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다자협상 숨통 열어준 제주선언문

각료회의 앞두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

지난 3일 한, 미, 중 등 21개 아펙 회원국들이 제주선언문을 채택했다. 공산품 관세 인하와, 서비스 분야의 높은 수준의 자유화 합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비농산물 분야 교역에서 관세감축 방식인 '스위스 공식'(swiss formula)을 적용하기로 했다. 각 나라의 관세율의 차이를 배제하고 비슷한 수준으로 감축하는 방식이다. 아펙 참가국들은 DDA의 주요 의제인 서비스 분야에서도 높은 수준의 자유화 목표를 수립하는 방향을 잡고, 올해 말 홍콩 각료회의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얻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의장 성명을 통해 "회원국들이 선진국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 무역·투자 자유화를 달성하기로 한 보고르 목표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고, 도하협상을 위한 실질적이고도 중요한 진전을 이뤘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사실로 이루어진다면 WTO DDA 협상으로 세계 무역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초국적자본에게 머지 않아 한국인 김현종은 구세주로, 제주는 복음의 도시로 기록될 지도 모른다.

1999년 씨애틀 각료회의는 반세계화 시위대에 의해 봉쇄 당했고, 반세계화의 물결을 피해 사막 한 가운데에서 숨바꼭질하듯 모여 결정한 DDA도 2003년 칸쿤에서 커다란 좌절을 맛보았다. WTO체제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다자협상의 꿈은 산산조각 나는 듯 했다. 초국적자본은 본능적으로 자유무역협정으로 눈을 돌렸고, 무역장벽 철거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협상 기한 1년이라는 생명연장의 꿈에도 불구하고 WTO 다자협상에 대해 자본 진영조차 어두운 전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홍콩 각료회의를 불과 6개월을 남겨둔 지금, 제주에서 발표된 제주선언문은 제국주의와 자본 진영에게 한 줄기 서광을 비춰준 셈이다.

주지하듯 노무현정권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철학으로, 신념으로, 종교로까지 받아들인다. 자유무역협정의 전도사로 불리는 김현종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앞만 보고 몰아부쳐야 한다"는 신념으로, "개혁 개방이 동북아경제중심을 건설하고 국민소득 2만달러에 다다르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라며 개방주의 시장주의 통상정책의 좌장을 자임해왔다. 김현종을 앞세운 한국이 스위스 공식을 주도한 이유는 간단하다. 개도국의 공산품 관세율이 현재보다 절반만 낮아져도 한국에 100억달러 이상 수출이 늘어나는 효과를 갖는다는 단순한 계산이다. 이 경우 자동차, 반도체, 가전제품, 모바일 등 공산품 수출에 큰 효과가 있다는 건데 노무현정권과 통상개방론자들은 이러한 이해관계와 맞물려 난관에 봉착한 DDA 협상에 돌파구를 마련해준 셈이 되었다.

물론 홍콩 각료회의에서 148개국이 만장일치로 협상을 완료하게 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아펙 국가간의 교역은 세계 교역량의 46% 규모로, 12월 홍콩 각료회의에서 이 방안이 채택되면 관세 장벽이 크게 제거돼 자본의 파격적인 이동이 보장될 것이고, 설령 채택되지 않더라도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로 기록될 것이다. 12월 홍콩 각료회의가 이번 합의를 받아들일 경우, 2006년 말 협상을 타결 짓고 2007년 상반기 각국이 절차를 마무리하기까지 일사천리로 줄달음치게 된다. 다른 변수가 없다면 2007년 말부터는 농산물, 공산품, 서비스 부문 전 분야에 걸친 새로운 국제 무역질서가 형성된다. 새로운 국제 무역질서가 가져다 줄 새로운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이겠는가.

세계의 반세계화 운동가들은 도하개발의제가 추구하는 '무역자유화'가 초국적자본의 시장 지배력을 강화할 것이므로 시종일관 반발하고 반대하고 비판해왔다. 특히 식량·교육·의료·에너지 등 민중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가 상품화되어 초국적자본의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바뀌는 데 대해서는 격렬하게 저항해왔다.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권리가 파괴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씨애틀과 칸쿤에서 각료회의가 무산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문제제기와 저항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반대 국민행동'이 농업,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 DDA 협상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내고 제주선언문이 갖는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방통상주의자들은 이러한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욱이 개방화 시장화로 인해 파괴되고 있는 민중의 삶의 현실은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오직 국가경쟁력과 협상력 강화로 개방화 시장화 속에 주도권을 잡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가령 5월 19일 WTO반대국민행동 등이 공동주최한 'WTO DDA 서비스협상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 토론회에 나온 김준동 외교통상부 DDA심의관은 "DDA 서비스협상을 통해 서비스 산업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전략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공공성을 위협하고, 노동유연화를 강화하고, 항시적 경제위기에 노출되고, 공공적 관리 운영 체제가 약화되고, 결국 사회구성원의 삶을 위협하게 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했다. 그는 경쟁력 강화가 곧 국익이자 국민경제에 도움을 주게 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명제만 거듭 되풀이했을 뿐이다.

제주선언문은 이렇게 앞만 보고 달리는 개방통상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경쟁과 효율, 착취와 투기 이데올로기의 결정체이다. 제주선언문은 오늘날 개방화 시장화와 경쟁력만이 능사라는 자본의 논리를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받아들일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그래서 제주선언문은 토지와 종자, 식량, 지식에 대한 권리, 그리고 의료·교육·에너지·문화·물 등 필수 서비스를 누릴 권리, 필요한 의약품을 공급받고 생명을 지킬 권리를 위해 싸워온 세계 민중들에게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6월의 시작과 함께 들려온 제주선언문 채택 소식, 실로 우울하고 불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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