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평화를 말한다는 것

[박기범의 어떤 동화책](2) - 무기 팔지 마세요

누구라도 뻔하다 싶은 것 앞에서는 눈길이 오래 머물지 않기 마련이다. 뻔한 기사, 뻔한 주장, 뻔한 드라마, 뻔한 코미디……. 그게 무엇이건 마찬가지다. 그것의 종류가 정보를 다루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정보로서 가치를 잃은 낡은 것이기 때문일 테며, 그것이 감동이나 웃음을 주려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이미 식상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뻔한 내용을 되풀이해 보거나 듣는 일은 얼마나 따분한가! 아니, 그런데 제목부터가 “무기 팔지 마세요!”라니? 이건 마치 ‘안전띠를 맵시다!’나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마세요!’ 같이 별 감동 없이 들리는 캠페인 구호처럼 다가오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뜻이 좋은 말일지라도 울림으로 마음에 스미지 않는다면 그건 지켜야 하는 하나의 수칙이나 잔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하물며 문학 작품의 제목이 그러하다니, 나로서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책의 제목이었다.

지난 한두 해 사이에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사회에는 ‘반전’이나 ‘평화’라는 것이 중심 가치로 자리하지 못했다고 기억한다. 아마도 우리역사 속에서는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을 비롯해 노동과 분단을 중심으로 한 생존권적 투쟁이 무엇보다 시급한 운동의 오랜 주제였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국제문제라 해도 당장 한반도의 이해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동북아문제를 살피고 개입하는 것 정도가 우리에게는 선결과제였다. 그에 견주어 절실함이 덜할 수밖에 없는 나라 밖 침략이나 분쟁의 문제를 후순위에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이르러 나라안팎으로 여러 조건과 정황이 달라졌다. 나라 안에서는 ‘웃음 띤 독재’로 차츰 개혁이 제도화되었고, 나라 밖으로는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노동과 자원에 대한 자본의 침탈이 전면으로 진행된 것. 그것은 곧 우리사회 내 운동의 요구와 조건을 크게 달라지게 했다는 말이며, 이후 시민들이 겪어가는 의식의 질적 변화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한국사회의 모순 극복은 전지구적 자본 지배에 맞설 때라야만 가능하다, 동시에 한국사회의 지배계급 또한 전지구적 침략에 손발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바탕의 흐름이야 우리역사의 특수성과 무관하게 수십 년 전부터 줄곧 이어져 온 것이겠으나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정권교체 이후 정치지형의 변화와 아이엠에프를 통한 구조조정, 시장개방, 노동시장의 유연화 따위로 삶의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자본 침략의 논리가 국내 정치와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 관철되면서 그것의 본질이 우리네 삶에 직접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더 이상 국가나 민족이라는 제한된 울타리 중심으로 사고하던 것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류의 권리’와 ‘개개인의 구체적 삶의 현실’이라는 가치와 주제로 그 눈길이 넓고도 깊어지게 되었다.

그 말은 곧 ‘나의 문제’와 ‘세계의 문제’를 각각 서로가 서로의 조건과 결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인식하며 하나로 고민하는 것이 한층 더 가까운 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요 몇 년 사이에 생태와 인권, 반전평화, 이주노동자나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권리 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까지 중요 이슈로 떠오른 것은 이러한 흐름 위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난감 탱크와 미사일,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아이들

이 책이 나온 것은 2002년 12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한 해가 지난 때이며 막 이라크 침략을 준비하고 있던 때이다. 세계가 한참 전쟁의 공포로 휩싸이던 때, 한국에서 보면 반전운동의 움직임이 갓 싹을 틔울 때쯤이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사회에 아직 ‘반전평화’라는 가치가 너른 바닥을 못하던 때, 앞으로의 세대를 걱정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에게 평화에 대한 교육이 모자란 것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반세기 전만 해도 그 엄청난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땅의 아이들이 오히려 다른 어느 나라의 아이들보다 전쟁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구경거리나 게임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는 것이 그 안타까움의 내용이었다.

해서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에는 뜻있는 어린이 관련 문학, 교육, 문화 단체들은 바로 손을 잡고 ‘어린이와 평화’라는 모임을 꾸리기도 했다. 전쟁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멋지고 신나는 놀이가 아니라는 것, 사람을 마구 죽이는 컴퓨터 게임이나 미사일, 탱크와 같은 장난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 거였다.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똑똑히 보고, 그 전쟁 아래에서 먼 땅의 동무들이 어떻게 아파하고 있는가를 함께 느끼기를,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과 평화라는 것에 대한 물음의 씨앗을 아이들 스스로 찾아가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 <<무기 팔지 마세요!>>가 나온 것은 바로 그러한 때와 맞닿았다. 어린이문학을 하는 곳이나 아이들 교육을 바로 가꾸고자 하는 분들 사이에서는 책이 나온 것을 아주 반기며 아이들과 함께 읽기를 권했다. 좋은 추천의 글이나 서평들도 여러 곳에서 속속 나오곤 했다. 허나 고백부터 하자면 그때 나는 솔직히 이 책이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이글의 맨 첫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제목부터가 너무 뻔하다 싶었으니 애초 땡기는 마음도 없었다. 아이들에게 전쟁은 나쁘다는, 평화가 좋다는 그러한 교훈을 담은 얘기이겠거니, 책의 제목부터가 그러한데 내용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먼저였다. 그리고 뒤이어 가진 생각은 내용이야 둘째치고라도 여하튼 주제 자체는 옳고도 소중한 것이니 많은 분들이 반겨 환영하는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읽었다. 글쎄,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읽고 나서도 아쉬움이 컸다. 그러니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이 책을 읽고, 또다시 지금 이 책을 읽고 나서 돌이켜보면 그 때 내 아쉬움은 순전히 잘못된 나의 독서 태도에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는 책의 제목에 대해 가진 선입견이 그러했고, 또 하나는 당시 책을 읽을 때 이 책의 독자가 어린이, 그것도 전쟁이라는 것을 온통 영화나 게임 정도로나 여길 수밖에 없게끔 길러져온 이 땅의 어린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내 고민에 몰입해 있던 상태에서, 그래도 전쟁을 다루는 책이라면 좀 더 실감에 육박하는 전쟁의 아픔과 고통, 전쟁으로 겪는 인간 삶의 진실을 직접 그린 거라면 좋겠다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고, 아쉬움이란 전적으로 그 기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아쉬움이었으니 말이다. 내 마음대로 기대를 해놓고, 그 기대와 다른 빛깔이라 하여 실망스러움을 느꼈으니 그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었나!

비비탄 총알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

이야기는 한국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시작한다. 보미라는 5학년 여자아이네 반. 보미네 반에서는 남자 아이들 사이에 한참 총 장난감 열풍이 불었다. 총알만 비비탄일 뿐 진짜 같은 장난감 총. 한 남자아이가 쏜 비비탄 총알에 보미가 맞는다. 처음에는 아픈 게 화가 났지만 날이 지나도 총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여전하다. 학교에서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다 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동네 골목,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 더욱 얄미운 얼굴로 총을 쏜다. 여기에서 보미는 총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를 고민하지만 총알에 맞을 때마다 어른에게 이르는 것으로는 아이들의 총 놀이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친다. 보미의 생각은 아이들이 총을 가지고 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아무리 장난감이어도 총과 같은 무기는 왜 장난감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수수께끼처럼 풀어간다. 총알을 쏘아 맞추었다고 해서 장난감 총 자체를 가지고 놀아야 안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야구공을 사람에게 던져 맞춘 일이 있다고 모든 아이들이 야구공을 가지고 놀면 안 된다고도 할 수 있는가? 총과 야구공은 어떻게 다른지…….

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면서 보미는 동무 민경이와 함께 자신들이 찾은 해답을 학교의 아이들에게 알리기 시작한다. 보미와 경민이가 처음 시작한 일은 벽보를 만들어 학교의 문과 복도에 붙이는 일. 이렇게 보미의 캐릭터 형상 없이 줄거리의 뼈대만 놓고 보면 보미의 행동이 아이답지 않아 어색해보일는지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아이들이 스스로 벽보를 만들어 붙이는, 말하자면 ‘운동’을 해나가는 모습이 현실의 실감과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허구가 아무렇게나 엉뚱하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처음부터 보미와 민경이, 담임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 같은 인물을 그리면서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허구의 공간을 새로이 창조했다. 말하자면 보미는 장난감 총에서부터 무기, 전쟁, 평화 같은 것을 고민하는 모습이 약간 애어른 같다 싶기도 하지만 그 밖의 집이나 교실, 동무들과 함께 있으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 심리를 보면 여느 골목 놀이터에서라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이 모습 그대로다. 아이들의 ‘무기 팔지 마세요!’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도 한 번씩 어른들의 잘못을 꼬집는 말로 은근히 아이들의 행동을 응원하며 흐뭇해하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보아도 이미 작가가 그리는 이 학교의 분위기는 여느 학교와 다르다는 것을 자연스레 일러준다. 낯설음은 첫 느낌 잠깐일 뿐 독자는 어느덧 작가가 설정해 놓은 인물들의 말과 움직임에 함께 호흡하게 된다.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초등학교, 만나지 못한 이들일 뿐 어딘가에 있음직해 보이는 학교와 아이들, 어른들로 말이다.

보미와 민경이의 ‘무기 팔지 마세요!’는 벽보에서 시작해 동무들과 함께 돌려 읽을 전단지를 만드는 일로, 나중에는 무기 장난감 수거함까지 만들어 집에 있는 총이나 탱크, 미사일 같은 장난감들을 모으는 일까지 벌여나간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각각이며 독특한 캐릭터의 담임선생님과 교장 선생님 모습들은 이야기의 전개에 한껏 맛을 더해준다. 우여곡절 끝에 많은 아이들의 호응을 얻어 무기 수거함에 장난감 무기들을 가득 채우게 된 보미와 그 동무들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문제에 부딪게 되고, 끝내 아이들은 장난감 무기들을 그것을 파는 학교 앞 문방구들과 그것을 만들어 낸 장난감 회사들로 보내기로 한다.

이미 이 일은 보미 혼자의 일이 아니라 뜻을 함께 하는 6학년 언니 오빠들과 아래 학년 동생들 모두의 일이 된 뒤다. 이로써 보미 네가 하는 일은 또래 동무들에게 ‘전쟁놀이를 하지 맙시다!’에서 시작해 어른들을 향한 ‘전쟁무기를 팔지 마세요!’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관심은 장난감 무기에서부터 진짜 무기에 대한 생각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군인들, 울부짖는 어머니들, 굶주린 아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넓혀간다. 장난감 무기를 문방구로 돌려주는 작은 행진을 한 보미네의 이야기는 작은 한 어린이신문으로 소개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해서 보미네 아이들은 먼 곳에서 소식을 전해오는 동무들과 함께 인터넷 위에서 ‘평화 모임’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면서 전체 동화의 전반부를 마치게 된다.

마치 판타지처럼 자연스레 넘나드는 아이들과 막내 염소

책의 후반부가 펼쳐지는 배경은 미국이다. 미국의 초등학생 제니는 학교에서 발표할 것을 준비하다가 인터넷에서 한 흥미로운 사진을 보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미가 ‘무기 팔지 마세요!’ 하고 쓴 노란 푯말을 들고 서있는 사진. 제니는 한글로 써 있는 푯말 속 글자를 읽을 수는 없지만 사진 아래 붙어 있는 설명을 보고 그 뜻을 짐작한다. 그리고는 제 또래 아이인 보미의 모습에서 용기와 생각의 씨앗을 얻어 미국에서 무기를 파는 문제에 대해 똑똑히 생각을 다듬어 발표하게 되는 것이다. 제니가 생각의 씨앗을 펼쳐가는 것 또한 미국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을만한 일에서 출발한다. 보미가 비비탄 장난감 총에서부터 그러했다면 제니는 해마다 미국에서 총에 맞아 죽는 아이들이 하루 평균 12명을 웃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모두 2억 3천만 개로 거의 미국 전체의 인구수와 맞먹는다는 것, 교실에서 아이가 아이에게 총을 쏘아 죽게 한 일이 비일비재 하다는 것들을 말하며 어린 제니의 고민과 관심이 충분히 그럼직하다는 것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제니의 발표를 기특하게 여긴 로빈슨 선생은 다음에 있을 학부모 모임에서도 제니가 교실에서 한 발표를 한 번 더 하게끔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 일을 계기로 해서 제니와 ‘진짜 엄마 모임’, ‘막내 염소들의 모임’ 이야기는 펼쳐진다. 실제로 미국에서 ‘전국 총기 협회(NRA)’에 맞서는 단체로 ‘백만 어머니들의 행진’이라는 모임이 있는데 2000년 어머니날에는 워싱턴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백만 명의 어머니들이 ‘총기 규제 법안’ 입법화를 외치며 집회를 갖기도 했다. 이 동화에 나오는 ‘진짜 엄마 모임’은 바로 거기에서 착안을 한 것이라고 작가는 뒤에 밝혀 놓았다.

제니를 중심으로 한 미국에서의 이야기에는 엄마 염소와 일곱 마리 새끼 염소, 그리고 늑대가 나오는 우화가 잠깐 등장하면서 제니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새끼 염소와 늑대, 그리고 진짜 엄마와 손에 밀가루를 바른 늑대라는 가짜 엄마의 모습이 되곤 한다. 다시 말해 입으로는 평화와 자유를 떠들면서 무기 장사를 하려는 이들은 ‘손에 밀가루를 바른 늑대’로, 무기 판매 반대에 나선 어른들은 ‘진짜 엄마 염소’라는 비유가 마치 판타지처럼 넘나드는 것이다. 제니와 ‘함께 무기 팔지 마세요!’를 하는 아이들은 ‘막내 염소’가 되고 말이다.

저기 우두커니 서 있는 꼬마 염소는
들판이 아무리 푸르러도 배가 고프지
왜냐 하면 쇠로 만든 풀잎이거든
쇠로 만든 풀잎을 먹을 수는 없거든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평화롭던 들판에 총알을 뿌려 놓았을까?
이봐, 거기 우두커니 서 있는 꼬마 염소야
이제 우리도 떠나야 할 때야
비에 젖은 들판은 벌겋게 녹슬어 갈 테고
결국에는 아무도 살 수 없게 되겠지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총을 팔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책의 내용 가운데 샘 말리라는 미국의 가수가 막내 염소들이 벌이는 운동을 격려하는 뜻으로 지어준 노래. 209쪽)

현실의 거리로 뛰쳐나온 동화책 속 아이들

이 책을 다시 읽은 건 2003년 이라크에서 돌아온 뒤였다. 이 안에 나오는 보미, 민경이, 경민이, 수연이, 제니, 그리고 ‘진짜 엄마’ 모임과 막내 염소들……. 어느덧 이 아이들은 동화책 안에만 있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이 아이들은 나와 함께 바그다드 거리를 거닐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 핫산과 세이프, 모하메드와 알라위를 만나는 어린 동무들이었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손수 그린 그림과 편지를 보내주었고, 나는 그것을 이라크의 아이들에게 건넸다. 처음 책을 볼 때만 해도 실감이 떨어지는 지나친 과장, 혹은 현실감 없는 관념의 허구라는 느낌이 앞섰는데 다시 읽을 때는 그게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이 동화책 속의 아이들은 끊임없이 만날 수 있었다. 대학로에서, 광화문에서, 평택에서, 울진과 여수, 인천, 시흥, 임진각……. ‘진짜 엄마’들은 엄마의 마음으로 이라크 아이들을 함께 품으며 아파했고, ‘막내 염소’들은 얼굴에 고운 빛깔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 ‘전쟁하지 마세요!’를 노래했다. 지난 해 추가파병 논란이 한참 벌어지던 때이던가, 서울의 광화문에서는 한 여성회의 이름으로 아이와 엄마가 함께 하는 ‘파병반대 평화놀이터’라는 모임을 갖기도 했다. 내가 정말 놀랐던 것은 그 때 평화놀이터에서 한 주된 행사 가운데 하나가 무기 장난감을 가져오는 아이들에게 동화책으로 바꾸어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었구나. 동화책 속에서 보미와 민경이, 수연이 같은 아이들이 벌이던 전쟁 장난감 수거 운동이 동화책 바깥의 현실로 떡 하니 걸어 나온 것이다.

이렇게 <<무기 팔지 마세요!>>는 작품의 안과 밖에서 평화의 물줄기를 이었다. 이라크 전쟁 뒤로 내가 참여해온 인터넷 모임 바끼통에서 또한 날마다 ‘진짜 엄마’들과 ‘막내 염소’들을 만나는 감동은 계속 되었다. 말하자면 바끼통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뒤 어린이 관련 단체들이 손을 잡아 가꾼 ‘어린이와 평화’ 모임을 내용적으로 부분의 맥을 잇고 있는데, 이곳에서 평화를 나누며 가꾸어가는 모습은 마치 보미 네 학교 아이들의 ‘평화모임’ 이나 제니의 ‘막내 염소들의 모임’, ‘진짜 엄마 모임’이 인터넷으로 평화의 수를 놓아가는 모습과 꼭 닮았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거의 날마다 전쟁 반대의 바람과 이라크 동무의 아픔을 나누었고, 많은 어머니들의 인터넷의 안팎에서 모임을 주도했다. 비비탄 총알 하나로 시작한 보미의 이야기는 이렇게 어느덧 현실로 이어져 전쟁의 한복판 피 흘리는 아이의 아픔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성급한 어른 독자의 눈으로만 보려 했다면 다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아이와 함께 호흡하는 현실 일상의 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폭력과 폭력의 판타지

이로써 나는 현실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의 살육, 불안과 공포, 아이들의 울부짖음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가 피해서는 안 될, 끝내 함께 해야 할 현실. 하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학교와 학원, 문제풀이와 시험에 짓눌리면서 컴퓨터 게임으로나 겨우 숨통을 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어른들이 만든 삶의 질서는 경쟁과 능력이라는 말로 탐욕을 제도화해 놓은 채 아이들을 끊임없이 그 안에만 머물도록 강요하고 있다. 경쟁과 능력이라는 말 뒤에는 언제나 도태에 대한 불안을 위협으로 느끼게 한다. 그 숨막힘 속에서 아이들에게 허용하는 것은 단지 소비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가상공간 속에서라도 남을 누르고 쓰러뜨려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 따위이다. 패스트푸드 음식을 비롯해 아이들의 입맛에 달콤한 음식이 넘쳐나는 세상, 놀이기구가 쌓이고 쌓여나는 데도 이 시대의 아이들이 지난날의 아이들보다 행복해보이지 않는 것은 왜 일까?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때려 부수고 죽인다. 겨루어 이긴다. 텔레비전 만화도 온통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악당을 쳐부수는’ 전사들의 활약이 펼쳐진다. 좀 더 센 것, 좀 더 자극적인 것으로 아이들을 현혹한다. 최신 무기와 초강력 미사일을 우상으로 삼게 한다.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과 텔레비전 만화에서 보아온 캐릭터 장난감에 열광하게 되고 ‘무찌른다’, ‘죽인다’는 말을 ‘아름답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가까이 여기게 된다. 이 시대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전쟁과 폭력의 판타지에 가두어 놓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학교와 학원, 경쟁과 도태에 대한 불안으로 아이들을 억압하고,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놀이공간을 내준다 해도 그곳에는 아주 폭력적 판타지만이 존재한다. 경쟁과 억압이라는 현실의 폭력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 해방감을 찾게 되는 것이 결국은 폭력의 판타지이니, 이 엄청난 악순환을 어찌해야 할까? 이것이 바로 자본의 시대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여기에서 잠깐, 아이들이 전쟁무기를 놀잇감으로 삼는다거나 컴퓨터 게임과 만화영화를 보면서 폭력을 멋지게 여기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더러 있을 줄 안다. 나 또한 너무나 그것에 노출되어 있고 길들여져 있기에 무감각하게 보아 넘길 때가 많다. 하지만 살짝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 얼마나 끔찍한지 모르겠다. 만약에 아이들이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이는 놀이가 아니라 독약을 만들어 먹이는 소꿉놀이, 성폭행을 하는 게임을 하거나 만화영화를 본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러할 때에도 ‘만화니까’, ‘게임이니까’, ‘놀이니까’ 하는 말로 보아 넘길 수가 있을까? 장난감 총을 가지고 노는 것 대신 가짜독약 소꿉놀이를, 전쟁 게임의 자리에 성폭력 게임을 대신해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끔찍하다 할 것이다. 전쟁무기를 가지고 노는 것, 게임과 만화영화에서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이래도 ‘원래 다 그러고 노는 것’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아이들의 일상에 바짝 다가선 자리, 아이들의 눈으로

현실은 포화가 터지는 전쟁터에도 있지만,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있다. 이러할 때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전쟁이라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바로 보고자 한다는 것은 각각의 자리에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하나는 전쟁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이들의 삶을 그들의 처지에서, 그들과 한 몸이 되어 그 아픔을 그대로 느끼는 일일 것이다. 이를 테면 바흐만 고바디 감독이 <<취한 말들의 날들>>이나 <<거북이도 난다>>와 같은 영화에서 그린 것처럼 전쟁 아래 고통 받는 이라크 어린이들의 삶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것이 그러할 것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관객은 어느 새 이야기 속 아이들의 처지가 되어 전쟁 아래에서 살아가는 폐허와 같은 삶을 함께 겪는다.

동화책에서 예를 찾자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권정생 선생님의 <<초가집이 있던 마을>>, <<몽실언니>>, <점득이네>>와 같은 한국전쟁을 다룬 소년소설이 그러하다. 이에 견줄 때 지금 읽은 <<무기 팔지 마세요!>>는 전쟁터의 삶을 직접 그린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 어디에도 전쟁의 실감을 주는 대목은 없다. 기껏해야 보미의 아버지가 보는 텔레비전 화면에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탱크가 구르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뛰는 장면이 다이다. 그것도 아주 나른한 일상에서 무덤덤하게 지나치는 화면 정도로나 비추어진다.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못내 실망을 느꼈다면 이렇듯 전쟁의 실감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읽으며 비로소 내가 깨달은 것은 이 이야기는 애초부터 전쟁의 실감을 다루려 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도 우리 아이들의 일상에 바짝 다가서서 이 아이들의 눈으로 전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을 먼 나라에서 벌이는 게임 같은 것 정도로나 여기는 우리 아이들의 자리에서부터 작가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교실에서 맞은 비비탄 총알 하나에서 장난감 총의 이야기로, 전쟁무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이야기의 무대는 미국으로까지 건너가고, 그곳에서 보미라는 한국의 여자아이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제니라는 ‘세계 제일의 침략국가’의 여자아이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진짜 엄마와 막내 늑대’ 라는 판타지로 현실과 우화를 넘나든다. 때문에 전쟁터의 이야기를 어설픈 관념으로 그리는 것보다 오히려 이 동화는 더욱 현실에 가깝다. 우리 아이들의 실감에 가깝다.

국경을 허물어 손을 잡는다는 것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미덕 가운데 하나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 아이들의 일상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면 내가 찾은 또 다른 미덕은 전쟁이라는 것을 말하는 데 있어 국가나 민족이라는 것을 경계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전쟁이라거나 침략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들려줄 때 걱정스러운 것 하나는 침략하는 국가와 침략당하는 국가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국가나 민족 전체에 대한 적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모습이다. 이를 테면 미국이 얼마나 나쁜 짓을 벌였는가, 일본이 얼마나 못된 짓을 일삼았던가 하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지나쳐 미국이나 일본 백성 전체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국가주의나 그릇된 민족주의에 갇혀 그것을 경계로 평화를 말할 때 갖게 되는 맹점이다.

요사이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더러 다른 자리에서도 하곤 했는데 이것을 크게 깨달은 계기는 이라크 아이들과 한국의 아이들이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http://daum.cafe.gibumiraq)을 보면서였다. 이라크의 아이들 처지에서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제 나라에 들어와 점령을 하고 있는 침략국가다. 하지만 이라크의 아이들은 군대를 보낸 한국 정부를 미워할지언정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오는 한국의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고마워한다. 평생토록 동무가 되자는 답장을 보내온다. 이것과 견줄 때 올 초 우리의 많은 교실에서 아이들이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독도 침탈 움직임을 두고 복수를 해야 한다, 쳐들어가자 하고 말을 하더라는 모습을 보면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우리 아이들이 일본 전체를 적으로 여기는 것대로라면 이라크 아이들 또한 한국 백성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옳지 않겠나? 이라크 아이들이 한국의 어린이들과 평화의 손을 잡듯, 우리의 아이들 또한 일본의 아이들과 마음을 이어갈 때 진정한 평화는 있다. 일본 지배 계급의 잘못된 행위에는 똑똑히 보아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일본 백성 전체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정의도 평화도 아니다. 나라 사이의 다툼이 있을수록 그 나라의 백성들 사이에 평화의 손을 잡아가는 일, 그러면서 서로자국 안에 있는 전쟁 세력들을 무력화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라는 것을 나는 이라크와 한국 어린이들이 가꾸어가는 사귐을 보며 다시금 절실히 느꼈다.

이 책에서 보는 제니의 이야기가 그렇다. 제니는 미국인이니 이 아이는 두 말 할 것 없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침략국가의 아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제니의 이야기를 통해 앤더슨 아줌마와 조셉 아저씨, 사만다 들처럼 미국에 있는 ‘진짜 엄마’와 ‘막내 염소’들을 보여준다. 비록 힘 있는 늑대들이 지배하는 미국이지만 평화를 바라는 보통의 시민들이 그 보다 더 많다는 것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보미를 비롯한 한국의 ‘평화모임’ 아이들과 제니와 ‘막내 염소들의 모임’ 어린이들은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평화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한 가지다. 실로 국적이라는 것은 분쟁을 둘러싼 현실에서 얼마나 평화라는 가치와 모순을 빚던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만 보아도 ‘국익’이라는 말을 앞세워 온갖 거짓과 궤변을 늘어놓던 이들을 떠올리면 금세 알 수 있다. 평범하고 소박하게 삶을 일구어가는 백성들에게 진정한 국적은 다름 아닌 ‘평화’이고 ‘평등’, ‘목숨’이다. 바로 이 책에 나오는 보미와 제니의 국적이 그러한 것처럼.


지하드가 아이들 사이에서 멀어진 까닭

2005년 6월, 나는 지금 막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요사이 전해지는 뉴스만 보아도 이라크에서는 침략과 점령의 아픔이 더욱 깊어만 가고 있다. 며칠을 걸러 검색해보는 외신만 살펴도 어느 날은 백여 명, 어느 날은 오십여 명씩 폭탄 테러와 점령군의 총질에 죽어간다. 더욱이 슬픈 일은 이라크 백성들 사이에서도 수니와 시아라는 종파간의 갈등이 더욱 조장되어 서로가 서로를 암살하고, 예배를 올리는 자리에까지 자살폭탄을 터뜨려 죽이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지난 오십 여 년 전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이 좌와 우로 갈려 이웃마을에 불을 지르거나 한 마을에서도 패가 갈려 증오와 복수심으로 서로를 죽이던 것처럼 말이다. 이 땅에 사는 백성이라면 누구도 그러한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좌익이나 우익 따위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백성도, 장터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도 어느 순간 가족과 식구가 아픔을 당하는 일을 겪으며 또 다른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산으로 올라가 산사람이 되었고, 또 누군가는 살기 위해 관복을 입으며 나랏밥을 먹게 되었다. 산에 올라간 이들과 관복을 입은 이들은 토벌대와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악다구니를 되풀이 했다. 지금 이라크에서도 마찬가지, 물론 그곳에는 시아와 수니라는 종파가 있기는 했지만 정작 평범한 백성들의 삶에서까지 그 갈등이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령군의 교묘한 분리 정책 아래에서 시아와 수니는 살기 위해 서로를 반목하게 되었고, 이제는 서로를 향한 테러와 암살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이 무엇보다 신성하게 생각하는 모스크 사원에까지 시아는 수니의 사원에, 수니는 시아의 사원에 폭탄을 터뜨릴 정도이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 게다가 우리의 토벌대와 빨치산이 총질을 서로 나누어야 했듯 그 땅에서는 저항세력이라 불리는 이라크인과 미군 아래에서 경찰 노릇을 하는 또 다른 이라크인이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일을 되풀이하는 아픔을 겪는다.

2003년 7월이던가, 나는 그 때 바그다드의 알마시뗄이라는 마을에 있었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준비를 할 때 몇몇 아이들을 사귀었다. 알라위와 지하드, 무스타파, 제이둔……. 어느 밤, 마을 곳곳에서 총을 마구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고 이튿날 알아보니 후세인의 두 아들이 잡혔다 하여 일어난 소동이라 했다. 총소리는 다름 아닌 시아파 사람들의 축포인 것이었다. 이 날 놀이방에 나갔을 때 지하드라는 아이는 몹시 좋지 않은 얼굴로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혼이 난 얼굴 같기도 했고 아니면 집에 무슨 일이 있어 우울해하는 얼굴 같기도 했다. 한 쪽에서 지하드가 그렇게 안 좋은 얼굴로 있을 때 저 편에서는 나머지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신이 나게 불렀다. 무슨 일이지? 지하드를 불러 다른 아이들 곁으로 데려다 놓았더니 지하드는 노래를 하는 아이들의 입을 막으려 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아이들은 지하드를 잡아끌며 떼밀었고. 나중에 알아보니 지하드의 식구는 부모님이 모두 후세인의 바트당을 지지하던 수니파이고 나머지 아이들은 시아파인 거였다. 지난 밤 지하드의 집에서는 후세인의 두 아들이 사살당한 소식에 몹시도 침통한 분위기였던 게지. 반면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의 분위기에 덩달아 신이 난 거였을 테고. 그 날 놀이방에서 아이들이 부른 노래는 후세인과 바트당, 수니 사람들을 조롱하듯 만든 거였다고 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일러라 일러 일본놈~’ 하는 구전 노래를 불렀듯 그곳 아이들이 놀며 부르는 구전 가락에 노랫말을 넣은 거였겠지. 그러한 아이들 사이에서 지하드는 슬픈 거였고, 따돌림을 받다시피 한 거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너나할 것도, 편 가름도 없이 사이좋게 놀던 아이들이었는데.

요사이에는 어떨까? 지하드와 나머지 아이들은 전처럼 그렇게 마을 공터에 모여 놀며 지내고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전쟁하는 자들은 이렇게 갈라놓고 갈라놓는다. 자신들의 침략 행위에만 그치지 않고 침략 받은 자들을 갈라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싸움을 벌이게 만든다. 흔히 전쟁에 상대되는 말로 우리는 평화를 말하는데 내가 생각할 때 평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친구가 되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이라크의 아이들과 한국의 아이들이 친구를 맺는 일, 이라크와 미국의 아이들이 손을 잡는 일,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들이 마음을 잇는 일, 그리고 시아파와 수니파의 아이들이 예전처럼 동무 사이로 돌아가는 일. 여기에서 ‘아이들’의 자리에는 ‘백성’ 혹은 ‘민중’이라는 말을 그대로 대입해도 좋다.


국제전범민중재판 - 세상의 막내 염소들과 손 맞잡으러 가는 자리

요사이에는 6월 중순 터키에서 열릴 국제전범민중재판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12월 우리는 삼천 명이 넘는 풀뿌리 기소인들의 손으로 사흘 동안 전범민중재판을 벌인 바 있다. 민중의 손으로 전범을 고발하는 이 재판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열렸고, 이제는 각국에서 벌인 전범민중재판과 반전평화운동의 성과를 한 자리에 모아 국제전범민중재판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터키에서 재판을 준비하고 있는 본부에서는 특히나 한국 쪽 전범민중재판의 과정에 주목한다는 뜻을 전해왔다. 개별 국가의 민중재판은 한국 말고도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기는 했지만 한국처럼 풀뿌리 민중들이 손수 기소장을 작성하여 만들어낸 민중재판의 전형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거였다. 이제 보름 뒤면 한국 쪽 참가단이 이 땅에서 가꾸어온 반전평화의 뜻과 마음을 전하러 터키로 떠난다. 그 길에는 시민들이 손수 작성한 기소장들부터 아이들이 과자에 그림을 그려 넣어 니스를 발라 만든 버튼들까지 온갖 평화의 전언을 함께 가지고 간다. 우리는 동무가 되고 싶은 것이다. 점령으로 고통 받는 이라크 백성과 동무가 되고 싶고, 침략국가에서 살지만 ‘평화’를 국적으로 삼고 싶어 하는 미국 영국의 민중과 함께 동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손을 잡고 싶은 것이다. 터키와 이탈리아, 벨기에와 인도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시민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싶은 것이다. 우리와 같은 파병국 처지에 있는 일본의 ‘막내 염소’들과 평화의 손을 잡고 싶은 것이다. 그리해서 전쟁을 벌이는 이들이 내민 흰 손이 밀가루를 바른 늑대의 손임을 함께 고발하고자 하는 일이다. 아이들과 함께 평화를 말한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막내 염소들과 동무의 마음을 가꾸어가는 일일 것이다. (2005. 6. 2)
덧붙이는 말

박기범 님은『문제아』,『새끼개』,『어미개』 같은 동화책을 썼다. 아이들과 함께 참세상을 가꾸어 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동화책 이야기를 연재한다. <<무기 팔지 마세요>> (위기철 지음, 이희재 그림, 청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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