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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자라보았자 사람 키를 살짝 넘기는 소박한 나무

[강우근의 들꽃이야기](31) - 싸리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자 기다렸다는 듯 보라색 싸리 꽃이 화들짝 피었다. 초가을 숲은 싸리 꽃향기로 그득하다. 바위가 훤히 드러난 산기슭 비탈 풍화되어 부서진 바위틈에서 흙먼지 몇 줌에 기대어 살아가는 소박한 싸리나무가 봄, 여름 동안 아껴 모아온 살림을 탁탁 털어 꿀 잔치를 벌이고는 온 숲 속 벌들을 불러들였다.


가을 햇살 가득한 싸리 꽃 사태 속은 그야말로 잔칫집 분위기이다. 떼로 몰려든 벌들이 잉잉대며 다투어 꿀을 빨고 나비도 날아들고 파리도 몰려들었다. 사마귀는 벌써 여러 날 째 가지 한 곳에 붙어 서서 꼼짝도 않고 있다. 가끔 흥청거리는 잔치 분위기에 넋이 팔린 벌레를 낚아채서 또 다른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싸리는 소박한 나무다. 기껏 자라보았자 사람 키를 살짝 넘기는 정도이다. 달걀 모양 작은 잎이 세 장 붙어 달린 싸리 잎사귀는 꾸밈이 없다. 가을이 깊어지면 잎사귀는 노랗게 물이 든다. 단풍 든 잎사귀를 보고 있으면 그 또렷한 노란색과 단순함 때문에 마음 속에 엉켜 붙어 있던 욕심들이 사라지는 듯하다.

싸리는 콩과식물답게 꼬투리가 달리는데 꼬투리 속엔 콩알이 달랑 한 개 들어 있다. 콩 한 알을 담고 있는 그 소박한 콩깍지가 슬그머니 웃음짓게 만든다. 시골 장터에 호박 몇 개 들고 나와 팔고 계신 할머니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웃음이다.

싸리는 소박한 농가의 추석 명절만큼 정겨운 나무다. 싸리는 어디서나 흔히 자라는 나무다. 쓰임새가 참 많았던 나무였다. 한 세대 전 만해도 우리 살림살이 구석구석에 들어와서 그대로 삶이 되어 버렸던 나무였다. 고향을 등지고 도시를 떠돌던 사람들은 명절이 다가오는 이때쯤이면 싸리로 엮어 만든 고향집 사립문이 어른거렸고, 하늘 가득 맴돌던 잠자리를 싸리 빗자루 휘둘러 잡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줌싸개였던 이들은 싸리로 만든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갔던 일이 생각났을 게다. 병아리에 씌웠던 싸리 둥우리 놓인 마당이 생각나고, 싸리 망태기 둘러메고 꽃 따러 다니던 동무들 생각도 났다.

싸리는 가장 좋은 땔감이었다. 생나무도 물기가 적어서 잘 타고 연기도 나지 않아 '산 사람'들 은 싸리로 불을 피웠다고 한다. 싸리 잎은 닭에게 주는 사료로 쓰이고 연한 잎은 소꼴로도 먹였다. 꽃에서는 꿀을 얻었다. 싸리는 잎에서 꽃까지 속속들이 쓰임이 많았던 나무였다.

이제 사립문도 사라지고 싸리 울타리를 넘나들던 인심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싸리로 만들었던 소쿠리가 플라스틱 바구니로 바뀐 지 오래다. 싸리는 여전히 꽃 피우고 꽃 잔치를 벌이고 있지만 우리네 명절은 예전만큼 정겹지도 넉넉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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