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을 당신들 마음대로 결정하지 마라

[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3) - 국철노동자의 18년간의 복직투쟁

일본은 철도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전체가 방사선처럼 연결되어있다. 4개의 큰 섬으로 구성된 일본으로서는 철도를 통해 사회전체를 연결함으로써 빠른 경제성장의 기반을 형성하였으며, 60년대 중반의 신칸선은 이러한 일본경제성장의 상징이기도하였다.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신칸선, 한치도 틀림없이 타는 장소에 멈추어서는 전철의 특성은 일본인의 문화를 상징하기도하고, 직업의식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철도의 화려한 외양 속에는 국철의 민영화과정 속에서 8만 명이 넘는 대량해고와 노사협조주의, 그리고 현재까지 끝나지않는 1047명의 복직투쟁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않다. 게다가, 신칸선에 의한 고속운영과 철도의 [정확한 시간]을 요구하는 내부규율의 이면에는 철도노동자들의 높은 노동강도와 처벌을 우려하는 심리적 중압감이 자리잡고 있으며, 철도기관사들의 잦은 자살도 이러한 노동조건을 반영하고 있다. 민영화 이후 저항의 수단을 잃어버린 노동운동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8만명의 해고, 1074명의 끝나지 않은 투쟁. 18년전에 해고될 당시 1살이던 애가 이제는 대학생 1년이 되었으며, 그동안 아버지는 매일 아침 철도역앞에서 도시락을 팔면서 출근투쟁과 복직투쟁을 하고있다. 홋카이도에서는 어업을 하면서, 나가노에서는 편의점을 하면서, 이들의 복직투쟁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일본노동운동의 마지막 자존심과 최후의 방어선에 서 있다는 이들의 18년간의 장기투쟁, 과연 국철노동자투쟁이란 무엇이었을까? 왜 그들은 18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재취업을 하지않고 국철에의 현직복직투쟁에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일까?

국철투쟁은 오늘날 일본의 노동운동의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아직도 이 투쟁은 진행형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의 변화의 시점에서 이러한 일본 국철 노동자투쟁을 다시금 검토해 봄으로써, 우리 노동운동의 변화 발전에 있어서 얻어야 할 교훈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한다.

1.국철민영화의 계기

198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레이건대통령, 영국의 대처수상, 일본의 나카소네수상이 등장하여, 작은정부, 시장원리에 기반한 자유경제를 표방하면서, 정부규제의 완화 및 철폐, 그리고 공공업체의 민영화를 강력히 주장하기시작하였다. 이것은 이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조류를 만들었으며, 일본에서는 이러한 조류에 발맞추어 국가 프로젝트로서 [국철개혁]을 공개적으로 표방하였다.

[국철개혁]이라함은 거액의 채무를 지고 경영위기에 빠진 일본국유철도(국철)의 재건을 의미하였으며, 정부는 민영화 라는 표현대신 국철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국가프로젝트로서 이것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하였다. 당시 국철은 거액의 설비투자와 보수작업으로 인해 경영이 점차로 악화되고 있었으며, 1964년에 적자로 전락한 이후 매년 누적되고 있었다. 국철의 마지막해인 86년도에 이 적자액수는 약 27조엔까지 부풀었다. 이것은 국철의 일년 경영수익의 8배가 넘는 액수이며, 이자는 년간 1조3000억엔에 이르렀다. 국철의 경영을 재건하기위해서는, 이 부채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당시 국철개혁의 포인트가 되었다.

나카소네 정부는 87년4월1일에 실시된 국철개혁안에서 국철을 법인체로 계승시켰으며, 차입금변제를 담당하는 국철청산사업단(이하 청산사업단)과, 국철이 현물출자를 하여 설립한 JR(일본철도)에 이 부채를 분할하였다. 청산사업단은 전체 채무총액 37조엔중 26조엔을 받아안았고, 국철이 소유하고 있던 방대한 유휴지를 그 대가로 인도하였다. 한편, JR에는 철도경영을 궤도에 올리기위하여, 국철의 채무액중에서 단지 6조엔정도를 담당하였고, 약 8할 이상은 면제를 받았다.

부채를 국민들에게 떠넘기는 이러한 방식의 분할민영화에 국철노동자들과 일본국민들로부터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민영화는 국철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최종적으로는 실시되었다. 하지만, 국철개혁은 단지 국철 민영화에 그치지않고, 정권과 자본은 국철노동자의 대량해고를 통해 경영의 적자를 만회하는 한편, 차별채용을 통해 당시 투쟁하는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총평내의 핵심적인 강경노조였던 국철노조를 분쇄하고, 총평의 해체를 통한 노동운동의 무기력화를 노리는 [국가적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2. JR채용차별사건의 발생

분할민영화정책으로 추진된 국철민영화에는 인원삭감과 JR에의 채용자 선별과정에서 [JR채용차별사건]이라는 것이 발생하였다. 이 [JR채용차별사건]이라는 것은 국철개혁에 찬성하였는가 반대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채용에 차별을 둠으로써 당시 국철민영화를 반대하였던 국철노조원들에 대해서 조직적인 채용차별을 한 사건을 의미한다.

국철의 직원은 86년도에 당초 약 27만7000여명이 있었는데, 정부는 JR에의 채용인수를 21만5천명으로 결정하였고, 국철당국은 희망퇴직자를 모집하는 한편, 개혁에 반대하는 노동조합에 노골적인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86년7월, 국철은 전국1010개소에 [잉여인원]을 일괄관리하기위하여 [인재활용센터]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 [인재활용센터]에 보내진 사람들은 국철개혁에 반대한 국철노조, 전동노조, 치바동노조의 조합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87년11월, 전국1547개소에 보내진 직원은 2만1000명을 넘었고, 국철노조원은 80%를 차지함)

또한, JR의 국철노조원들에 대한 채용차별은 조직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들어 인원 삭감이 심했던 홋카이도, 큐우슈우지역을 보면 민영화를 반대했던 국노와 전동노의 불채용율이 국노52.0%, 56.9%, 전동노 71.9%, 68.0%인 것에 비해, 개혁지지파의 철도노련 , 구동력, 철사노 등은 거의 0%퍼센트에 가까웠다. 다음의 표는 홋카이도와 큐우슈우지역의 국철내 각 노조의JR불채용율을 비교한 것이다.


이처럼, 국철개혁에 반대하는 국노조합원들의 생각을 바꾸고, 국노를 희생양으로하여, [국철개혁]을 진행하고, 조합의 약체화와 해체를 기획하기위한 당국의 의도는 명백하였다. 그 결과 국노의 조합원은 86년5월에 18만7000명이었지만, 87년4월에 4만4천명까지 급감하였다. 또한, 최종적으로 20만명이 JR에 채용되어 정부가 당초 예정하고있던 21만5천명에 이르지 못한 인원공백이 초래되었지만, JR채용을 요구한 국철노조원은 거의 채용되지 않았다. 이로써 근 1년간 국철에서 8만명이 해고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JR에의 채용을 희망하면서도 불채용이 결정된 국철직원은 7600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87년4월1일, 재취업이 결정되지 않은 채, 국철청산사업단에 보내졌다. 이들 중 대부분이 청산사업단에서 3년간에 걸친, 직업훈련과 재취업 알선을 받아 다른 곳으로 취업을 하였지만, 이것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고향의 JR에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자들 1047명(가운데 국로조합원 966명)은 90년4월1일, 최종적으로 청산사업단에서 해고되었다. 이들이 이후 노동위원회와 재판장에서 싸우고 있는 당사자들이며, 이들 1047명의 JR불채용 차별문제를 소위 [1047인 문제]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현재 3개의 투쟁단에 속해있으며 그들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3.전투적인 노동운동을 분쇄하기위한 국철과 국가의 전략

국철민영화문제는 이처럼 리스트라(대량해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후 [투쟁하는] 노동운동을 분쇄하고 새로운 노사관계를 정립하고자하는 국가와 자본의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있었다는 데 또 하나의 문제의 본질이 있다.

전후의 일본노동운동은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가 주도하였고, 이들은 사회당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여 왔다. 총평이 탄생하였을때 당시 총평내 최강조합으로 말하여졌던 전산노조는 1952년에 전력9분할의 형태로 민영화되어 해체되었으며, 다음으로 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던 전자닛산도 53년 300일간의 총파업이후 동일방법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60년대 안보투쟁과 동시에 출발하여 동쪽은 안보투쟁, 서쪽은 미츠이미이케 탄광투쟁으로 불릴만큼 대중투쟁의 파고를 높였던 또 하나의 총평내 핵심조직은 탄광노조의 분할이라는 형태로 조직적인 패배를 하였고, 총평내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거점들은 하나둘씩 파괴되어 갔다. 이후 국가와 자본은 1980년에 마지막으로 남은 총평의 대지주격인 국로를 분열, 민영화하기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JR채용차별로 인한 국노노조원들에 대한 조직적인 불채용으로 총평이 결정적으로 약화된 시기에, 렝고창설안이 대두하였다.

국철민영화를 직접 실시한 나카소네 수상은 96년 주간지 [AREA(12월30일자)와의 인터뷰에서 국철민영화의 목적에 대해서 [총평을 붕괴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국노가 붕괴되면, 총평이 붕괴될 것이라고 명확히 의식하면서 실시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의도는 적중하였고, 국노가 산산조각이 남으로써, [국철개혁]이 끝난후, 총평도 2년후인 89년의 렝고(연합)의 발족과 함께 해산하였고, 총평의 해산과 함께 중요한 지지기반을 잃어버린 사회당도 정치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4.수선사대회에서 시작된 국철노동자의 저항

1986년 10월9일 수선지(修善寺)에서 역사적인 국노임시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첫날토론은 시작부터 격론을 벌였고, 정족수미달로 다음날로 연기된 무기명투표에서 노조집행부의 [노사협약안]은 조합원의 다수 반대로 부결된 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였다. 결국 집행부는 총사퇴를 하였고, 신임위원장이 선출되었다. 이 수선지대회는 국철노동조합이 국철의 분할 및 민영화룰 반대하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 것을 의미하였으며, 이후 국철노조 투쟁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JR채용차별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까지 고향의 JR에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자 1047명이 90년4월1일, 최종적으로 청산사업단에서 해고되었을때, 국노는 채용차별에 대해서 JR에서 국노를 배제하려는 노조차별이라고 규정하고, 도쿄도지방노동위를 시작으로 전국의 17개소의 지방노동위에 구제를 신청하였다. 지방노동위는 90년 중반까지 전 지역에서 JR의 부당노동행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으며, 87년4월까지 소급하여 이들 채용차별자들을 JR에 채용된 인원으로서 취급할 것을 요구하는 구제명령을 내려, 국노조합측의 전면승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JR은 중노위의 명령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였고, 오랜 재판끝에, 1998년 5월28일 사태는 마침내 역전되어 버렸다. 도쿄지방재판소가 JR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여, 중앙노동위의 명령은 위법이며, 취소를 결정하였고, [JR과 국철은 별도 회사이며, 국철의 부당노동해위책임을 JR이 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결하였던 것이다.
이 도쿄지방재판소의 판정은 JR채용차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명부를 작성한 국철의 책임이며, JR설립위원회 또는 JR에 책임이 없다고 판단을 한것이다. 하지만, 국철의 명부를 그대로 받아 실시한 JR의 의도는 판단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자본가들의 또 하나의 궤변에 불과한 것으로 국노는 인식하였다.

5. 4당합의안거부와 법정투쟁의 시작

국노와 노동자측은 도쿄지방재퍈소의 판결이후, 자신감을 상실하였으며, 패배주의에 빠졌다. 대조적으로 정부, 자민당은 자신감을 얻었으며, 국노에 국철개혁법의 승인을 요구하였으며, 국노는 99년3월 전국대회에서 이것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자민당과 사회당의 최종교섭은 암초에 부딪혀 더이상 진척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가운데 2000년 5월30일,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의 여당3당과 사회민주당에 의해서 소위 [4당합의]가 제안되었다.

그 내용은 JR불채용문제에 대하여 [인도적관점]에서 빠른 해결을 노력할 것, 하지만 국노가 [JR에 법적책임이 없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임시전국대회에서 이것을 결정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부당노동행위 위에 [국철개혁]이 서있다는 역사적인 오점을 국가와 자본이 철저히 지우고자 하였던 정당화의 노력이었고, 반면 노동자측에게는 굴욕적인 제안이었다.

2000년 7월1일, 도쿄에서 열린 국로임시전국대회에는 전국에서 투쟁단원과 그 가족들이 모여, [4당합의]반대를 외치며, 대회는 어수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남편의 복직을 위해 오랜 투쟁에 동참해 온 해고자가족회의 후지야수(藤保)씨가 단상에 올라가 가족들의 생각을 전달하며 대의원들에게 호소를 하였다.

[우리들의 인생을 당신들 맘대로 결정하지 말아주세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생활이 지속되더라도, 가족이 원하는 것은 아빠의 해고철회, 그리고 우리들의 고통스러웠던 14년간에 대하여 사과하는 것, 우리들은, 우리들의 시간은 그때이후(JR불채용이 결정된 87년2월16일) 정지해 있습니다. ]

이 모습은 국철해체에 의한 국노조합원의 차별, 부당해고문제를 15년 넘게 기록해온 영화 [인간답게 살아가자-국노겨울이야기(人らしく生きよう-國勞冬物語)]에 기록되어있다. 결국, 국노집행부는 투쟁단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여 [4당합의안]을 채택하지 못하였으며, 이후 3번연속 강행처리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 국노집행부는 2001년1월27일, 폭설속에 경시청기동대 1000명을 배치한 상태에서 반대파를 억누르고 4당합의안의 수락을 강행처리하였다. 당연히 투쟁단과 그의 가족및 지지자들은 이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투쟁단에게 있어서 4당합의는 [해고에 반대하는 인간에게는 본래 현장에 복귀할 권리가 없다]라는 것을 국노해고자들에게 인정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투쟁단에도 4당합의안은 분열을 가져왔으며, 최종적으로 국노해고자966명중 300명이 [4당합의NO]를 표명하는 새로운 쟁의단을 구성하였다. 하지만, 국노집행부는 이들 300명을 일부투쟁단으로 규정하면서, 조직과 운동에서 이들을 배제하였고, 22명의 조합권리정지처분을 실시하였다. 결국 반대파에 대한 물리적 제거를 통해 합의안을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나, 쟁의단은 도쿄지방재판소의 판결에 굴하지않고, 최고재판소에 상고하는 한편, 투쟁단 및 유가족283명은, 국철청산사업단의 후신인 일본철도건설공단을 상대로, 2002년 1월, 지위확인소송을 제출하였다. 한편, 2003년6월, JR채용차별사건은 [결사의 자유원칙, 즉, 채용에 있어서 차별대우의 측면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이며, [공정한 해결을 이끌어야한다]라는 ILO(국제노동기구)권고가 제출되었다. (2004년6월에는 6번째의 권고가 제출되고 있다)

하지만, 동년 12월15일, 최고재판소는 [JR사용자책임]에 대한 국노, 전동노의 상고를 기각하였으며, 12월22일에는 중앙노동위의 상고에 대해서도, 최고재판소2심에서 3대2의 다수의견으로 [JR에 법적책임이 없다]고 판결을 하였다. 이것으로 JR에 사용자책임은 없다고하는 JR측의 주장이 인정되어, 중노위, 국노투쟁단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단, 부당노동행위가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철도건설공단이 져야만 한다라고 지적하였다. 이 소수의견에 따라, 투쟁단은 국노집행부의 방해압력에도 불구하고295인의 옛국철/철건소송원고단 투쟁을 새롭게 전개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6. 일본노동운동의 마지막 보루와 새로운 자율공동체와 일본노동운동의 마지막 보루

현대판 [해고]의 원점이 [국철개혁]이다. 국철개혁이야말로 [회사를 바꾸면 해고는 자유]라는 리스트라 사회의 형태를 만들었고, [민영화/합리화에 반대하는 노동자는 철저하게 처벌한다]라는 공포감을 지금까지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따라서 18년이 넘는 국노투쟁단의 복직투쟁은 반 리스트라투쟁, 반민영화 투쟁임과 동시에 장기간 국가와 회사에 짓밟힌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노동자가 노동자이기를 거부하고 대기업의 회사원으로만 존재하기를 원하는 일본의 기업사회에서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인 노동3권을 보장받고, 노동자성을 지키고자는 하는 일본노동운동의 마지막 보루에 선 운동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국노투쟁단의 아라키켄지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의 해고의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의 국철과 정부/자민당이 자행한 국철개혁입니다. 국철개혁은 공사민영화의 성공적인 예라고 내외에 선전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노동자의 인권을 짓밟은 위법행위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적인 대프로젝트로서 수행되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국철개혁의 야만적이고 비겁한 행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일본노동자의 인권과 권리침해의 브레이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

한편,국노투쟁단은 장기간 복직투쟁속에서 직장에서 만들지 못했던 새로운 자율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90년4월에 해고된 국노조합원들은 국로투쟁단을 결성하였고, 홋카이도, 큐슈를 중심으로 전국36개소에서 투쟁단을 발족하였다. 그러나 투쟁단은 처음에 해고철회/JR복귀를 요구하는 운동, 경제적 생활기반만들기 운동에 전력하였다. 당초는 아르바이트생활이 지속되었지만,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어업, 목공품제조, 배달세탁업, 빌딩관리 등 사업체를 운영하였다. 이들의 투쟁에 지역과 많은 시민들의 지지가 이어졌고, 18년에 걸친 장기투쟁속에서 공동생산과 공동분배의 새로운 노동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그결과 이들은 노동자간의 새로운 연대의 모습을 공동투쟁속에서 발견하였다. 이들의 삶속에는 단결과 함께, 새로운 자율적인 공동체가 생겨난 것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는 어렵더라도, 이들이 자신들의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자율적인 공동체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존엄의 가치]를 간절히 느꼈기때문이다. 후지야수 씨는 [틀린것은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오랫동안 보여지고 있는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7. 결론

마지막으로 여기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국철민영화에는 국철노동조합내의 정파들간의 대립갈등도 국노해고자 문제를 발생시키고 장기화 및 문제해결을 어렵게 한 하나의 큰 이유이기도 하다. 국철내에 존재했던 노조들 내부의 정파들간의 우치게바(내부폭력) 및 헤게모니의 장악투쟁은 국철민영화및 새롭게 설립되는 JR회사를 둘러싼 노-노 갈등을 가져왔으며, JR총련을 구성한 세력들은 대내외적인 정세속에 국철의 민영화에 동승하면서 소위 [전략적인 선택]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략적 선택을 통해 JR총련은 거대한 노조로 재탄생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이 과정에 자본 및 국가권력과의 타협, 국노노조원의 차별채용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향 등에 대한 반대세력으로부터의 오해와 불신을 씻지는 못하였다.

최고재판소의 [JR회사의 책임없음]이라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해고자 당사자들이 이 재판결과를 인정하지않고, 일본철도건설공사와 함께 JR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이러한 노조간의 정파간 대립이 사용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기때문이기도 하다. 이후 JR총련 또한 내부모순을 극복하면서 노조운동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해 왔음을 여러경로를 통해 피력하고 있지만, 반JR총련세력들은 [총괄]을 요구하며 아직까지도 불신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일본노동운동의 현실이며, 노동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질곡이기도 하다.

여하튼, 국노복직투쟁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문제해결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항하는 노동운동세력을 배제하고, 소수자들, 약한 입장에 있는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추진하는 노동운동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이들이 18년간 탈선해 온 자신들의 [궤도]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일본에 연대투쟁을 오는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일본의 국노투쟁단은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직장에서 주변의 약한 동료들을 너무 쉽게 버려버렸으며, 이러한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 우리의 노동운동이 결국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 노동운동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노동자성을 지키고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겨울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들이 봄을 맞이하는 그 날은 일본의 노동운동이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날이 될 것이다. 한국노동자의 연대운동이 국경을 넘어 이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은 일본노동운동의 존재방식을 지키고 미래의 우리의 존재방식을 규정할 수 있는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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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어사전

    냉무

  • 국어사전

    냉무

  • 학생

    그리고 밑에서 두번째 단락에도 오타가 있습니다^^;; (버려버렸으며)

    추상적으로만 68년부터 일본의 운동이 망해가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학생

    그리고 밑에서 두번째 단락에도 오타가 있습니다^^;; (버려버렸으며)

    추상적으로만 68년부터 일본의 운동이 망해가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해고노동자

    정말 절절한 얘기네요
    말로만 들었는데... 아직까지 생존을 위한 투쟁과 함께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니 믿어지지않을 정도네요

    근데 지하철의 해고된 몇 몇 사람들은 자기들은 조합에서 나오는 월급 받아서 살면서, '국철의 민영화에 동승하면서 소위 [전략적인 선택]을 한 JR총련'의 돈을 받아 그것도 입이 벌어질만큼 거금을 받아 국제교류센탄가 뭔가를 하고 있으니...
    이 인간들은 뭐야? 일본 민주노동운동 밟고 국철노동자 죽여서 국제연대하는 게 국제연댄가?

    에라이~~

  • 해고노동자

    정말 절절한 얘기네요
    말로만 들었는데... 아직까지 생존을 위한 투쟁과 함께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니 믿어지지않을 정도네요

    근데 지하철의 해고된 몇 몇 사람들은 자기들은 조합에서 나오는 월급 받아서 살면서, '국철의 민영화에 동승하면서 소위 [전략적인 선택]을 한 JR총련'의 돈을 받아 그것도 입이 벌어질만큼 거금을 받아 국제교류센탄가 뭔가를 하고 있으니...
    이 인간들은 뭐야? 일본 민주노동운동 밟고 국철노동자 죽여서 국제연대하는 게 국제연댄가?

    에라이~~

  • 추가로

    일본 국철 민영화에 관련된 글이 실렸네요.
    전략적 선택이라는 고상한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는 노사협조노선을 선언한 것이고, 사측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문서도 있네요.
    관심있는 분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 추가로

    일본 국철 민영화에 관련된 글이 실렸네요.
    전략적 선택이라는 고상한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는 노사협조노선을 선언한 것이고, 사측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문서도 있네요.
    관심있는 분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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