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재앙 부르는 쌀비준동의안 통과

사는 거나 죽는 거나 다름없는 농민들, 남은 건 저항 뿐

'세계무역기구 설립을 위한 마라케쉬 협정 부속서 1가 중 1994년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대한 마라케쉬 의정서에 부속된 대한민국 양허표 일부개정 비준동의안'. 한 평생 농사만 짓던 농민들에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비준동의안이 11월 23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이를 전후해서 2주일동안 농민 3명이 죽고, 1명이 사선을 넘나들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350만 농민 전체가 사경을 오가고 있다.

보령시 주교면 지회장인 전용철 씨가 15일 서울 집회에 참석하고 내려온 다음날 집 앞에서 쓰러졌다. 전용철 씨는 18일 병원으로 옮겼으나 6일만인 24일 오전 7시 경 숨졌다. 15일 서울 집회에서 서울청 소속 1기동대 전경들로부터 대회장 본무대를 세 번째 침탈하는 과정에서 머리와 오른쪽 눈, 가슴을 심하게 구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경남 의령군 농민회원 진성규(48세) 씨는 분신했다. 창원시 사림동 도청 앞 삼거리에서 쌀비준동의안 국회 통과에 반대하는 집회 도중 기름통의 불길로 뛰어들어 전신 3도 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이날 경북 구미와 충남 서천에서도 2명의 농민이 각각 집회 도중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3일에는 쌀 추가 개방에 반대하던 여성 농민 오추옥 씨가 자신의 집에서 농약을 마신 뒤 17일 오전 4시 45분께 숨을 거두었다. '농민의 날'인 11일에는 전남 담양 마을 이장 정용품 씨가 마을 회관에서 농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지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쌀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서 국내 쌀 농업 보호를 위한 쌀 관세화 유예는 2014년까지 10년간 추가 연장된다. 2004년 기준 쌀 평균 소비량 4%인 약 22만5,000톤이 의무 수입되게 되며 향후 10년간 단계적으로 7.96%까지 수입이 늘어나게 된다. 그동안 가공용으로 공급돼온 수입쌀은 내년부터 밥 쌀용으로 시판되게 되며, 밥 쌀용 시판 물량은 올 의무수입량의 10%에서 향후 2010년까지 30%까지 확대된다.

한국은 식량자급률이 매년 하락하여 25%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그나마 쌀을 제외하면 5%가 되지 않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이미 식품의 50%, 주요곡물의 70% 이상을 수입하고 있다. OECD 가입 30개국 중 곡물자급률이 27위에 해당한다. 쌀 다음으로 중요한 밀은 99.9% 수입한다.

쌀 관세화유예로 2010년 MMA(Minimum Market Access: 최소시장접근, 의무수입) 10%의 물량이 수입되고 일정 물량의 식용 판매가 허용된다면 쌀 자급률은 90-95%로 하락한다. 또 DDA(도하개발의제) 농업협상이 제5차 WTO 각료회의에서 논의된 의장 초안을 토대로 타결될 경우,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농업부문의 총소득은 15조원에서 9조원으로 감소한다. 자연감소분을 제외해도 농업취업자 25~50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갈 곳 없는 고령의 농민들이다.

이제는 이런 수치 전망 자체도 의미를 잃었다. 이 땅의 농민에게 쌀비준동의안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의기양양하게 쌀비준동의안을 처리한 김원기 의장은 "불가피하게 통과했지만 다들 마음은 아프다. 세계의 일원으로 가는 길이라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21개 아펙 정상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를 내걸고 △보다 자유로운 무역의 진전 △안전하고 투명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 인간안보 강화 △미래를 향한 아펙의 진전을 선언한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었다. 대한민국 국회는 바로 보여주었다. '하나된 공동체의 일원'이란 모두를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농민과, 빈민과, 노동자와 다수 사회구성원이 배제된 자본의 공동체, 지배자의 공동체 라는 사실을.

정부는 사후 대책으로 '농업 구조조정'을 들고 나왔다. 박병원 제경부 제1차관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10년을 벌었을 때 구조조정을 실시하지 못한 것이 지금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농업 인구 8%는 과하므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쌀 농사를 포기할 경우 지원금을 주는 '경영이양직불제'도 확대하겠다고 한다. 쌀 생산 농가의 4%가 전체 쌀 생산량의 21%를 차지, 이는 대부분 쌀 생산 농가가 영세한 구조이고 따라서 영세한 농민은 구조조정 해야 한다는 논리다. 농업 구조조정 주장에는 우익 신문들도 한몫을 한다. "장기적으로는 쌀농사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 지금도 쌀이 남아도는 판에 수입 쌀까지 감당하려면 농민들 스스로 쌀 대신 다른 소득원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안내한다. 웃찾사도 이런 코미디는 안 한다.

노무현정권은 농민을 포기했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등 지배세력과 재경, 외통 관료들은 농민을 녹 쓸어 고철 값어치도 못하는 고장난 농기계처럼 취급한다. 농사꾼이 천하의 근본이라 했는데 이 놈의 지배자들은 이땅의 근본 사회구성원인 농민을 어찌 이토록 천대하고 못살게 군단 말인가! 근본을 흔들면 천벌이 따르는 법, 지배자들과 자유무역주의자들, 그 정점에 있는 노무현정권이 꿈꾸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쌀비준동의안 통과는 필시 재앙을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