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정의 사람이야기](5) - 겨울 빈 들녘에서

<제5회 대추리 문학축전> <2004 대추리 평화축전 - 들이 운다…>
평택 팽성읍 대추리 사람들 열어

벌써 작년이 되었습니다. 아는 이들과 함께 평택 팽성읍 대추리 들판에 다녀 온 일이. 12월 18일이었지요. 서울에서는 그날 오후 국가보안법 철폐 문화제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구인가는 다른 어느 곳에선가 절실한 싸움을 하고 있을 그 날이었을 겁니다. 그날 대추리에서 열린 행사는 <제5회 대추리 문학축전>과 <2004 대추리 평화축전 - 들이 운다…>였습니다. 미군기지 확장에 맞서 백여 일 넘게 촛불을 들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기차를 타고 늘 스쳐지나가기만 했던 평택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가을걷이가 벌써 오래 전에 끝난 빈 들녘에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날리는 비닐 봉황연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을 날려본다는 마을 할머니의 얼굴은 세월을 거슬러 아이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연을 날리면서 지금 명치께에 걸렸을 시름도 함께 날리고 싶었을까요? 아니 그 순간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걱정도, 희망도 그 무엇도 가슴에 담아두지 않고 그저 바람에 연을 내 맡기고 연줄을 잡은 손에 느껴지는 줄맛만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아무 걱정 없이 신나게 연을 날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년 이 무렵에도 빈 들판에서 모두 함께 연을 날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있을까요? 하지만 지금 이 대추리 들판은 더 이상 모를 낼 수도, 피를 뽑을 수도, 가을걷이를 할 수도 없게 될 지경에 처했습니다. 들판 바로 옆에 있는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들판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이곳에 삶터를 꾸리고 평생 땀흘려 일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 다 내놓고 떠나라고 합니다.

빈 들녘에 볏짚으로 무대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앉을 의자도 만들었습니다. 논가에는 구호를 적고, 시를 적은 만장이 바람에 펄럭입니다. 문학축전, 평화축전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인들이 무대 위에서 시를 낭송하고,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불판을 피워 돼지고기를 구우며 김치와 함께 먹으며 술 한잔씩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꼿꼿이 앉아 무대만을 바라보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넓은 들판은 누가 어디에 있건, 앉아 있건 서 있건, 무대를 바라보건 딴 곳을 바라보건, 멈추어 있건 움직이건, 들어있건 빠져있건 그대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봄과 여름, 가을 동안 생산에 힘 쏟은 들판은 이 겨울 사람들에게 광장이 되어줍니다.

참 넓은 들판이었습니다. 더 멀리 가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함께 간 아이와 행사장에서 빠져나와 길을 나섰습니다.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저쪽 어딘가에 문무인상을 세운다고들 다녀왔는데 그게 어디에 있을까 하며 그냥 걸었습니다. 논두렁으로도 걷다가 시멘트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민들레를 발견합니다. 이 겨울까지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둥근 모습으로 논두렁에 남아있더군요. 어째서 지금까지 세상 어디론가 날아가지 않고 이 추위 속에 남아있었을까요. 무수한 바람이 불어도 자신이 기다리는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남아있음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을까요. 혹 그것도 아니면 벌써 오래 전 화석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그 속마음은 모른 채 우린 민들레 씨앗을 날려보냅니다. 후후 불어 겨울 한가운데로 날려보냅니다. 내년 봄에 어디선가 이 홀씨들이 다시 새싹으로 살아나오겠지요. 그때 민들레 새싹은, 민들레꽃은 모를 심는 농민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행사가 열리는 곳에서 점점 멀어지자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참 넓기도 넓습니다. 눈 닿는 곳이 다 논입니다. 저 멀리 문무인상이 보이기는 하는데 만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낮에는 그렇게도 따습더니 저녁이 가까워오자 바람이 제법 찹니다. 다행히 아이가 돌아가자거나 춥다거나 하면서 보채지 않았습니다. 사실 돌아올 길이 걱정이 되기는 했습니다. 어둑어둑해질 테고 다시 찬바람 맞으며 이 먼길을 되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그러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벌써 걸어온 길이 어딘데, 가다보면 그곳이 나올 텐데 하면서 계속 걸었습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뒤돌아서지만 않으면,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어떤 길이든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겁니다. 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꼭 그 문무인상을 보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는 곳 도시와는 다른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봄여름가을 날마다 이 길을 걷거나 오토바이로 달렸을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느껴보고 싶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어쩌면 나는 영영 그 마음을 모르고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저 그이들처럼 한번 걷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용산 미군기지 확장이전 문제가 과연 평택 팽성읍 대추리 마을 사람들만의 일일까요? 마을에 도착해서 한 할아버지께 나는 “할아버지 여기 행사에 가세요?”, “여기 사세요?”, “걱정이 많이 되시겠어요?”라고 여쭈었습니다. 내 물음은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난 곧 깨달았습니다. 나는 다시 나에게 묻습니다. “대한민국에 삽니까?”, “당신은 걱정이 안 됩니까?”라고. 분명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닌데 어느 샌가 그 지역 사람들만의 문제로 몰아넣은 게 참 많습니다. 오래 전 광주의 문제가 그렇고, 부안의 문제가 그렇고, 새만금의 문제가 그렇고 천성산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모르거나 잊고 있는 어떤 곳의 문제가 그럴 것입니다. 분명 일부 사람들만이 겪는 문제가 아닌데 일부만이 나서게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국가보안법철폐 문제가 그렇고, 파병 반대, 쌀 개방 반대 문제가 그렇습니다. 농민이, 노동자가, 도시빈민이 겪는 고통을 그대로 함께 겪지 못하는 일 나는 아직도 많습니다. 나는 언제나 뒤늦게 느끼기에 바쁘고 뒤늦게 알고 이해하기에 바쁩니다.

가도 가도 들녑입니다. 간간이 우리 옆으로 차들이 지나갑니다. 쌩 지나가는 차들은 보지 못할 겁니다. 들판에 마른 풀들을. 이렇게 천천히 걸으니 나는 그동안 내가 못 보고 산 것들을 만납니다. ‘마른풀빛깔’이라고 수첩에 적습니다. 저 마른풀의 빛깔을 무슨 색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냥 마른풀빛깔이라고 적습니다. 이 들판이 봄에 보여주는 빛깔과 여름에 보여주는 빛깔, 가을과 겨울에 보여주는 빛깔이 죄다 다를 것입니다. 이 들판이 날마다 피어내는 냄새 또한 다 다를 것입니다. 공기 또한 다를 것입니다. 군데군데 갈아놓은 논에 드러난 땅빛 흙빛과 노을빛, 그리고 마른 볏짚단빛깔이 참으로 어울립니다. 해가 점점 기울어 가는데 그 빠르기가 점점 빨라집니다. 우리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해도 자기 걸음만큼 저 산 아래로 집니다. 우리가 처음 있었던 들판 쪽을 바라봅니다. 여전히 연이 납니다. 들판과 하늘에 어울리는 연입니다. 그 위로 들판과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비행기와 헬기가 납니다. 어울림과 어울리지 않음. 폭력과 전쟁은 우리 삶에 어울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요. 이 넉넉한 땅에, 그대로 모든 것을 어울림으로 엮어내는 이 땅에 전쟁을 준비하는 기지, 전초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지금.

문무인상 앞에 아이와 함께 섰습니다. 대나무로 만들었더군요. 크기도 엄청 커서 한참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기원을 담은 문무인상이 들판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아까 낮에 사람들은 이 문무인상을 세우면서 무엇을 마음속에서 꺼내고 무엇을 다시 마음 속에 담았을까요. 문무인상이 세워진 곳을 지나 저 멀리로도 들녘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길도 계속 이어집니다. 애당초 이 문무인상을 보지 않았더라면, ‘저기까지 가보자’고 마음먹지 않았더라면 계속 길을 나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이 문무인상이 내 길을 막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솔직히 어둠이 오더라도 길을 잃더라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더 이상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를 만큼 걷고 싶었습니다. 대추리 들판, 미군기지와 맞닿은 이곳, 그리고 다시 미군기지로 내 줄 것을 요구당하는 지금, 싸움이 시작된 지금, ‘여기까지’나 ‘이 정도만큼’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갈 수 있는 만큼, 가야만 하는 만큼 가는 것입니다. 어정쩡하게 ‘저기까지만 가보자’하고 나처럼 길을 나서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둠이 다가오는 시간도, 발길 낯선 공간도 물리치면서 가야할 것입니다.

되돌아오는 길, 한참을 걸어도 저쪽 들판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꼭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벌써 다 끝나고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애당초 판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하늘을 나는 연들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쪽 들판에서 사람들이 모여 내는 소리가 들판 이쪽에 있는 나와 아이에게 들리지 않지만 엄연히 저쪽 들판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사람들이 소리내고 있었습니다. 나로부터 먼 곳에 떨어진 다른 사람의 삶의 자리에서 나오는 소리,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돌아오자 갑자기 모든 소리들이 한꺼번에 확 귀로 몰려듭니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미군기지 앞으로 벌써 가고 있더군요. 나는 다시 뒤늦게 아이와 깜깜한 논길을 걸어 저만치 앞서 가는 횃불의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왜 그렇게 빠른지 성큼성큼 가버린 그 발걸음들을 다 따라잡지 못하고 아이와 나는 어둠 속에서, 손에 든 횃불은 없지만 그래도 걸어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횃불을 보면서 나, 저 횃불이 온 세상을 태워 밝혀야 할 때 주저하지 않고 나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망설이며, 늦은 글로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덧붙이는 말

사진촬영은 '삶이 보이는 창' 권기윤 씨께서 도와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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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랑단

    해지나(벌써 열하루째군요. 새해도) '들이운다'에 대한 글을 보니 반갑네요. 님의 느낌 잘 읽었네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죠. 캠코더를 들고 여기저기 찍으러 다녔던 긴머리가 접니다.

    한가지 민들레의 씨는 '홀'씨가 아닙니다. 박미경이던가요. 민들레'홀'씨 되어 라는 노래도 있는데 '아까시'를 '아카시아'라고 부르는것과 비슷한 잘못된 거구요.

    홀씨는 균류나 포자식물의 씨를 말하는거라네요. 이런말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민들레 홀씨가 아니라 낱개를 칭하는 '홑'씨 정도가 되지 않을런지...

    평택 문제는 올해 큰 싸움을 앞두고 있는거 같습니다. 모두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야할 싸움이죠.

    저희도 함께 할거구요. 여기서 저희는 제가 활동하고 있는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이구요. 작년에도 529 평택평화축제를 함께 했고 올해는 평택을 중심으로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한글로 주소창에 '평화바람' 이라고 치거나 www.peacewind.net 를 치면 올 수 있죠. 영문주소는 도메인 사용료가 체납되어 이달말이나 다시 열리게 될거고 임시로 www.cham-sori.net/~peacewind 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지금은 봄을 기다리며 활동을 쉬고 겨울잠에 들어간 기간이라 최근 게시물을 없을거구요.

    평택을 기억하는 싸움에 함께해가죠.

  • 유랑단

    해지나(벌써 열하루째군요. 새해도) '들이운다'에 대한 글을 보니 반갑네요. 님의 느낌 잘 읽었네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죠. 캠코더를 들고 여기저기 찍으러 다녔던 긴머리가 접니다.

    한가지 민들레의 씨는 '홀'씨가 아닙니다. 박미경이던가요. 민들레'홀'씨 되어 라는 노래도 있는데 '아까시'를 '아카시아'라고 부르는것과 비슷한 잘못된 거구요.

    홀씨는 균류나 포자식물의 씨를 말하는거라네요. 이런말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민들레 홀씨가 아니라 낱개를 칭하는 '홑'씨 정도가 되지 않을런지...

    평택 문제는 올해 큰 싸움을 앞두고 있는거 같습니다. 모두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야할 싸움이죠.

    저희도 함께 할거구요. 여기서 저희는 제가 활동하고 있는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이구요. 작년에도 529 평택평화축제를 함께 했고 올해는 평택을 중심으로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한글로 주소창에 '평화바람' 이라고 치거나 www.peacewind.net 를 치면 올 수 있죠. 영문주소는 도메인 사용료가 체납되어 이달말이나 다시 열리게 될거고 임시로 www.cham-sori.net/~peacewind 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지금은 봄을 기다리며 활동을 쉬고 겨울잠에 들어간 기간이라 최근 게시물을 없을거구요.

    평택을 기억하는 싸움에 함께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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