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남미이야기](7) - 남미의 과거청산 바람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등, "한국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인간백정 구속하라.” 그 숫자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매일 볼 수 있는 피켓이다. 이제 국제적인 통용어가 되어버린 ‘인간백정’이란 말은 물론 1973년 민주정권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집권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를 말한다. 피노체의 구속을 촉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도 사법적 심판을 받고 있지 않고 건재하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최근 칠레 사법당국의 일련의 전향적 결정에 따라 그에 대한 사법적 심판에 청신호가 켜졌다.

이제는 복권이 되 대통령 관저 앞에 세워진 비운의 아옌데 대통령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

칠레만이 아니다. 정보기관 총수의 야당의원 매수 스캔들로 후지모리정권이 무너진 페루의 경우 지난 3년간 꾸준히 문제의 총수 블라디미르 몬데시노스의 재판을 중심으로 과거청산이 계속되고 있다.(박스 기사 참조) 칠레와 함께 군부독재의 인권침해가 가장 심각했지만 과거청산이 지체되어 온 아르젠티나에서도 최근 네스트로 키르츠너정권이 출범하면서 과거청산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과거청산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고 있지만, 남미에도 민주화 이후 20년여 만에 뒤늦게 과거청산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실 그동안 남미의 의식있는 학자들이나 언론인을 만나면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한국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부러움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은 김영삼정권의 역사 바로세우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어떻게 군출신 전직 대통령을 두 명씩이나 감옥에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독재시절 행해진 우리 군부의 인권 침해도 만만하다고 할 수 없지만 남미에 비하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예를 들어, 아르젠티나의 경우 70년대 군부독재 시절 ‘더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아래 무려 7만 명 이상이 실종되는 등 인권침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 같은 반인륜적 범죄에도 불구하고 남미의 경우 민주화 이후에도 그 책임자들에 대한 사법적 응징과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왔다. 이는 군부가 아직도 정치권과 사회에 대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젠티나 대통령궁 앞에 흰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의 모습들. 이는 군사독재에 의해 사라진 실종자들을 상징한다.

사실 남미도 과거청산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르젠티나의 경우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 80년대 말 흰 스카프로 유명한 전설적인 ‘5월 어머니회’와 같은 실종자 가족들의 압력에 의해 인권침해와 실종에 책임이 있는 일부 군장교들에 대한 재판을 실시했다. 그러나 군부의 반발이 커지면서 정부는 이들에게 일률적으로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특별 사면법안을 제정하고 과거청산을 중단하고 말았다.

또 다른 대량 학살국인 칠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주범인 피노체와 군부에 대해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던 중 90년대 말 피노체가 신병치료차 영국을 방문했다가 과거 유럽에서 저질렀던 망명 인사들에 대한 폭탄 테러와 관련된 스페인 법원의 신병 인수 요구로 국제적 이슈가 됐다. 이에 용기를 얻은 유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과거청산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특히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납치해 처치했던 ‘죽음의 카라반부대’의 피해자 소송을 맡은 후안 구즈만 특별검사가 피노체의 출두 명령을 내리고 가택 연금을 지시했다. 그러나 피노체는 고령과 치매를 이유로 면책을 요구하고 나왔고, 상급법원이 주요 혐의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과거청산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바뀌었다. 아르젠티나의 경우 키르츠너정권의 출범과 함께 변화가 생겨났다. 키르츠너 대통령은 70년대 군부독재 시절 급진적 페론주의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 했고 많은 동료들이 아무도 모르게 희생돼야 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 ‘추악한 전쟁’ 세대이다. 그 같은 경험을 잊지 않은 듯 대통령 취임 후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유럽 사법당국에 의해 인권유린 혐의로 기소된 전, 현직 군장교의 신병 인도를 막아왔던 법령을 폐기한 것이다. 또 의회에 압력을 넣어 80년대 말 군장교 연루 인권재판을 중단시켰던 일련의 인권침해 군부 사면법안을 폐기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키르츠너 정권에 의해 약 1백여 명의 전현직 장교들이 구속되어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피노체의 구속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리는 실종자 유가족들

칠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칠레의 고등법원은 1973년 쿠테타 이후 아르젠티나에 망명 중이던 전육군사령관 부부를 자동차 폭탄을 설치해 암살한 혐의와 관련, 피노체의 면책특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이와 관련, 피노체가 법정에 출두해 재판을 받아야 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뿐만 아니라 구즈만 특별검사는 문제의 카라반 부대의 불법 납치와 살인혐의와 관련해 최근 피노체를 기소했다.

즉, 3명의 의사들이 조사한 결과 피노체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재판정에 출두해 재판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건강하며 피노체가 마이매미 텔레비전과 가진 인터뷰를 분석한 결과 피노체가 치매라는 주장과 달리 지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특별검사의 설명이다. 뒤늦게나마 남미에서도 지연된 과거청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인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페루의 과거청산 - 몬데시노스

“불완전한 스파이”. 악명 높은 페루 국가정보국(SIN)의 총수였던 블라디미로 몬데시노스에 대한 두꺼운 전기를 최근 발간한 두 명의 여류저널리스트들은 몬데시노스를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정보기관의 총수로서 각종 공작정치를 통해 군과 정보기관을 비롯한 페루의 주류사회에 전혀 연고가 없는 일본계 이민2세 후지모리를 10년 이상 장기집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그러나 야당국회의원을 현금으로 매수하는 비디오가 폭로됨으로써 결국 후지모리가 몰락하는데도 일등공신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그는 정보기관 총수로써 할 수 있는 악행이란 악행은 모두 저지른 죄로 1심에서 유죄판결(9년 4개월 형)을 받고 감옥에서 제 2심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해외(베네주웰라)로 도주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하고 숨어 지내다 추적에 나선 페루경찰에 의해 붇잡혀와 자신이 잡아 가둔 무장게릴라 ‘빛나는 길로’의 사령관 아비마엘 구즈만의 옆방 친구로 말이다.

페루판 과거사 청산의 상징인 그의 죄명은 비밀암살단을 통한 소위 불순분자들에 대한 살인지시 혐의로부터 야당정치인들을 파괴하기 위한 각종 정치공작, 엄청난 부정부패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다. 특히 정보기관 총수의 권력을 이용해 마약거래에 깊이 관여하고 공산게릴라에게도 무기를 밀매해 엄청난 재산을 치부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후지모리 재임 10년간 사실상 실질적인 대통령에 다름 아니었던 그에게 있어 정보부 총수라는 자리는 최고의 개인 비즈니스였던 셈이다.

일찍부터 권력지향적이고 권무술수와 공작에 능했던 그는 젊은 장교 시절 이미 국가기밀을 미정보국(CIA)에 넘겨줬다가 전역을 해야 했다. 그러나 변호사자격을 획득, 페루와 컬럼비아국경의 밀림지대에서 활약하던 마약업자들을 사법당국에 뇌물을 주고 해결해주는 해결사로 이름을 날리며 거액의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90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후지모리에 연결이 되어 그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비리공작과 뒷거래에 능한 몬데시노스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후지모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면서 신임을 얻었고 후지모리가 정보기관과 군 등에 기반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대통령당선 만찬에 후지모리에게 갑자기 전화를 해 “각하, 음식에 독이 들었다는 첩보가 급히 들어왔으니 음식을 들지 마십시요”라고 거짓 암살음모를 전해 겁을 주고 점점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그는 이중, 삼중의 역스파이와 배신을 밥 먹듯이 해 미국으로부터 마약 퇴치 명목으로 천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챙기면서도 동시에 마약업자로부터는 보호비 명목으로 엄청난 자금을 받아먹는 뻔뻔함과 재주를 보였다. 즉, 미국으로 돈을 받고 일부 마약업자들을 구속해 실적을 올려주면서도 이들 업자들의 경쟁업자로부터 경쟁자들을 제거해준 대가로 돈을 받는 식이었다. 동시에 페루군의 이름으로 유럽에서 무기를 사 코케인과 교환하는 대가로 컬럼비아의 좌익반군에게 몰래 판매하는 일까지 일삼았다.

걱정스러운 것은 몬데시노스가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서서히 반격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축적해준 엄청난 비자금을 이용해 막강한 변호사팀을 운영하고 특유의 공작으로 증인, 판사들을 매수하는가 하면 과거 자신이 만들어 놓은 비리파일로 관련 주요 인사들을 협박하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재판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 결과, 2심과 그 이후의 결과가 어찌될지 불안하다는 것이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제인 홀리건 기자의 지적이다.
덧붙이는 말

'손호철의 남미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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