘대로 다 털어내듯이 썼는데 남한테 보여주려는 글을 쓰려니 치장에 신경을 쓰게 되더라. 나는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글은 내 생활과 마음을 진실하게 담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정리하고서는 다시 예전처럼 쓸 수 있었다."

'그 뭔가가 중요한 건데'라는 그 말. 무척이나 중요한 말입니다. 그 '무엇'이 삶의 진실을 이야기 해 줄 터이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그 '무엇'이 생각에 지진을 일으키고 실천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추송례 씨는 지금 '뼈속까지 몸이 아픈 사람들'을 안마와 지압으로 살려내는 일을 합니다. 눈을 잃은 지금의 남편과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을 위해 손이 퉁퉁 붓도록 몸을 주무릅니다. 그리고 그이가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틈틈이 글로 적어 <월간 작은 책>에도 싣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공장에서 일하지 않지만 그이는 여전히 노동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꿈을 꾸고 움직입니다. 추송례 씨의 모습에서, 말에서, 글에서 그대로 '살아있음'이 느껴져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이 모습과 말, 글 그대로 살려내긴 어려울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인 자신의 생활과 투쟁을 기록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장은 '보잘것없는 삶'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 삶이 가장 소중합니다. 남들이 눈여겨보아 주지 않아도 노동자들의 삶의 기록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0년 동안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지치지 않고 한길로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추송례 씨한테서 들어봅니다.

"나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는 샘을 발견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백 미터 이백 미터를 파 내려가서야 물을 발견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목을 축일 수 있습니까? 힘들지만 샘을 파서 목을 축여야지요. 나는 그런 마음으로 노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언제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좋은 마음으로 노동하려고 하지요. 똑같은 일이지만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으로 갈라지는데 바보가 아니라면 행복한 쪽을 선택하겠지요.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내가 파는 샘에서 금방 물을 발견할 수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립 속에서 꿈꾸는 세상, 풍동에서 열린 변두리·인권·민중·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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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 추송례 , 박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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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장승

    내가 동경했던 나에친구여 그 어려울때 난 편안히 송례 의 많은 소식 받아보며 이해를 못했던 그시절 난 부끄럽기만 하네...
    집에서 보내온 돈으로 편안히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때 그편지를 무슨 다른 이유로 불태우고 곧바로 후회를 얼마나했는지 송례 친구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동안 찾아 보려고도 못했던 내 부끄러움을 이제야 말 할 수 있네... 언젠가 만나면 내직접 미안하다 해야지
    송례야! 그래도 덕주덕택에 카페에서 나마 자주 볼 수 있고 소식 알고 있어서 너무 기쁘다 언젠가 애자가 전화 번호 알려 줘서 전화통화 한번 했는데.. 그때 보았으면 얘기 많이 했을거야.
    우리 언제 기회 있음 모여서 지난날 회포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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