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또 하나의 비유기적 육체"

[박석준의 의학철학이야기](6) - 전근대 사회와 한의학의 탄생2

3절. 전근대 한의학의 지리경제학적 특징

한의학은 동아시아 전근대의 모든 이론과 실천이 그러하듯이 농경사회에서 탄생한 의학이론이며 임상 체계다. 물론 한의학의 형성과정에는 인도의학과 티베트의학의 영향1)이 없을 수 없으나 기본적으로는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농경사회는 다른 사회, 특히 유목사회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농업은 특정한 지역의 토지에 긴박(緊縛)되어 행해지는 경제행위다. 일정한 기간 동안 특정한 지역에서 경작(耕作)과 수확이 반복되는 농업의 특성상 전쟁이나 계절과 같은 조건에 따라 그때마다 이동해야 한다면 농업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정착에 대한 요구는 전근대 사회에 적용되었던 직업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하여 상업을 가장 천시했던 것은 상업이 본질적으로 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은 자연, 특히 토지라는 조건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토지는 땅과 그 의미가 다르다. 땅은 거주를 위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늘이 준 식량의 거대한 창고다. 땅은 인간의 모든 생산활동이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곳(작업장)이면서 최초의 생산수단을 제공하는, 모든 생산활동의 전제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땅은 또 하나의 비유기적 육체라고도 할 수 있다. 토지는 그러한 땅 중에서 생산활동을 위해 인간에 의해 점취(占取)된 땅을 가리킨다. 특히 인류의 초기 단계, 원시 공동체 단계에서는 인간 자신이 가축과 더불어 객관적인 자연물의 계열 중 하나를 이루어 땅의 부속물로서 매몰되어 나타난다.2)

둘째로 농업이 토지에 긴박되어 이루어지는 경제행위라는 조건은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곧 농민의 의식을 규정한다. 그러한 규정의 하나는 사람 중심, 땅 중심의 세계관이다. 농경사회에서의 세계는 땅에 묶여 있는 나를 중심으로 운동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은 내가 뿌리박고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목사회에서는 자연의 변화, 곧 목초지의 이동에 따라 나도 이동해야 하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유목사회의 세계관은 하늘 중심의 세계관이다.3)

셋째로 농경사회라는 특수성은 폐쇄적 공간을 전제로 한다. 농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고정적으로 점취된 땅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외부에 대해 열린 공간이 아니라 고립된 공간이어야 한다. 농사를 지으려면 물을 가두고 도랑을 쳐야 하는 것이다.4)

이에 비해 유목사회는 끝없이 움직이는 열린 공간을 생존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한다. 정착 생활에 필수적인 상하수도 시설이나 관개시설은 유목사회의 개방성을 위협하는 것일 뿐이다.5)

넷째는 기본적으로는 농경사회의 폐쇄성에서 오는 것이면서 봉건제라는 정치, 경제 체계에 의해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하지만 폐쇄된 공간 속에서의 생활을 위해 자기 완결성을 강조하게 되며 폐쇄된 공간 속에서의 긴밀한 유기체적 관계를 불가결하게 요구하게 된다.

이에 비해 유목사회는 외부사회를 자신의 생존 조건의 하나로 하며 톱니바퀴와 같은 완결된 유기적 관계보다는 각 조직 사이의 다양하면서도 신속한 교통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6)

다섯째로 농경사회는 관개의 필요성과 노동집약적인 전근대 농업의 특성상 상명하달식의 조직화를 필요로 한다. 이 조직화는 봉건제의 구조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가'(家)라고 하는 사회조직으로 나타나며 사회의식(조직을 포함하는 것이지만)에서는 '례'(禮)로 나타난다. 동아시아에서 영어의 ‘state’를 '국가'(國家)로 번역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國)은 '가'(家)가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농경사회가 다른 사회를 지배하고 그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는 철저하게 ‘가’와 ‘예’의 체계로 재편되어야 했다. 그리고 ‘가’와 ‘예’를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유교, 특히 주자학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사회는 모두 무례(無禮)한 야만사회로 간주된다.

이에 비해 유목사회는 그러한 ‘가’나 ‘예’의 체계가 없었다. 거기에는 끊임없이 이동하며 경쟁하는 부족 혹은 나라가 있을 뿐이었으며 칭기스칸과 같은 강력한 구심점이 마련되면 곧바로 그들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정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목사회가 다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필요한 것은 그 사회의 최고 지배자를 지배하는 것 뿐이었다.7) 그러므로 그 사회가 갖고 있던 기존의 질서와 이데올로기는 거의 그대로 유지되며 각 사회의 독자성과 다양성이 인정된다.

4절. 전근대 한의학의 봉건제적 특징

전근대 사회의 특징을 살피기 위하여 경제적인 측면 외에 정치적인 측면도 중요하다. 전근대 동아시아 의학의 배경을 알기 위하여 본고는 주(周)나라 당시의 봉건제적 상황을 검토한다.8)

주나라의 봉건제는 은나라의 '읍'(邑)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읍은 물가에 가까운 남향의 구릉 위에 수혈의 주거취락으로 형성되고 거주지는 동조동혈(同祖同血)의 관념 하에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씨족 내지는 분족(分族)이었다.

읍에는 씨족적 결속을 위한 각 씨족마다의 사당이 있었고 읍 주위에는 경지나 목지, 임야 등이 있고 경지는 '전(田)이라고 하여 읍의 공유지가 있었다. 이 경지는 다른 목지나 임야 등과 함께 씨족 공동체에 의해 공동체적으로 소유되어 공동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읍은 상호간에 연합하여 씨족연합으로 성장하여 원시국가를 형성한다. 이것이 이른바 읍제(邑制)국가다. 읍제국가의 지배체제는 지배적인 씨족에 의한 지배 피지배 관계였다.

이러한 읍제국가라는 틀 속에서 주나라로 왕권이 교체되게 되며 주나라는 새로운 지배질서로서 은나라 말기에 발전되어 오던 '봉건제'(封建制)와 '종법제'(宗法制)를 확립한다. 봉건제와 종법제는 중국의 서북지역 모퉁이에 거주한 낙후된 가족으로 출발한 주왕조로서 광대한 동방의 선진 지역을 통치할 경륜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자구책이기도 했다.

‘봉건’은 주왕실이 새로이 자기의 지배권내에 편입된 분족(分族)을 그 지역의 지배자로서 파견하여 설치케 한 것이었으며, 그 분족의 중심이 된 것이 제후(諸候)다. 제후의 분봉은 실제로는 가족조직을 지방 행정조직으로 대체하여 새로운 점령지를 통치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제후가 '봉건'(封建)된 지역을 '국'(國)’이라고 하며, ‘국’이란 바로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을 말한다.

따라서 봉건이란 주왕실을 분읍(分邑)과 동시에 분족(分族)의 과정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점령지를 통치하는 방식을, ‘읍(邑)을 설치하고 종(宗)을 세운다’고 한다. 이렇게 분읍된 읍은 다시 분족되어 도(都)라는 읍이 되고 국이나 도가 아닌 읍을 비(鄙)라고 했는데, 이러한 주실(周室), 국(國), 도(都)를 결속시키는 원리는 분족이라는 혈연적 연대의 관념이며, 현실적 혈연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의제화(擬制化)되었다.

이러한 혈연적 연대를 나타내는 것이 '종'(宗)이었으며, 주실을 종주(宗周)라고 하였다. 종묘(宗廟), 종족(宗族) 등과 같은 것은 모두 이러한 관념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이 관념을 규범화한 것이 바로 종법(宗法)이라고 하는 예제(禮制)였다.

주나라에서 봉건제와 종법제가 시행되었지만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은 은나라에서부터 시작된 읍제국가의 원리인 씨족 상호간의 지배 - 피지배 관계였다. 따라서 읍의 전답은 지배자층인 씨족의 공동체적 소유에 속하고 궁극적으로는 주실의 소유로 간주되었다. 여기에서 왕토(王土)사상이나 왕신(王臣)사상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읍을 단위로 하는 계층적 지배관계에서 왕 또는 제후의 지배력이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왕이나 제후의 정치적 지위는 동족(同族)에 의해 보장된 것인 만큼 국인(國人)이라고 불린 그 종족의 지배자층에 의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주왕(周王)은 ‘국’의 백성 혹은 제후가 도민(都民. 都의 피지배층)을 직접 지배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왕권은 아직 신장되지 않았으며 중국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라는 실체도 없었던 것이다.9)

이렇게 성립된 봉건제와 종법제는 그 기초가 읍이었으며 읍은 다시 ‘가’라는 체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읍의 지배적인 친족 관계는 부자간의 차별과 남녀간의 차별, 적서(嫡庶)간의 차별이다. 이러한 차별은 뒤에 유교적 례(禮)의 질서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이하 각주>

1)중국에 앞서 인도에 독자적인 오행이론이 있었음을 잘 알려져 있다, Robert Svoboda와 Arnie Lade는 인도의 그것에 비해 중국의 오행은 보다 동적이며 내적 상호연관을 갖고 있음을 말하지만, 중국의 오행은 인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Robert Svoboda & Arnie Lade, Tao and Dharma, Lotus Press, 1985, pp.81-82. 위로

2)大塚久雄, ??공동체의 기초이론??(돌베개, 1982) 제2장 참조. 흔히 농사짓는 것을 ‘땅 파먹고 산다’고 말하는 것처럼 농업은 일정한 땅을 일구고 씨 뿌리고 가꾸는 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파먹던’ 땅을 떠난다는 것은 곧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급격한 근대화를 겪으면서 70년대에 홍세민의 노래 ?흙에 살리라?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를 흙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러한 농경사회의 전통에 기초한 것이다.위로

3)유목사회의 종교는 대부분 하늘이나 태양과 연관된다. 반면 농경사회의 종교는 주로 땅과 연관된다. 갈리예프, ?카작 민족의 정체성과 철학?(예르덴 카쥐베코프 주편집, 김일겸 옮김, ??카자흐스탄의 문화와 역사??, 2003,강남대학교 출판부) 참조. 유목사회의 종교나 신화에서 반드시 나오는 것이 하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宇宙江, 宇宙木, 宇宙山 등이다. 예로 우주강은 모든 세계의 축으로서, 상중하, 곧 천지인의 세계를 꿰뚫는 세계의 길이다. 이는 세속의 源泉, 중류, 하류와 상응한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는 주거시설의 창문 구조에서도 나타난다. 몽골의 전통적 주거 형태인 겔에는 창문이 천장 가운데에 나 있는 天窓이어서 태양의 빛과 별빛을 관찰하게 되어 있는데 비해 농경사회의 창문은 벽에 나 있어서 내 집 밖의 외부 공간과 외부 사람을 살펴보게 되어 있다.위로

4) 물은 인류 생존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지만, 김정한의 단편소설 ?사하촌?에서 잘 보이는 것처럼 이런 전통 때문에 농경사회에서의 물을 둘러싼 분쟁은 실로 절박한 것이었다. 농경사회에서는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물에 대한 관념이 상대적으로 적다.위로

5)이런 의식 구조 때문에 지금도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 같은 수도에 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비가 조금만 와도 물난리를 겪는 이유가 된다.
농경사회의 폐쇄성은 전근대 사회의 농경사회가 예외 없이 城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폐쇄성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바로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유목사회와 농경사회 사이의 오랜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농경민의 유목민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 것이다.
성은 외부세계로부터 농경지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 안에 거주하는 백성의 보호, 곧 백성들의 외부세계와의 교류를 차단하려는 역할도 한다. 역사상 변경 지대의 농민, 혹은 상인들은 높은 수익을 찾아 끊임없이 외부세계와의 교류하려 하였으며 실제 상당한 양의 교류가 이루어졌다.위로

6)“가장 중요한 것은 유목민이 상이한 경제체제를 가진 외부세계 내지 비유목사회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들 자신만으로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하자노프, 김호동 옮김, ??유목사회의 구조??, 지식산업사, 1990, 36 쪽). 이러한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상반되는 사회 및 의식구조는 서로에 대한 극단적인 대립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그루쎄는 “경작지역에 대한 유목민들의 주기적인 침투는 자연의 법칙이었다”고 말한다. 르네 그루쎄(1939),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13 쪽.
이와 연관하여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그리고 비유기적으로 파악한 것이기는 하나 경락을 신호전달 체계로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목민의 이러한 정보 교통 체계는 경락의 체계를 떠올리게 한다.위로

7)여기에는 정복지가 너무 넓고 정복민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점령지의 지배자에게 징병과 징세의 책임과 권리를 맡기는 소위 대리지배체제를 갖출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으며 또한 이들이 믿는 샤머니즘은 유일신의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위로

8)경제적 측면에서의 봉건제에 관한 논의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이 글에서는 中村哲의 입장을 따른다. 中村에 따르면 서양의 노예제와 농노제가 사적(私的)인 것이라면 전근대 아시아에서의 그것은 각각 국가적 노예제와 국가적 농노제로 파악된다. 그리고 생산수단 소유자의 사회적 존재형태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노예제와 농노제를 관철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소경영생산양식이다. 소경영생산양식은 자기 노동에 기초한 사유(私有)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 생산을 말한다. 원시 공동체의 해체 이후 전자본주의적 사회로의 발전을 이루어 간 것은 바로 이러한 소경영과 사회적 분업이었다. 이에 비해 자본주의에서의 발전은 직접적 생산과정에서의 협업과 분업, 생산수단 및 금융자본의 집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국가적 노예제와 국가적 농노제를 이렇게 규정함으로써 경제적 발전의 한 단계로서의 노예제와 봉건제를 일반화할 수 있으며 동서양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과 노예제에서 농노제로의 발전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中村哲(1977), 안병직 옮김, ??노예제 농노제의 이론??(지식산업사, 2000) 참조.위로

9)이상 봉건제에 관한 내용은 西嶋定生(1981), 변인석 편역, ??중국고대사회경제사??(한울, 1994, 제일장)를 기초로 하고 서양걸(1992), 윤재석 옮김, ??중국가족제도사??(아카넷, 2000) 제3장 제2절과 永田英正 책임편집, 박건주 옮김, ??아시아 역사와 문화?? 1 중국사 - 고대(신서원, 1996)의 내용을 일부 첨가한 것이다.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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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쎄요...

    글 쓰는 법을 공부하셔야 될 것 같네요. 도올 스타일로 가시고 싶은 것 같지만.. 내공이 좀 부족하신 듯..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만 이런 식의 장황한 논리로는 현실의학이라는 벽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명징한 논리를 개발하시고 간단하고 짧게 설명해 주십시요. 그게 좋은 글의 특징인 것 같더군요.

  • 낙화유수

    안될까요?
    읽기로 지루하고 진부한데 접근 방법과 해석도 지루하니 이거원...

    다음편엔 상한과 내경의 의철학을 피터지게 함 분석해 주시죠?
    20세기 말 진부한 패러다임으로 질~질~ 글쓸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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