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낭만

[백원담의 시와 모택동](5) - 창랑지수의 문화정치학

모택동은 1893년 중국 호남성 상담현 소산(湖南省 湘潭縣 韶山)이라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모택동의 아버지(毛順生)는 원래 가난한 농부였으나, 빚이 많아서 1년 넘게 군대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 지독한 구두쇠 노릇을 하면서 여러 장사를 하여 돈을 모았고, 논밭을 사서 중농中農이 되었다.

모택동의 아버지는 미곡상을 했는데, 재산관리와 사회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모택동에게 중국고전에 정통할 것을 요구했다. 소송 같은 것이 벌어질 경우, 문자를 많이 쓰면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그러한 아버지의 요구를 일면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저항했다.

열세살 때 동네 훈장의 엄한 교육에 반발하여 가출했던 것이나, 경서를 배우면서 경전을 인용하며 아버지의 존재방식에 대한 논쟁을 벌인 것, 모반에 관한 역사전기나 사회비판적 내용의 단편소설들을 아버지와 선생 몰래 읽으며 개혁정신을 몸으로 익혀갔던 것 등이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다.

모택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철학과 역사 관련 공부를 두루 섭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그의 중국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시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과 읽기, 정통한 고문 문장쓰기이다. 그것은 호남사범학교시절 원(袁)털보 선생의 혹독한 훈련 덕이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데, 여기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남방 촌놈 모택동이 시인 모택동이 되고 혁명을 일으키고 그것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의 특별함에 대해서이다.

  모택동의 침상과 중국 고전 서적들

모택동은 봉건 중국을 근대 중국으로 이끈 혁명가이다. 물론 그의 근대 혁명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근대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중국 사상가 왕휘王暉는 반자본주의적 근대극복의 기획으로 명명한다. 그러나 미완의 문화대혁명으로 그의 독특한 중국적 근대기획은 실패했고, 오늘날 중국은 거대한 자본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리지 않은 중국에서 모택동의 근대기획이 결국 실패로 귀결될 것인지는 역사만이 증언할 일이다. 모택동은 혁명이 승리한 1949년 10월1일 대만의 통일은 100년이 걸릴 것으로 예견했다. 자본주의와의 기나긴 관계 지향, 중국의 새로운 근대와 세계의 진정한 근대의 완성을 그렇게 본 것이다.

나는 모택동의 혁명과 근대의 기획을 문화혁명, 문화적 근대기획으로 성격짓는다. 모택동식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혁명이다.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모택동은 부족한 물질적 축적의 상황을 넘고자 하였다. 모택동을 흔히 경제적인 문외한으로 보는 평가가 많지만, 농민혁명이었던 중국혁명의 과정에서 모택동과 그의 동료들은 이미 소비에트의 지배질서를 구축한 경험과 그속에서 중국식 경제발전에 대한 분명한 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소련식-유소기 노선과의 불협화음 속에서 대약진의 실패와 함께 모택동의 정치적 실각을 가져왔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으로 다시 일어난 모택동노선의 힘은 그의 인민주의에 바탕한 또다른 변혁의 기획 속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그것이 ‘십년 호겁’으로 일컬어질 만큼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고, 중국혁명의 블랙홀과 같이 모택동과 현대 중국의 모든 성과를 일거에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다시 말해야 하는 것은 모택동이 일으킨 거대한 변혁적 실체의 동력과 그것의 새로운 향방일 것이다. 나는 우선 향방을 말하기 전에 모택동의 위대한 유산에 대해서, 그 원천적 동력의 실질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그 하나의 경로는 모택동의 옛살라비 고향 호남 장사(長沙)지역, 곧 옛 초楚나라 땅에 대한 모택동의 특별한 애정과 그곳의 무가(巫歌)이자 남방문학의 총집이라고 할 수 있는 초사楚辭에 대한 모택동의 애독과 그의 혁명적 형질의 문제를 관계지워 보는 것이다.

  모택동의 고향 호남성 장사, 중국인들에게는 혁명의 옛살라비 고향이다

중국에는 자연호수와 인공호수를 망라하여 거대한 호수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두보杜甫의 시로 유명한 동정호洞庭湖는 중국의 배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강서성江西省 파양호鄱陽湖에 이은 중국 제2의 담수호이다. 동정호는 양자강물의 수위 조절 역할을 하는데, 이 호수가 중국적 삶에서 중요한 정도는 그 호수를 기준으로 호남과 호북지방으로 나누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호수에 흘러드는 상강湘江은 동정호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중국 신화전설의 무대가 된다. 역사시대에 이르면 이 주변은 초나라 땅이었다. 황하 지역의 중원과 더불어 중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이 곳 초지방이 중국 남방문화의 본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판의 초·한楚·漢 결전에서 보듯이 항우項羽가 유방劉邦에 지고 한나라가 중국 천하를 통일하며 강력한 봉건통치국가를 구축한 이후 봉건시대 내내 초지방은 북방에 비해 나약한 면모로 역사 속에 형상되어 왔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걸쳐 초는 남방의 강한 나라였다.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연횡책으로 유명한 秦진나라의 장의(張儀, 원래는 위나라의 모사謀士였다)의 계략에 국가는 점차 쇠퇴해지고, 거기서 초 왕족으로 삼려대부三閭大夫였던 굴원(屈原 BC 343 ?~BC 277?)이 장의의 계책에 대한 문제제기(굴원은 合從連橫의 대세 속에서 강국 진秦나라에 반대연합전선을 주장한 반진反秦파였고, 제초齊楚 동맹을 주장했다가 친진파親秦派의 모함으로 유배流配를 거쳐 강남으로 추방당했다)를 연약한 초 회왕懷王에게 했다가 자리에서 쫓겨나 강호江湖를 떠돌게 된다.

굴원의 애국충정은 그의 초사 작품으로 남아 있어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고 있다(대표작은 《이소離騷》,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분노가 격발하여 쓴 작품 발분지작發憤之作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중국 전 역사 시기를 통틀어 국가적 위기 때마다 굴원의 애국충정은 계속해서 호환되고 추앙된다. 그러나 그의 <초사>작품들의 가장 빛나는 면모는 단순히 애국적 열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것이 아니라 초지방의 무가음악에 실어 수많은 신화전설의 광활한 경계와 우주자연의 질서를 넘나들며 가늠하는 멋진 낭만의 세계를 펼쳐보인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이후 한나라 때 대표적 문학갈래인 ‘부賦’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지금까지도 단오날 굴원의 애국충정을 기려서 그가 빠져죽은 멱라수汨羅水에 종자(쫑즈種子, 물속의 고기들이 굴원을 뜯어먹지 못하도록 고깃밥을 넣어주는 것이다)라는 고깃밥을 던져주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전해져서 지금도 어느 시골에서는 한식날 강에 초를 띄우고 고기밥을 던져주는 곳이 있을 정도이다. 중국인들은 굴원을 애국시인, 진정한 애국지사로 기억하며, 그가 쓴 초사의 시편들을 애송한다.

초사는 북방문학의 대표격이고, 중국문학의 원천이라고 하는 시삼백, 시경과는 사뭇 다른 정서를 표출한다. 시경이 타악기에 어울리는 4율 장단에 사회비판적인 내용 혹은 남녀상열지사와 같은 연애내용 등 실제적 삶에 근거한 현실주의문학이라고 한다면, 초사는 인간의 상상력의 극한까지를 넘나드는 초자연과 인간의 어떤 교감과도 같은 무한한 환상의 세계로부터 현실까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낭만주의를 정수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형식에 있어서도 시삼백이 정형적이라고 한다면, 초사는 가운데 혜(兮)라는 어조사를 넣을 만큼 자유로움을 기조로 한다.

모택동은 평생 동안 이 초사를 끼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본 판본만도 수십 가지가 넘을 정도이고, 현대사의 대 파노라마라고 할 이만오천리 대장정의 그 험난한 고비에서도 이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문화대혁명이 실패의 흐름 속에서 모택동의 건강이 악화되고, 새로운 중국혁명의 도정이 모색되어야 할 때, 모택동은 미국의 대통령 닉슨과 일본수상 다나까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의 혁명의 성과에 대해서 스스로 비하적으로 평가한다.

“내가 쓴 글에는 전혀 교훈적인 요소가 없어요”, “나는 그저 베이징 인근의 몇군데를 변화시킬 수 있었을 뿐이지요” “나같은 사람들의 말은 마치 커다란 대포소리처럼 들릴게 마련이고, 따라서 그런 문구는 전세계가 단결해서 제국주의·수정주의, 모든 반동분자를 물리치고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 정도의 의미밖에 없지요”.

당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던 모택동은 그의 숙원인 세계변혁의 주적들을 어떤 심정으로 대면하였을까? 그의 진심을 다시 되묻기보다 나는 그가 닉슨과 다나까에게 선물로 내민 중국전통식으로 장정한 <초사>라는 시집 한 권에 주목하고 싶다.

  모택동이 친필로 쓴 굴원의 대표작《이소》
인간의 무한한 힘을 믿고 싶었던 모택동, 그가 그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으면서 중국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기까지, 그리고 새로운 중국식 근대의 기획을 자본주의의 길과는 다르게 구도해가고자 했을 때, 그를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文’의 힘이었다고 단언한다. ‘문’의 핵질이라 할 ‘시’, 시 곧 문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삶의 지평으로 열어가고자 하는 정치적 이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중국사의 흐름 속에서 모택동은 여실히 짚어내고 있었다.

중국천하, 중국 중심에서 세계를 보았고, 그것을 회심廻心의 축으로 사고했으므로, 모택동의 위대한 실패가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 맑스주의, 그것은 맑스 이후의 맑스, 진보적 사상체계를 재편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알뛰세를 비롯한 현대 유럽철학, 특히 68 이후의 유럽철학들은 모택동에 어떤 식으로든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철학은 모택동에서 인간의 주체적 의지에 대한 고민은 가져갔지만, 상상과 혁명적 낭만의 세계를 주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럽철학의 회귀점은 늘 그리이스·로마신화이고, 인문학적 상상력이 고갈될 때마다 그들이 기대는 곳은 여전히 서양고전이고, 거기서 단 한 발자욱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세계 상상,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경로 속에 ‘문’의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문’이란 다름아닌 자연을 모범삼아, 인간이 가장 그것에 가깝게 혹은 자연 스스로 그러한, 무한한 만물을 생화육성하는 질서에 적응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인간의 주체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굴원의 초사들은 애국충정을 축으로 삼라만상과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의 연관을 탁월한 상상력으로 무한히 넘나들며 올바른 사회의 구현을 제기하고 있다. 초사를 통해 현실과 그 너머의 경계를 활연히 넘나들면서 모택동이 본 것은 과연 무엇일까.

모택동은 초사체에는 민주적 색채가 농후하고 낭만주의가 풍부하며, 그 시편들이 부패한 통치자에 대한 비판의 비수와도 같다고 하였다. “초사를 배우려면 우선 이소를 먼저 읽고, 다시 노자를 공부하라.” “천문天問편은 굉장하다. 몇천 년 전에 이미 각종 문제를 제출해놓았으니....우주, 자연, 그리고 역사에 대해.” <천문>에 형상된 천지의 형성과 구조, 인류사회의 변천과 갖가지 신화전설, 중국의 조물주 복희씨伏羲氏와 여와女媧 등 신화전설과 그속에 투영된 인간의 신념, 천명天命이라는 중국의 자연과 인간의 일체적 정치관 등에 모택동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초사작품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다.

모택동이 그리는 세계사의 전환기획, 그 거대한 동선회(東旋回)의 그림은 한편으로는 서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과 실제적 전환의 기획으로 제출된 것이지만, 또하나의 다른 그림은 중국 안으로 보면 북방에 대한 남방의 역사적 전환기획(중국사에서 모든 권력은 북방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원천지를 얻는 것이 당대 중국정치의 고지였고, 그것이 천하를 통일하는 유일한 경로였던 것이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중국 최초의 봉건황제가 된 이후 이천오백 년의 장구한 봉건통치의 세월, 남방세력은 결코 천하를 손에 쥐지 못했다. 근대를 일으키면서 모택동과 민중세력에 의해서야 중국은 남방정권이 중국 천하를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각박한 북방의 세계에 대한 모택동의 선굵은 역사적 상상력, 그것에 의한 중국의 재편과 세계의 재편의 기획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초사와 모택동의 연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새로운 세계의 상상이 결코 틈입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광활한 자본의 세계에 대한 어떤 균열내기의 가능성일 것이다.

무소불위 자본의 신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무력한 동의 속의 절망, 이 무도한 질서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좌절과 순치, 공고한 체제화의 현실에서 혁명적 낭만의 무한한 상상력과 현상타파의 힘을 일으켜내는 것은 과연 무의미한가. 모든 인간이 소비의 주체로만 전락되어 있는 현실에서 인간만이 가지는 생산과 창조의 힘을 유발해내는 것, 그것을 굳이 모택동식 자기 진작의 힘, 그 엄청난 파장에 기대는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선명하지 않은가.

  굴원 상
<이소><천문><구가九歌> 등 굴원을 비롯한 숱한 초사의 시편들이 모두 장편이어서 여기에 소개할 수 없는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굴원이라는 인물은 위대했으되 그 인간 굴원의 문제를 정확하게 본 초사 언저리의 싯구가 있어 여기 적어놓으니, 오늘의 한국 좌파가 겪는 어려움 중에 가장 힘겨운 엄혹한 현실과 아름다운 이상의 간극과 갈등 속에서 모자란 역사적 상상력과 자기발작력을 위하여 소리내어 읽어내려 가보기를 부디 기대한다.

인구에 회자되는 굴원의 <어부사漁夫辭>, 굴원이 자신의 충정을 몰라주는 초 회왕에 대한 원망과 실망, 간신들에 대한 분노, 그러나 현실의 무력감과 실의 속에서 멱라강변을 떠돌 때 고기잡던 어부가 다가와 대화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부란 실제 인물일 수도 있지만 작가인 굴원 자신의 또다른 면모를 대치시켜놓은 형국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적 갈등의 면모가 매우 치열하게 드러난 시편이다. 굴원이라는 이름이 맨 앞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의 위작일 가능성도 많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호를 떠돌며 물가에서 읊조리며 가는데 행색은 초췌하고, 모습은 고목처럼 말라있네
    어부가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시오, 무슨 연고로 여기까지 이르른 것이오?
    굴원이 이르기를..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홀로 청정하며,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흥청거리거늘 나 홀로 깨어있으니 이에 쫓겨났구려.
    어부가 말하길,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거늘, 어찌 세상의 흐름에 더불지 못하는 것이오
    세상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어찌 그 진흙탕에 몸을 굴려 그 세파를 이기지 못하고,
    뭇사람들이 모두들 취해있으면 어찌 그 술지게미를 함께 먹으며 그 진한 술에 목을 쩔지 않으며
    무슨 연고로 그리 깊은 생각과 고결한 거동으로 스스로 방축되기를 자처한 것입니까
    굴원이 대답하길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필히 옷을 털어 입는다 했소이다
    몸을 이처럼 깨끗이 살피는데 오물의 먼지를 어찌 묻힌단 말이오
    차라리 상강에 빠져서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어찌 순백의 정신으로 세속의 먼지를 묻힐까보오
    어부가 빙그시 웃더니 뱃전을 두드리며 가는데
    부르는 노래소리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 법이거늘.....
    어부는 그렇게 가버리고 다시는 더불어 말을 섞지 않았다.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歟 何故至於斯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淈其泥 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 而醊其釃(제사 철醊, 진한 술 시釃)
    何故深思高擧 自見放
    屈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漁父莞爾而笑 鼓枻而去
    乃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갓끈 영)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不復與言


굴원의 꼿꼿함과 결백, 그리고 정치적 정당성, 엄연한 현실과 이루어야 할 이상의 도정 속에서 갈등하는 형상은 수천년 전의 강호의 애국지사가 아니라 오늘 부유하는 우리의 자화상과도 같다.

세상의 변혁을 외치며 오늘의 세파를 헤쳐가고 있는 참세상 일꾼들. 장자莊子가 그랬다. 제후로부터 정치를 하라는 제의를 받자, 금치장을 하고 사당에 놓여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죽은 거북이 되느니 진흙탕 속에 꼬리를 질질 끌며 살더라도 엄연히 살아가는 거북으로 남아있겠노라고.

인간의 진보지향, 그 아름다운 미래는 없는 듯, 자기모순 속에서 아웅다웅 박투하는 오늘의 형국. 우리는 과연 길을 잘못 든 것인가. 길이란 원래부터 거기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 그 길로 나아가서 진짜 길로 열어가는 것인데.....

부디 이 자본주의 마지막 자락의 엄청난 교착을 포착하고, 그 파탈을 이루는 역사적 상상, 세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며 오늘을 일으키는 돌연한 혁명적 낭만의 힘이 이 척박한 한반도에 충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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