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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숲 따라 사라지는 왕고들빼기

[강우근의 들꽃이야기](32)- 왕고들빼기

풀 더미 위로 불쑥 자라 오른 왕고들빼기 끝에 잠자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이맘 때 숲 언저리 텃밭에서 볼 수 있는 잠자리는 십중팔구가 좀잠자리 종류다. 고추좀잠자리일까? 여름좀잠자리일까? 슬쩍 다가가도 꼼짝 않는다. 맨손으로 잡을 만해보여서 슬쩍 손을 내밀어보지만 잠자리는 잽싸게 날아올라 손아귀를 벗어나버린다. 날아오른 잠자리는 크게 맴을 한바퀴 돌고는 다시 앉았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사람 키보다 더 크게 자란 왕고들빼기는 그 큰 키에 견주어 꽃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흰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니고 빛바랜 듯한 누런 꽃 색깔 때문인 것 같다. 왕고들빼기 밑에 자란 같은 국화과에 속하는 연보라색 쑥부쟁이가 오히려 더 도드라져 보인다. 고마리며 배초향 따위도 흰색 , 분홍색, 보라색으로 꽃단장을 했다.

꽃들은 저마다 마치 나 좀 보란 듯 어여쁜 색을 뽐내고 있다. 왕고들빼기에 앉아 있는 좀잠자리도 꽁지가 점점 붉어져 가고 있다. 암컷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혼인 색을 띄는 것이다. 그런데 왕고들빼기 꽃은 왜 저다지 수수할까?

왕고들빼기는 꽃보다는 잎에 더 정성을 많이 들인 듯하다. 왕고들빼기 잎은 정말 독특하다. 보면 볼수록 왜 저런 잎을 갖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효율성'만 따지는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중세의 신비한 칼 모양을 떠오르게 하는 잎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환상에 빠지고 만다. 뒷골목 콘크리트 틈에서 정말 굵직한 잎을 비쭉비쭉 내밀고 있는 왕고들빼기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면 저 누르스름한 꽃 색깔도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왕고들빼기는 유럽이나 북미에서 얼마 전 귀화해온 풀 같다. 그러나 왕고들빼기는 쑥이나, 환삼덩굴, 강아지풀, 바랭이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자라온 풀이다. 옛날에는 김치도 담고 나물로도 먹었던 풀이다. 요즘도 가끔 쌈 거리를 늘어놓은 데서 보게 된다. 그런데서 굳이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왕고들빼기는 어디서나 흔히 자라고 또 봄부터 가을까지 언제나 뜯어먹을 수 있다.

왕고들빼기가 자라던 숲 언저리 텃밭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자체들은 이런 땅을 주민한테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서 그 뜻도 잘 알 수 없는 '근린공원'으로 바꾸고 있다. 이런 공원에는 이미 귀족이 되어버린 야생화들만이 가꾸어진다. 강아지풀, 바랭이, 왕고들빼기는 자라기 힘들다.

한쪽에선 멀쩡한 숲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싹 파헤쳐 버리는데 다른 쪽에서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숲을 만든다고 난리다. 숲을 만드는 것도 꼭 숲을 파헤치는 것 마냥 개발하듯이 한다. 저들은 정말 저렇게 밖에 할 줄 모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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