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수첩'에 대한 누리꾼들의 폭력을 생각하라!"

문화방송 '피디수첩' 사태를 보면서

논쟁이란 무엇인가

어떤 문제의 진실이나 타당성을 쌍방 구두로 검증하는 행위를 논쟁이라 부른다. 한자말로 論爭을 풀이하면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며 다투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사태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제반과정을 포함한 상호이해와 대화를 전제로 하는 경기규칙이 논쟁에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논쟁은 참가자들의 진지한 문제제기와 치밀한 검증과정을 거쳐 마침내 진실 혹은 진리의 문에 도달함으로써 종결된다. 만일 논쟁이 최종 목표지점을 설정하지 않은 채 중간에서 표류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치명적인 오류나 결함이 있는 것이다. 문제제기가 틀렸거나, 검증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가 촉발되었거나, 논쟁을 위한 논쟁을 목적했다거나.

변모하는 문제제기

애초 문화방송 '피디수첩'에서 제기한 문제는 황교수 연구팀 내부자의 난자제공, 즉 윤리문제였다. 동일한 연구조직 안의 연구원이 자의든 타의든 연구목적을 위하여 신체 일부를 제공하는 행위는 국제관례와 도덕률에 따른다면 부당하다는 것이 그들 논지다. '피디수첩'은 올바르게 문제를 제기했고, 황교수 측은 그것을 시인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지점부터 확산일로를 걷는다. 대중의 격렬한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본시 '피디수첩'은 우리 사회의 어둡고 왜곡된 사안들을 낱낱이 까발리고 세상에 알림으로써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을 최대의 미덕으로 삼았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분주한 일상적 대중이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대충 넘어가는 문제에 깊이 있는 분석과 해결책 모색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피디수첩'은 상당한 지지와 신뢰를 얻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논쟁 혹은 논란의 와중에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구경꾼 혹은 방관자 역할 이상을 자임하지 않았던 대중이 자발적으로 논쟁의 한가운데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대중에게 어떤 일관되고 논리적인 문제제기나 경기규칙의 예의바른 준수를 기대함은 무모한 일이다. 그런 오류는 대중의 속성을 모르거나 아니면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이번 논쟁에서 대중의 역할이 너무도 지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책임의 일단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데 이번 사태의 특징이 있다.

대한민국의 애국적인 대중이 '피디수첩'과 황교수 연구팀 사이에 틈입함으로써 논쟁에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부여되었다. 그것은 소박하지만 그래서 더욱 강력하고 공격적인 이념적 내용을 담고 있다. 애국과 민족, 혹은 국익을 앞세운 대중의 무차별적인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대중의 쇼비니즘과 징고이즘이 논쟁의 성격과 본질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윤리에서 과학적 검증으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대중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왔던 연구팀은 성공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우 작은 예외는 있었지만, 다수 언론매체는 현대판 예수의 이적 실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해주겠다는 과학자와 그가 보여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어떻게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 있겠는가.

더욱이 연구결과가 가져올 신약개발과 맞물린 천문학적인 이익이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피디수첩'의 윤리문제 제기는 대중이 개입하고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면서 결국 연구결과 자체의 신뢰성 여부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물론 그것은 심층취재 과정에서 확보한 움직일 수 없는 물증에 대한 '피디수첩' 제작진의 또 다른 확신에 기반하고 있었다.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를 형성한 두 세력이 정면 충돌한 결과를 우리는 날마다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논쟁 당사자인 연구팀 자리를 대중과 문화방송에 적대적인 다른 언론사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기자 정도의 과학적 지식을 가진 자들이 어찌 최고 전문가 집단이 만들어내는 '사이언스' 잡지가 인정한 연구결과를 의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최고 수준의 과학문제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일견 옳은 지적처럼 보인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 그냥 앉아 있다가 주는 떡이나 받아먹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투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왜 문제를 일으켜 대한민국의 체면과 국익을 심대하게 손상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논쟁의 상대방인 황교수 연구팀의 책임 있는 답변과 해명이 더욱 기다려진다.

무식한 식자들을 위하여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다수의 ‘무식無識한 식자識者’들로 이루어져 있다. 형용 모순적인 표현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각종 전문가들이 득시글거린다. 의사, 변호사, 건축가, 교수, 교사 등 수많은 전문가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그들은 전문분야를 빼놓으면 아는 것이 없다. 문명과 문화의 근본원리를 알려고 하지 않는 대다수 전문가를 에스파냐 철학자는 ‘무식한 식자’라 부른 것이다.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무식한 식자들은 인터넷이 일반화되어 있는 대한민국 사회와 같은 곳에서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한다. 자기들이 듣고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찾아다니는 그런 대중은 수많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세상 모든 분야와 영역에서 매일 존재 의의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방송과 '피디수첩' 담당자들에 대한 누리꾼들의 폭력을 생각하라!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제 과학적 검증만 남았다. 이 정도 선에서 덮자는 이야기도 적지 않게 들리지만, 한번 열린 판도라의 상자는 쉽게 닫히지 않는다. 하마터면 최후의 희망만 상자 속에 남겨질 뻔한 교훈적인 판도라의 상자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제는 대중이, 무식한 식자들이, 애국주의에 불타는 누리꾼들이 결과를 기다리고 인내할 시간이다.

'사이언스'는 이미 검증절차에 돌입했다고 한다. 그들이 목말라하던 전문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논쟁이 의미 있으려면 참을성 있게 경기규칙을 준수하는 자세가 필요한 법이다. 검증과정과 절차가 오류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큰 돈이 되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거쳐야 할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과 어제의 논쟁이 소모적이고 덧없는 것이 되지 않게 하려면,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진실이나 진리에 도달하고자 논쟁을 시작하였는지를!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는지를! 대중의 분출된 힘으로 촛불 하나가 꺼지지는 않았는지를! 우리의 뜨겁고 격렬한 논쟁이 마침내 어떤 희망과 결실을 가져올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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