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양극화 해소 능력 없음을 확인해준 신년연설

특징없는 신년연설, 기존 신자유주의 정책 강화 의지 되풀이

노무현 대통령의 2006년 신년연설은 알려진 대로 튀는 이야기는 없었다. 기존의 국정방향과 기조에서 벗어난 내용도 없었다. '책임있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회'를 강조하고, 일자리 창출을 통한 양극화 해소에 무게를 실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제목과 강조점만 달랐을 뿐 2005년 국정연설과도 유사했다. '일관된' 정책 의지가 확인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학교육과 의료서비스와 관련, "고급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분야이므로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개방하고 경쟁하게 해야 한다"며 시장 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과 서비스 산업 육성,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 등의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비정규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경제계와 노동계의 결단을 호소하고, 정치권에 비정규법안 처리를 요청했다.

한편 일자리 대책, 사회안전망 구축, 미래 대책을 위해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고 언급, 조세 문제를 제기할 뉘앙스를 비쳤다. 다만 조세저항을 고려해 당장 세금 인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청와대에 따르면 취임 3주년인 내달 25일쯤 비교적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미래구상'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양극화 진단과 처방에 있어서 이번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득 격차, 고소득자와 저소득자의 격차를 들어 내수 시장 불안과 소비 위축에 따른 저성장 문제가 야기된다는 차원에서 양극화 문제에 접근한다. 특히 경제위기가 양극화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IMF때 지니계수와 5분위배율이 악화된 점을 들어 지난 3년간 국민이 겪은 불황의 고통도 그 후유증 때문이라고 짚었다. 지금은 그 후유증이 거의 극복되었고, 정부가 위기의 징후를 사전에 발견해서 적절한 대응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늘날 다수 사회구성원을 사회적 빈곤으로 몰아온 양극화의 근본 원인이 개방화 시장화로 치달은 시장주의적 정책에서 비롯되고 있고, 그 일차적 책임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쳐온 노무현정권 자신에게 있음을 반성하는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양극화 해소 방안은 사후약방문에 억지 춘향 격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 문제 해결의 핵심을 일자리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 활성화와 고급 서비스산업 집중 육성, 교육 의료 시장 개방 등을 제기했다. 서비스산업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은 금융, 물류, 법률, 회계, R&D, 컨설팅과 같은 분야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동북아 금융중심, 물류중심, 전문대학원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대학교육과 의료서비스 역시 "고급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분야이므로, "과감하게 개방하고 서로 경쟁하게 해야 한다"며 의료 교육의 시장화 정책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또 문화·관광·레저와 같은 서비스산업도 다양하게 육성하고 고급화한다는 점도 일자리 창출을 염두에 두고 제기하였다. 이밖에도 보육, 간병, 교통, 치안, 식품안전, 재해예방, 환경관리와 같은 사회적 서비스 일자리를 양극화 해소 대안으로 던져놓았다.

그런데 양극화 문제의 핵심에는 800만 비정규직 문제가 놓여있다. 일자리는 어떤 일자리냐, 즉 고용의 질을 따지는 문제이다.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일자리 창출이 양극화 해소의 해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양극화 심화의 본질이 사회적 빈곤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일을 해도 빈곤이 재생산되는 시장 구조에 수술을 가하지 않는 한 근본 치유는 어렵다는 것이 지금까지 경험해온 교훈이다. 일시적인 실업대책이나 공공근로 같은 일자리 창출 방식은 양극화를 해소하기는커녕 사회적 빈곤의 고착화로 이어진다는 것을 수년간 목도해 온 바다.

더욱이 교육 의료 개방을 강조하는데 이는 사회불평등을 부추기는 일이다. 개방정책이 경쟁과 대립을 부르고, 시장주의 정책이 사회적 빈곤을 심화해왔는데, 아직도 개방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거론하는 것은 심각한 이율배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양극화 문제가 산업화를 통한 시장친화적 방식의 일자리 창출과 같은 모순된 처방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게다가 신년연설에서 어느만큼 질적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창출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점도 양극화 해소 전망을 불투명하게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국회에 내놓고 있고 특수직 근로종사자를 위한 종합 보호대책을 세워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가 제출한 비정규법안이 비정규직 확산과 고용불안을 야기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고백하지 않고 지나갔다. 대기업노조가 높은 고용 보장을 받고 있고 해고가 어려우므로 이러한 시장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며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동안 주요 연설에서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써먹어온 고정 매뉴얼 중 하나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부동산과 사교육비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밝히고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 확충 방안, 고령화, 저출산 대책 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사교육비 문제는 대학교육을 특성화하고 입시방법도 다양화한다는 이야기 외에 아무 내용이 없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저소득층에 대한 교육비 지원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사교육비 문제는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법 외에 해법이 없다는 것이 교육 현장의 목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교육 개방 흐름과 맞물린다면 사교육비 문제의 해결 전망은 더욱 불투명할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국민연금 문제나 언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책임있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회'를 강조했다. 국가 제도 정비, 행정과학화, 공직문화 개선 등 올해 정부의 역점 사업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윽고 "올해, 그리고 그 이후에도 대한민국 기적의 행진을 계속 이어갑시다"라는 인사말과 함께 40분에 걸친 신년연설을 마무리했다.

양극화, 고용 불안, 사회안전망, 부동산, 사교육비, 저출산고령화, 노사 대립 등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문제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연설을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불행과 위기 요인을 하나하나 들춰주었다. 어디가 곪고 있는지, 어디가 위험한 상태인지를 짚어준 셈이다. 그러나 원인 진단에서 진지함과 진실함을 보이지 않았고, 처방에서 해결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책임있는 생각과 행동'은 사회구성원을 향해 윽박지르는 훈시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원하는 그 기적은 앞에도 일어난 적 없었다. 뒤에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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