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빈곤 부채질 해온 APEC, 이번에는 부산

89년 출범한 아펙의 역사, ‘전쟁의 기수로, WTO의 촉매제’로

아펙(APEC)반대 국민행동(준)이 6월 1일 정식 출범을 했다. 국민행동(준)의 정식 명칭 앞에는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국민행동(준)은 “자유무역의 환상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에서의 빈곤과 전쟁을 양산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아펙: APEC)에 저항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표류한 WTO를 세워내고, 자유무역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자본과 각국 정부의 노력이 숨은 그림자처럼 진행되는 과정에서 진행될 13회 아펙정상회의가 과연 어떤 징검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전세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탄생 기원, 유럽공동체와 미국 중심 경제블럭에 살아남기 위한 대안

  아펙홈페이지. 지난 30일 제주도에서 개최된 제2차 APEC 고위관리회의(SOM : Senior Officials' Meeting)에 김종훈 외교부 APEC 대사가 의장이라는 설명이 덧붙여 배치되어 있다.
1989년 11월 호주 캔버라에서 개최된 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APEC는 창설됐다. 당시는 국제사회의 조건은 유럽의 국가들이 유럽공동체(EC)를 형성하며 ‘단일 시장’ 형성을 목표로 지역통합을 강화하고 있었다. 미국 또한 미-캐나다 자유무역협정을 서명하며 NAFTA와 같은 미국 중심의 경제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는 86년부터 시작됐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별 성과 없이 표류하며 난관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수상은 ‘동아시아 경제그룹’을 창설하자는 제안으로 의견을 발의했고, EC와 NAFTA로 대표되는 경제 블록화에 살아남기 위한 방책으로 일본과 호주 정부를 중심으로 APEC회의가 제안됐다. 현재(2001년) 아펙은 뉴질랜드, 멕시코, 페루, 한국, 필리핀, 러시아, 중국, 브루나이, 미국 등 21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93년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1차 회의에서는 ‘아-태지역의 전망과 경제성장을 위한 각국 고려 사항, 아-태지역 공동목표 달성을 위한 방안’들이 논의됐다. 94년 2차 인도네시아 보고르 정상회의에서는 APEC내에서는 포괄적인 자유무역화를 완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보고르 선언’을 채택됐다. 회원국 중 선진국은 2010년까지, 개도국은 2020년까지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다양한 경제구조와 차이, 아펙 회원에 가입한 목적과 각국의 이해관계가 혼재한 가운데 아펙은 협력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무역장벽 등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했다.

95년 3차 오사카 정상회의에서는 ‘보고르 선언’에 부합하기 위해 구체적 전략을 담은 ‘오사카 행동계획’을 발표한다. 또한 각 회원국들이 개별실행계획(IAP)을 제출하며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하기도 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된다. 또한 4,5차 필리핀 수빅, 캐나다 벤쿠버 정상회의에서도 정부기술협정(ITA), 추가 협정 등의 협상을 진행하나 결국 합의 도출에 실패한다.

계속된 합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펙은 국제사회에서 지위를 획득해 간다. 그 결정적 계기이며 2001년 이다. 2001년 9월 도하에서 출범한 뉴라운드(DDA : 도하개발아젠다)에 대해 아펙은 ‘WTO와 뉴라운드 협상의 진전을 위해 공동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자유무역체계를 지원하고 나서기도 했다.

2003년 방콕 정상회의에서도 DDA 협상의 재개를 촉구하며, 세계무역이 활성화되기 위해 지역무역협정(RTA) 및 자유무역협정(FTA)이 WTO의 규정에 부합하고 WTO 목표 달성을 진전시키기 위해 보고르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는 의견을 표출한다.

실제 아펙의 경우 내부적인 합의를 통한 역내 자유화에는 실패했을지 모르나, 세계무역질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선언하며 공공연하게 힘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다. 자체적으로는 아펙이라는 틀안에서는 싱가포르-뉴질랜드, 일본-멕시코 처럼 양자간협정에서의 다리를 놔 주는 역할을 해 왔고, 금융 자유화 조치 등을 꾸준히 강화해 왔다.

  APEC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문구가 보인다. [출처: 부산아펙공식홈페이지]
APEC(아펙)은 이라크전을 공식 지지했다

아펙의 지난 과정에서 2001년 DDA 지지 선언과 더불어 다른 눈에 띄는 행보가 있다. 당시 상하이 회담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공식 선언문이 채택됐다. 89년 출범한 아펙은 사실상 이렇다 할 합의들을 도출하지 못해 왔다. 그러나 2001년 상하이 회담에서는 ‘테러에 반대하는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채택하며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9.11 테러 이후 개최된 2001년 상하이아펙회의에서는 ‘테러조직에 대한 자금공급 차단, 에너지 안보, 해상 및 항공운송 안전 강화, 대 테러 능력 배양 추진’ 등 ‘반테러 성명’을 발표 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 개최된 2003년 태국 방콕 아펙 회담에서는 파병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논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당시 정상회담에서는 ‘인간안보’ 개념이 채택되며 APEC반테러대책반(CTTF)가 구성하기도 했다. 여기서 새롭게 도입된 인간안보는 ‘테러집단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아펙이 경제교역과 안보가 직결돼 있다는 논리를 근거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후원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생물테러 예방, 보건안보 강화, 기계 판독 여행증명서 발행 등 반테러대책반의 내용은 국내의 테러방지법의 국제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항목이 많았다. 또한 당시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항구적 자유 작전 참여로 적극적인 반테러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칠레에서 개최된 산티아고 아펙 회의에서도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와 추가 파병 등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칠레의 반세계화 운동단위들은 칠레 사회포럼이 끝나는 날에 맞춰 7만여 명이 모여 ‘반부시 투쟁’을 전개하며 아펙 반대 시위를 펼쳤다.

아펙(APEC)은 WTO의 첨병

많은 사람들이 아펙이 세계무역기구(WTO)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지’의 입장을 7년 동안 타결을 보지 못하고 표류했던 우루과이라운드(UR)가 WTO로 재 탄생하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2004년 6월 ‘세계경제’에는 ‘APEC에의 새로운 기대’라는 제목의 1993년 클린턴 미 대통령이 시애틀에서 아펙 정상회의를 하자고 한 제안문이 실려 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93년 시애틀에서 열린 제1차 아펙 정상회의 때 18개국 정상을 모아놓고 지지 부진한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을 타결 짓기 위해 유럽연합에 공동으로 압력을 가할 것을 제의했다. 다른 정상들도 이에 동조했고 결국 그 해 12월 장장 7년 동안의 협상과정을 마무리 짓고, 우루과이라운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을 가능케 했고 이로써 세계무역기구(WTO)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아펙은 단순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력의 기구의 위상을 넘어 침략을 합리화 하고,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WTO의 선봉장의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또한 태평양의 서쪽으로는 미주자유무역지역(FTAA)의 2005년 완성, 아시아 지역에는 ASEAN+3(한,중,일) 그리고 EU의 강력한 통합 등 이런 추세로는 전 세계가 3극의 블럭으로 분화되, 이들간의 경쟁이 격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미국의 싱크탱크 연구소에 의해 제기됐다. 이런 추세는 태평양이 동-서로 분리되지 않도록 하면서, 동시에 배타적인 무역 블럭을 형성하지 않게 하기 위한 아펙의 '개방적 지역주의'로 이어진다.

'개방적 지역주의'는 아펙의 역내 국가들 간에는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가들에게 역내자유화 조치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를 강조하는 아펙의 '개방적 지역주의'는 WTO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달성을 위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13차 05부산아펙회의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

[출처: 부산아펙공식홈페이지]
2005년 부산 아펙 회의의 모토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이다. 부제는 ‘보고르 목표 이행의지 재확인, 투명하고 안전한 기업 환경 확보, 격차를 넘는 가교 건설 확정’ 이다. 7대 역점의제로 △자유무역 증진 △반부패 △지식기반경제의 혜택 공유 △인간 안보 △중소기업 영세기업 및 여성 지원 △APEC 지원 △문화간 이해 증진 등이 상정되어 있다.

이번 아펙회의의 경우 그간 아펙이 해 왔던 국제적인 역할에 비추어 볼 때 12월 WTO 각료회의 협상을 앞두고 있는 만큼 표류중인 WTO 협상의 쟁점들을 사전에 정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역내 무역자유화 문제를 폭넓게 논의하며 전세계적인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제도적으로 보완하기 위한 방안들을 논의하며 쟁점이 될 부분들을 사전에 ‘다듬어 놓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측면에서 지난 달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은 워싱턴 미국 고위 관료들이 한 얘기를 들 수 있다. “오는 11월 아펙 한미 정상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양국간 FTA(자유무역협정)과 BIT(투자협정) 협상을 마무리 하자”고 제안 했는데 이 처럼 APEC회의를 전후로 하여 각국과의 FTA 협상 체결을 위한 논의들이 봇물 터지듯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2002년 로스까보스 회의에서 ‘반테러 협력 강화’를 재확인 하고 북핵공방에 대해 “우리는 북한이 더욱 적극적인 아태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혜택에 주목한다. 그러한 가능성은 핵무기 없는 한반도를 전제로 한다”는 아펙 정상와 별도의 성명을 채택한 배경을 고려 할 때, 또다시 북한정부를 압박하는 의제도 다뤄 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렇게 자본의 첨병 역할을 하는 아펙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은 부산의 지역 여론이다. 이미 노무현 정부는 ‘자유무역 질서가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선전해 왔고, 아펙회의가 진행되는 부산시의 경우 동북아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자본 유치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다는 지역경제 활성화론을 들고 나온 상황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아펙’을 지역경제 구조조정의 계기로 적극 사고 하고 있지만 부산 여론은 ‘부산지역경제활성화’라는 것에 착목해 아펙의 환상을 떨쳐 내기가 쉽지 않은 조건이 있다. 이제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는 아펙반대 국민행동(준) 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 운동단위 전체에 떨어진 상황이다.

APEC의 약사

1989년 호주 캔버라 1차회의
1990년 싱가포르 2차 회의 : 무역 및 투자 데이터베이스 검토, 무역진흥, 기술 이전 강조
1991년 서울 3차 각료회의 : 우루과이 연내 타결 결의
1993년 시애틀 1차 정상회의, 5차 각료회의: 무역자유화를 위한 추진 과제 설정, 매년 정상회의 개최 합의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 회의 : 보고르 목표 설정
2001년 상하이 회의 : 뉴라운드 조기 출범 합의, 반테러 공동성명 발표, 경제협력체로서의 정체성과 역할에 변화 나타나기 시작
2002년 멕시코 로스까보스 회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무역과 투자를 달성하기 위한 비전 제시
2003년 방콕 정상회의 : DDA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해 협력하는 등 WTO 가 추진하는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촉진해야 한다는 결의
2004년 칠레 산티아고 정상회의 : 무역, 투자 자유화를 통한 개발 추진, 보고르 선언 재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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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 아펙 , 국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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