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나에게는 도무지 작가 정신이라는 게 모자라 언젠가부터 더는 동화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이라크 전쟁, 하룻밤 사이에도 저 여린 목숨들이 수십 수백 명씩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며 원고지 앞에 앉아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쓴다 하는 것을 스스로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게는 전쟁을 멈추게 하는 일로 당장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위한다는 그 어떠한 말도 다 거짓처럼만 느껴졌다. 그래서 때로는 둘레에서 아껴주는 이들이 이제 그만 네 자리로 돌아와 글을 쓰라고, 그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써야 하지 않겠느냐 할 때에도, 그깟 동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며 막 된 말을 함부로 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꽤 오래도록 동화책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봄에 만났다. 정말 꼭 함께 나누어 읽고 싶은 동화책 한 권을.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마을이다. 언덕에 올라 다리를 펴고 앉았다. 그날따라 봄 햇살이 몸 전체로 스미었고 책을 읽어 갈수록 몸 전체에는 저릿한 것이 퍼져 들었다. 그렇게 몸 안팎이 저리고 따뜻했다. 슬퍼서인가? 그래, 슬픔이었지. 허나 현실의 진실한 슬픔은 그것에 빠져 허우적거림으로 감정을 낭비하게 하지 않는다. 깨워 일으킨다. 그것이 좀 더디 걸리는지는 몰라도 끝내는 간절한 그 무언가를 바라게 해주는 거름이 되어준다. 그건 엊그제 서울에 올라가 보고 온 영화 <<거북이도 난다>>도 그랬고, 이날 읽은 동화 <<빡빡머리 엄마>>도 그러했다.
아이와 함께 아파하고, 엄마와 함께 싸우는 이야기
사실 이 동화를 처음 만난 건 책으로가 아니라 한 어린이신문에서였다. 한동안 동화책을 손에서 놓고 지낸 것처럼 동화를 소개하는 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책을 소개하는 글 앞에서는 그만 눈길이 붙들려버리고 말았다.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머리를 깎은 엄마……. 줄거리를 대충 추려 놓은 것만 보아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리고 반가웠다.
나는 모든 동화가 현실의 세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턱없이 모자란다는 점에서는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더러 사회 현실이나 세상의 문제를 담았다는 동화를 본다 하더라도 그 또한 결국 제도의 맞선 자리에 선 어른들이 무언가를 가르치기에 급급해 결국은 또 다른 교훈 동화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설픈 감상의 타협이나 동정의 시선, 도식의 목소리에 갇힌 것이거나. 이러한 실정이고 보니 우리 사회 계층의 문제나 약자, 소수자의 문제를 다룬 동화가 나왔다 하더라도 보통은 작품을 보기 전까지 내 태도는 반신반의.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짧게 추려 놓은 줄거리만 보아도 이 작품은 파업하는 엄마의 이야기, 노동 쟁의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말투만 바꾸어 아이들에게 설명하려드는 어른의 이야기가 아닐 거라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이다. 엄마의 파업 이야기가 아닌 엄마의 파업으로 겪는 아이의 생생한 이야기, 그것이 아이의 눈높이와 아이 일상의 언어로 그려지는 거라는 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이것을 쓴 작가는 동화 속 아이나 그것을 읽을 어린 독자들에게도 성급하게 어떤 판단을 요구하지는 않겠구나. 작가는 아이와 함께 아파하고 있을 뿐, 엄마와 함께 싸우고 있을 뿐 괜한 날 목소리를 드러내 오히려 거부감을 주거나 하지는 않겠지. 어서 읽고 싶었다. 며칠 뒤 책이 왔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에 대한 언급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역시 그랬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마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때 온몸으로 무언가가 번지는 것처럼 따뜻하고 슬픈 그 어떤 것이 저릿하게 퍼져나는 걸 느꼈다. 모두 열두 장면으로 짜여진 이 이야기에 엄마는 아주 잠깐 맨 마지막 장에나 한 번 나온다. 전체 이야기는 파업으로 엄마의 빈자리가 남은 정민이 동민이 남매와 할머니가 지내어가는 세 식구의 이야기. 아버지는 두 해 전 돌아가셨다. 작가는 아버지가 죽은 까닭을 말할 때에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나 산업재해, 부당해고 따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저 정민이의 기억을 빌어 한번 시작하면 자지러지듯 기침을 하던 모습이나 끼니때마다 하얀 알약을 한 움큼씩, 그것도 다 삼키지 못해 토해버리곤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아버지가 가끔 어딘가를 다녀올 때면 심하게 술에 취해 힘들어하곤 했는데 아마 예전에 일하던 공장을 다녀온 거였을 거라는 아이의 짐작 정도만. 아버지가 병을 얻고 일을 못하게 된 뒤로 엄마가 일을 시작했다. 봉제 공장부터 화장품 공장, 사출 공장, 전자부품 공장으로. 엄마가 얼마나 고되게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작가는 따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봉제 공장 일을 마치고 올 때면 엄마 머리에 실밥이 그대로 붙어 있는 날이 많았다는, 밤늦어 쓰러져 자는 엄마 곁에서 아버지가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실밥을 떼곤 했다는 이야기가 다다. 아이의 눈은 그 때마다 아버지 눈에 고이던 눈물을 기억한다. 이렇듯 작가는 앞서 흥분하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않은 채 한 아이의 눈을 따라 식구들의 모습에 카메라 렌즈를 조용히 들이대는 것으로 우리네 노동자의 삶과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아주 또렷하고 생생하다. 어디에도 이렇게 묘사한 구절은 없지만 왠지 방 안의 습진 곰팡내까지 절로 맡아지는 것 같고, 늘 깔아놓은 채로 있는 아버지 이불 위로 군데군데 얼룩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5학년 정민이가 사는 집에는 아버지가 없고, 엄마마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엄마가 하는 일은 고기를 가공하는 공장에서 부위별로 자른 것을 랩으로 씌우기. 그 일을 시작한 뒤로 엄마는 늘 손목이 시고 관절이 아파 파스 냄새가 떠나지 않는다. 동화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가난한 노동자를 어미로 둔 어린 딸의 숨결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석 달째 자연히 정민이는 엄마 노릇을 떠맡는다. 집안 청소며 빨래, 장을 보는 일까지.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궁상스럽게만 그려지지도, 신파의 음률을 타지도 않는다. 엄마가 집을 비운 뒤로 동생 동민이는 바지에 오줌을 싸는 일이 잦아졌다. 그 빨래도 모두 정민이 몫이다. 동민이의 어린이집 재롱잔치 날, 며칠 전 전화가 왔을 때 이 날만큼은 엄마에게 꼭 와달라고 했지만 엄마는 전화조차 없다. 하필이면 이 날이 가장 친한 동무의 생일이지만 정민이는 갈 수 없다. 억지로 동민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나서야 했지. 누나도 오지 않으면 동생이 얼마나 섭섭할까? 정민이 손에는 다른 아이네 엄마아빠처럼 사진기도 꽃다발도 없다. 무대에 선 아이들은 공연이 바뀔 때마다 드레스에 양복, 갖가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동민이만 줄곧 원복 하나를 입고 있다. 차라리 동민이 얼굴은 밝다. 동민이보다 더 주눅이 들고 속이 상한 건 정민이다. 정민이는 화가 났다. 이 모든 것이 싫다. 엄마가 원망스럽다.
정민이 뿐 아니라 이 동화에 나오는 인물 모두는 생생한 캐릭터를 지닌 조연으로 실감을 더한다. 정민 엄마를 두고 이말 저말 드리는 게 싫어 노인정조차 발길을 끊고 지내는 할머니, 동민이 재롱잔치 때 왜 자기한테라도 연락을 안했느냐며 동민이가 고아냐고 정민이를 야단하는 고모, 생일 모임에 오지 않은 정민이에게 지 생일은 챙겨먹었으니까 입 닦는 거냐고 쏘아대는 아이. 고모는 집안을 돌보지 않는 엄마가 못마땅해 정민이에게 싫은 소리를 퍼붓기도 하지만 불안할 때 아이가 오줌을 싼다며 동민이의 약을 챙겨다 주기도 하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면서 세금 고지서들을 챙겨 가 대신 내주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에 이야기의 장면은 더욱 살아나고 정민이가 겪는 감정과 처지는 한층 더한 울림을 갖게 한다.
전투경찰, 파업 그리고 빡빡머리 엄마
정민이가 동민이 손을 잡고 엄마의 공장으로 찾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몇 번을 보고 다시 보아도 가슴이 울렁인다. 이번만큼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거라고, 따져 물을 거라고 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엄마에게 가져다 줄 옷가방을 보며 밤에는 추울 텐데 더 두꺼운 잠바를 넣을 걸 그랬나 하는 걱정을 감추지는 못한다. 그런 정민이 곁에서 엄마를 만나러 가는 게 마냥 신이 나는 동민이. 동민이의 걱정은 단 한 가지 누나가 엄마에게 자기 오줌 쌌다는 걸 이를까봐 겁을 낼 뿐이다.
둘은 공장 앞으로 갔다. 공장 들머리를 겹겹이 둘러 싼 전투경찰. 정민이는 경찰들에게 가로막히고, 누나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동민이는 바리케이트 사이를 몰래 넘어들어 간다. 공장 저 편 동민이의 울음소리, 정민이도 공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둘은 곧 공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엄마를 만난다. 여기에서 두 남매는 엄마의 빡빡 깎은 머리를 보게 된다. 동민이는 엄마에게 못 보여준 재롱잔치를 하겠다면서 엄마를 비롯한 파업 노동자들 앞에서 신이 나 춤과 노래를 보이는데 정민이 마음은 어지럽기만 하다. 공장 안 사람들하고 같이 오늘 머리를 깎은 거라며 엄마가 사정을 들려주어도 그건 엄마 사정일 뿐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론 나오지 않는다. 엄마를 보면 단단히 따질 거라고 벼르고 별러 온 말들도 하나 나오지 않았다. 참으려 해도 눈물만 나온다. 꼭 이래야만 하는 거냐고 울먹여 물어보지만 엄마의 대답은 아빠였다. 아빠를, 아빠만 생각하고 있다고.
작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 것도 일러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쯤이면 어린 독자들도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된다. 설령 비정규직 노동자니 파업이니 부당해고에 차별임금 같은 말 따위는 끝까지 몰라도 좋다. 어린 독자들 마음에 비추어지는 현실의 벽, 간절한 무언가가 전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머리로 알게 되는 가치나 정보가 아니라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볼 줄 알게 하는 마음의 눈이며 현실에서 진실의 편에 설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머리칼 없는 엄마 머리가 몹시 시릴 것 같아, 정민이는 목도리를 풀어 엄마 머리를 감싸 준다. 그리고 정민이는 생각한다. ‘엄마, 그러면 엄마가 집에 돌아올 날이 더 멀어지는 거지?’
책의 내용을 다 말해버리고 말았다. 혹여나 이렇게 내용을 다 말해주면 뒷사람의 책 읽는 재미를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하고 불만스러운 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 동화의 내용이야 거의 다 소개해 놓았지만 이야기의 감동, 그 안의 숨결과 떨림은 십분의 일도 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를 아는 것과 생생한 순간의 감동을 느끼는 것은 다른 말이다. 나 또한 대강의 줄거리를 안 채, 결말이 어떻다 하는 것을 알고 보았지만 요사이 본 어떤 동화보다 더한 감동을 이 안에서 느꼈다. 책의 앞과 뒤에는 작가가 쓴 머리말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작가의 짧은 소개가 있는데 그조차 아름답다. 그럴듯한 말이나 은근한 분위기가 아니라 깨끗하고 쉬운 말로 쓴 평범한 인사여서 더욱 그렇다. 이 글을 쓴 박관희 아저씨는 조그맣게 농사를 짓다가 마흔이 넘어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지. 하, 여기에 이렇게 바보스러울 만큼 착하게 살아가는 이가 이렇게 또 있었구나. 고맙고, 좋고, 반가웠다. 아저씨는 이 머리말 끝에 일하는 어머니들과 그 아이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고 했다. 정말 그 말씀처럼 일하는 어머니들과 그 아이들이 많이 읽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
지금 시간 4월 30일 새벽 3시 16분, 노동절을 하루 앞둔 새벽. 아이엠에프 뒤로 노동시장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본격 진행된 비정규직의 양산은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전체 노동자 가운데 반이 넘는 800만이 비정규직에, 더구나 여성 노동자의 70퍼센트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현실. 현대중공업에서는 박일수 씨의 죽음을 두고 한 약속이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대성산업의 노동자들은 3년이 넘게 싸우고 있다. 경찰청고용직공무원 노조는 4개월째 민주노동당사 앞에서 농성, 지난 2월만 해도 한 학습지 교사가 부당영업 강요를 못 이겨 목숨을 끊었다. 전국 곳곳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을 이루 말로 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사회단체에서 일하며 지하철 청소용역 아주머니들과 함께 노조를 만들려 애쓰던 후배가 안타까워하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글을 배우는 교실로 밤늦게 일을 마치고 나오시던 육십 넘은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어디 이 문제가 불안한 고용이나 정규직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임금에 대한 문제에만 갇힌 것일까, 인간답지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인격적 노예’ 처지에 가정생활마저 온전히 이루기 힘든 상태로 내몰리는 조건. 이 현실 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정민이 동민이 남매가 있을 것이며 머리를 빡빡 깎지는 않았지만 그와 같은 심정의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을까? 어제오늘은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볼 기회가 없어 막판 협상 중이라던 비정규직법안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직도 나는 순진해서인지 모르나 많은 사람이 한 목소리를 더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정민이네 엄마는 그 싸움을 하면서 오로지 정민이 아버지만을 생각한다고 했지. 단 한 사람만 생각하자. 이 땅에 사는 이라면 누구라도 가장 가까운 이 가운데 하나 이상은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살아가지 않은가. 그 얼굴 하나만 생각하자. 비정규직 차별 철폐.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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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범]의 '어떤 동화책'
박기범 님은『문제아』,『새끼개』,『어미개』 같은 동화책을 썼다. 아이들과 함께 참세상을 가꾸어 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동화책 이야기를 연재한다.
<빡빡머리 엄마> 박관희 글, 박해남 그림, 낮은산,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