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사회, 혁명운동 그리고 변증법

[이상한제국의앨리스](9/10) - Richard Levins의 세계

한 달에 한 차례 글을 올리기로 편집부와 철썩 같이 약속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난달을 거르게 되어 (별로 기다리진 않으셨겠지만) 독자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레빈스 교수의 쿠바 체류 때문에 약속 일정이 미뤄져서...

떨어진 신뢰 회복을 위해 이번 회는 양(!)으로 승부할 생각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시고 스크롤 압박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

레빈스의 수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급진적 생태주의자이면서 (저야 잘 모르지만) 명성 높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어렸을(?) 적 앵무새처럼 암기나 했던 변증법의 핵심 원리들이 저의 연구 작업과 세계 인식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해야만 하는지를 깨닫고 새삼 놀랐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알게 된 그의 이력에도 놀랐고....

이번에 그를 만난 것은, 참세상 독자들에게 과학, 사회, 변혁 운동에 대한 ‘고수’의 이야기를 전해주고픈 마음과 더불어, 저의 연구 주제와 자기정체성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 개인적인 동기가 함께 작용한 것입니다. 이전 글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길고 다소(?) 딱딱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즐겨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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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1)

레빈스는 미국 뉴욕 출신으로, 여성 실업자 평의회와 1930년대 뉴욕의 의류노동자 파업을 이끌었던 공산주의자 할머니, 1919년 청년 공산주의자 연맹의 창립회원이었던 아버지를 둔 3대째 공산주의자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노동자라면 우주론, 진화,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어린 레빈스가 글을 깨우치기 전부터 마르크스주의 과학자들의 저작을 읽어 주고는 했다.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할머니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배우되, 그것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으니, 1930년대 독일에서 비롯된 인종주의적 우생학과 이윤 착취에 복무하는 기존 학문의 위험성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레빈스는 노동절이면 학교를 빼먹고 존 리드 클럽이나 여성 평의회 등이 주관하는 행진에 참여했으며, 과학자이자 운동가가 되는 것을 인생의 당연한 행로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한 레빈스는 1950년대 한국 전쟁과 매카시 열풍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시절, 푸에르토 리코 출신인 아내와 함께 1951년 푸에르토 리코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그는 공산당 활동과 함께 농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FBI의 입김 때문에 대학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선택한 삶의 방편이기도 했다. 중간에 4년 동안 뉴욕에서 대학원 학업을 계속한 뒤 푸에르토 리코에 돌아갔을 때에는 정치적 억압이 다소 완화되어 있었고 그는 ‘푸에르토 리코 대학’에서 생태학 교수 자리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 활동 - 특히 1965년부터 본격화된 베트남 반전 운동 - 은 계속되었고 1966년 종신 교수직 심사를 앞두고 FBI 끄나풀이 주도한 언론 공작에 의해 ‘무능함’을 이유로 재임용에 탈락하기에 이른다.

1967년 미국으로 돌아와 이후 시카고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갖게 되었다. 한편 쿠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4년, 혁명 현장을 돌아보고 집단 유전학 개발에 자문을 하기 위해 쿠바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생태 농업과 생태적 경제 개발을 향한 쿠바의 투쟁과 노력에 깊이 관여해왔고 오늘날에도 이는 지속되고 있다.

학문적으로, 그는 변증법에 토대를 둔 진화생물학자로서 근대 서구 과학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배격했을 뿐 아니라 합 목적론 혹은 기능주의적 진화론, ‘자연의 조화’라는 이상주의적이고 목가주의적인 생태 운동을 비판해왔다. 평생의 학문적-정치적 동지인 르원틴과 함께 『변증법적 생물학자(Dialectical Biologist)』(2)를 저술했으며, 절친한 동료였던 스티븐 굴드의 세계를 조망한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의 ‘급진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평가에 따르면, 푸에르토 리코 독립 운동 참여를 통해 반제국주의자, 국제주의자로서의 자각을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제국의 이해에 복무하는 학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의 날카로운 노동계급 페미니즘은 엘리트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며, 쿠바와의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착취적인 사회에 또 다른 대안이 있음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연구실이 조만간 보수공사에 들어간다고, 배경이 영.. ㅜ.ㅜ 마스터 제다이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가? (요다 말고, 오비완 커노비)

1. 과학과 사회



★ 제가 미국에 와서 진짜 충격 받았던 게, ‘진화론 대 지적 설계론’ 논쟁(3)이었어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지적 설계론 가르친다는 나라는 지구상에 미국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중에 보니까, 미국인의 절반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이예요? 21세기에 이게 뭔 일이래요? (녹취한 걸 들어보니 막 따지고 있음 ㅡ.ㅡ)

☆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미국사회의 뿌리 깊은 반(反) 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를 들 수 있다. 미국에 처음으로 정착이 시작되었을 때, 이주자들은 대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었고 상식과 근면한 노동만 있으면 충분한 살아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본이 축적되고 은행이 생겨나고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이들 압제자들 - 교육 받은 동부 해안의 자본가와 은행가들, 그리고 지식인들 - 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강력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두 번째로는 현재 미국의 우파들이 두 가지의 다른 커뮤니티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부유한 기업가 집단 - 이들은 진화론이나 낙태 문제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윤만 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정치적 기반 확대를 위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힘을 키워왔었다. 당혹스럽게도, 지금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 관련된 이야기인데, 현재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지형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참 난감해요. 우선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극렬 반대하잖아요. 여태까지 프로테스탄트 원칙이 자본의 이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왔던 걸 본다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마치 인류를 질병에서 구원할 것 같은 엄청난 기대에다 이윤 창출의 노다지라는 생각 때문에 기업과 국가가 연구 개발에 왕창 몰려들고... 여기다 한국에서는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민족주의적 열기까지 더해져...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줄기세포 연구의 윤리문제를 비판하면 친미적 배신행위로 비난 받기도 했다니까요. 이런,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들을 어떻게 종합하고, 좌파 고유의 비판적 관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 이건 좀더 큰 문제, 과학의 근본에 관한 질문이다. 과학은 보편적이면서도 일국적이다. 어떤 측면에서 전체 인류를 위한 지식을 심화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관계를 가진 지식 산업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 자체가 상품화되면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과학을 하는 상황이 출현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다른 상품들을 취급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과학을 다루고 있다. 상품은 일단 생산되고 나면 빨리 시장으로 이동해야 하고, 똑같은 이유로 과학에서도 이윤과 관련된 특허권을 빨리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결과를 날조하거나 과장하게 된다. 매년 출시되는 의약품의 1/3에서 절반이 유해효과 때문에 5년 내에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는 현상은 이와 관련 있다. 5년 후에 퇴출된다고 해도 그 동안 이윤을 챙길 수 있다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그래서 과학에서의 부패는 제도화되어가고 있다.

또한, 과학자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화되어 가고 있다. 기업들이 과학자를 학술 ‘인력’으로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영국의 직조공들이 경험했던 소외를 과학자들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거나 자신을 노동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제 과학은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그 초점은 소유주의 관심에 따를 수밖에 없다. 모든 지식이 다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화학 살충제는 매년 농민들에게 팔 수 있지만, 함께 심음으로써 토마토를 해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작물은 매년 팔 수 있는 게 아니다. 책에 한 번 쓰면 끝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불균등한 과학 발전이 일어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줄기세포 연구는 과거에 휴먼게놈 프로젝트처럼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를 가능하게 만드는 보증수표처럼 인식되고 있다. 급진주의자들은 이러한 모든 인기 영합주의를 거부해야 하며, 또한 과학을 과학 외부로부터 조종하려는 어떤 것도 거부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허용을 지지하지만, 그게 모든 질병을 치료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과학 연구의 자유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언제나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야 한다. 모든 것을 자료로 바꾸려고 하는 과학주의 (이를테면 비용-효과 분석), 그리고 또한 과학의 신비화에 대항해서 말이다. 현재 부시 정부는 이중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들은 과학적 근거 -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합리화시켜줄 과학적 근거 (이를테면 기후변화 문제가 결코 심각한 게 아니라는)를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신비화를 진행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지적 설계론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이 대두하고 있는 거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학을 방어하고 과학을 비판해야 한다. 또한 지식 산업의 상품화된 산물을 비판해야 하고, 과학의 의제를 변화시키려는 투쟁을 해야 한다.

★ 한국에서 최근에 있었던 스캔들은 알고 계시죠? 일단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까 그야말로 무수한 학자들과 사회비평가들, 언론 매체들이 너나없이 우려를 표명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놓고 있어요. 대부분 동의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 이를테면 과학진실성 위원회(ORI)나 기관윤리심의 위원회(IRB)를 설치하고 강화하는 방법이죠. 한편 연구자들은 그동안 ‘진실 추구자’로서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손상 받은 데 대해서 크게 낙심한 거 같아요. 그래서 과학자의 양심과 자율성 회복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런 논의에 중요한 문제가 빠진 게 아닌가 싶어요. 우선, 전문가 위원회 말고, 과학 생산 과정에 대한 대중이나 과학기술 노동자의 ‘사회 민주적 통제’에 대한 고려가 없어요. 또, 세분화와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고 있는 학술 노동의 소외와 분절화를 어떻게 다룰 건지도 이야기가 전혀 없구요. 사실 이거야 말로 과학사기를 가능하게 하는 좋은 토양 아닌가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에 의해 조건 지워진 연구자들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학이 정치나 이데올로기, 사심어린 이해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떨어져 홀로 설 수 있다는, 이건 그저 신화 아닌가요?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좌파적 대안은 어떤 게 되어야 할까요?


☆ 우선, 대학 연구로부터 이윤을 획득하는 구조부터 없애야 한다. 과학자들이 연구비를 받지 않고도, 특허를 획득하지 않고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상품과는 무관한 장기적인 지적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학문적 자유의 기반이다.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자율성을 유지해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정년 보장 교수라고 해도 대학원생들을 지원해야 하는 문제가 남고, 또 학생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첨단유행의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믿지만, 어떤 분야가 유망할지는 다른 이들이 이미 결정해 놓은 것들이다.

☆ 또한, 과학 내부에서, 환원주의를 극복하는 의제들을 스스로 요구해야 한다. 환원주의적 접근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DDT로 말라리아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몇 년에 불과했다. 모기들이 금방 저항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항생제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세균이 그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틀렸는지, 왜 실수를 저질렀는지 살펴보면, 환원주의적 틀에 따라 문제를 너무 협소하게 제시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의사들은 수의학자나 농학자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염병의 재창궐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식물, 야생 동물, 가축에게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지적 협소화는 과학의 상품화가 가져온 결과 중 하나다.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많은 등록금을 내야하고, 이걸 빨리 보상할 수 있고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학문 분야를 공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 운동이 학술 연구의 의제를 상당히 변화시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지역사회 여성들이 자녀들이 비슷한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연구자들에게 조사를 요구하기도 했고, 소수인종 그룹이 자신의 동네에 버려지는 유해 폐기물들과 질병 발생의 관련성에 대해 연구를 요구하기도 했다. 환경 운동과 건강권 운동은 기존의 학문들이 정립해놓은 경계를 넘어서는 연구들을 요구했으며 때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특히 정치정당과 밀착해 있을 경우에는...

☆ 우리는 좌파 정당들이 협소한 현실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적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방식에서 진정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과학 발전의 의제를 그들의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도록 요구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앞서의 답변 - 과학은 보편적이면서도 일국적이라는 명제로 돌아가게 된다. 모든 관점과 위치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위치는 자체의 통찰력과 무지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며, 우리는 우리의 과학이 어떤 측면에서 통찰력이 있고 어떤 점에서 무지한지 자문해야 한다. 농민들과 함께 일해 보면 주변 환경과 경험에 대해 그들이 매우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비교에 근거한 지식, 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다.

내가 쿠바에서 배운 것을 예로 들어보자. 그 곳에는 농민들 왈, 나무들이 바람 쪽을 향해서 자란다는 계곡이 있다. 그런데 식물생리학에서는 바람이 잎을 마르게 하기 때문에 그 반대편으로 더 잘 자란다고 나온다. 실제로 그 계곡에 가보면 정말로 나무가 바람 부는 쪽을 향해 자라고 있다. 태양광이 비치는 곳과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같은 방향인데, 태양의 효과가 바람의 효과보다 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자, 보자. 현지 주민은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관찰을 했지만, 일반화에는 약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외부에서 추상적 과학을 통해 접근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구체적 사실에는 어둡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호 이해를 위해 함께 작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일반성과 특수성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과학은 일반화를 할 수 없다. 또한 다른 사회적 목표는 다른 종류의 요구를 낳고 연구 의제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는 대안적인 에너지 생산에 보다 관심이 많을 것이고, 미국처럼 땅이 넓은 나라는 광범위한 농업생산에 대한 전략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지형의 농업 문제는 한국 농업학자들에게 중요하지, 북미 학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보편적인 지평을 포기하지 않고도 사회 고유의 맥락과 과학적 전통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중 하나는, 대부분의 학술 출판이 몇몇 중심 저널이 주도하는 영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경력을 만들기 위해, Lancet 같은 저널에 출판하기 위해 실제 요구와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쿠바에서 논의한 것 중 하나가 라틴 아메리카의 고유한 독립적인 학술 저널을 출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좌파 정당들은 우리의 개발이 경제적인 발전과 함께 지속가능한 것이어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개발이,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우호적이면서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질병들이 노동현장과 관계있다. 특정한 화학물질이 암을 발생시킬 수도 있지만, 노동의 조직화 방식 자체가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노동자가 책임만 무겁고 자율성이 부족한 상황은 불안과 심장병을 일으킬 수 있고, 무관심, 우울, 자살률과도 관계있다. 한국에는 아주 놀라운 경제적 성과를 보여준 기업들이 많이 있다. 개발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복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좌파 정당이라면 어떠한 것이 진정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과학적 의제가 되어야 할지 정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공동 노력에 의해 태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한 번은, 캐나다에 육가공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퀘벡 대학의 연구자들을 찾아가 손에 사마귀가 많이 생긴다고 털어놓으면서 이 원인을 좀 밝혀 달라고 했다. 부탁을 받은 연구자들을 당신들을 ‘위해’ 연구할 수는 없다 - 다만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갈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육가공 사업장에서는 장갑을 끼고 일하는데 그 장갑들은 손상을 예방하기 위해 금속섬유로 강화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갑이 꼭 맞지 않으면 오히려 장갑이 손에 찰과상을 일으킬 수 있고 그로 인해 바이러스 감염이 쉬워진다. 이런 공장의 실온은 매우 낮고, 그러면 피부 표면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면역 체계가 약화된다.

이렇게 두 가지 요인이 합쳐져 감염이 쉽게 일어나고 특히 냉동 육류를 다루는 노동자에게서 이런 문제가 빈발하고 있었다. 함께 공동의 노력을 기울였을 때에만 특정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민중 운동이, 노동 운동이 과학 의제를 정하도록 해야 하고, 과학은 그 스스로의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학술 운동과 대중 운동, 노동운동의 결합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존 스노우 연구소(4) 같은 경우만 해도, 처음에는 지역 주민들의 참여에서 비롯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별 차별성 없는 전문 컨설팅 회사로 변해 있잖아요.(5) 한국에서도 지역사회에 토대를 둔 참여연구센터 운동(6)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 어떤 종류의 보호 장치를 마련할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선, 비전문가를 의사결정기구에 포함시키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 했을 때 문제점은 그들이 측정한 자료들의 신뢰도가 낮고 기술적 오류의 가능성도 높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점이라면 이들이 서식지(habitat)의 좀더 폭넓은 상황,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며 이는 전통적인 역학자들이 갖지 못한 것이다. 과학자와 지역사회 주민들이 실제 운영위원회에 포함되고, 노동조합들이 여기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또한, 기업과 연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독립적인 재원조달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는 정부가 이러한 자율적 연구기관들을 지원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자율 대학 지원을 위한 고정예산 편성 촉구 운동이 있었다.

예산의 일정 분율을 확보해놓으면, 정치인들이 어떤 대학이나 어떤 연구에 지원할지 결정하는데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것을 독립 연구소에도 적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쉽지는 않다. 예산은 언제나 빠듯하고 기업의 연구비를 받으려는 유혹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대목에서는 강력한 헌신과 결의가 필요하기도 하다. 특히나 연구 결과가 특정 기업의 상품과 관계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연구 윤리에 관해서라면 개인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집단적인, 조직적인 동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 연구 센터들은, 주민의 불만이나 요청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해야 한다. 저널리스트와 학자로서의 결합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소리다.

★ 근데, 여기 미국에도 노동조합 형태의 학술 연구자 조직이 있나요? 한국에는 과학기술 노조가 있는데... (사실, 영문 이름이 기억 안나 대충 얼버무림 ㅡ.ㅡ).

☆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여 세워진 의사들의 조직 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 MIT 출신 연구자들이 닉슨정부의 군사 프로그램에 저항하면서 설립한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대학의 군사연구 지원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던 ‘Science for the People’ 등을 들 수가 있다. 과학 산물의 이용과 관련하여 과학자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를 통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누가 과학자가 되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쿠바가 강력한 과학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시민 전체가 인재 모집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이다. 무상 교육에, 인종 간, 성별 간 차별을 극복하면서 누구나 과학자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 사회의 구성이 바뀌어, 흑인이, 여성이 지도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게 되었다.

내가 속한 (쿠바) 기관과 연구소들만 해도 여성이 대표로 있거나 비중이 절반이 훨씬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과학자는 일부 기득권 계층 출신인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자신의 출신 배경에 따른 정치적 태도를 가지기 마련이다. 형제 중 한 명은 의사요, 하나는 농장 소유주, 또 다른 형제는 상원의원...

★ 맞아요. 한국에서 지금 바로 그런 문제가 벌어지고 있지요. 대학 등록금은 자꾸만 비싸지고, 교육이 계급을 영속화시키는...

2부 : 쿠바 이야기



★ 요즘에도 매년 겨울마다 쿠바에 가시잖아요?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지 좀 소개해주세요.

☆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생태 농업으로의 이행을 성공시키기 위한 작업을 농림부와 함께 진행 중이고, ‘생태 및 시스템 연구소’에서 생물다양성 보존을 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확립시키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 하바나 대학의 ‘건강과 안녕 센터’에서 보건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그 밖에 ‘열대의학 연구소’, ‘복잡성과 변증법을 위한 철학 연구소’에도 관여하고 있다. 서로 동떨어져 보이지만, 이들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모두는 사회주의적 개발 (socialist development)을 의식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드는 전체 전략의 부분이다.

★ 쿠바의 ‘생태적’ 개발 성공 사례는 유명한데... 사실, ‘환경’이니 ‘지속 가능성’이니 하는 것들은 선진국들한테나 해당하지 당장 먹고 사는데 급급한 개발 도상국가들한테는 요원한 이야기로 들리잖아요. 쿠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또,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떤 게 있었나요?

☆ 쿠바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계급 갈등이 아니라 비전의 차이 때문에 투쟁이 벌어졌다. 어떤 식의 발전을 할 것인가? 쿠바에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성공을 거두려면, 완수 가능한 임무가 주어져야 한다. 성취 불가능한 요구는 당혹과 절망감만을 낳을 뿐이다. 당시에는 지식을 축적하고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매우 급박한 문제였다. 쿠바사회의 무지와 비효율, 경직성은 굉장히 심각했다. 러시아에서 원조 물자로 타자기 리본을 대거 보내줬는데,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읽을 줄 몰라서 이걸 파자마 고무줄로 사용했다. 또 농림부 관료가 봐달라고 해서 가보니 독일로부터 들여오는 종자가 사실은 농사용이 아닌 빵 만드는 재료인 적도 있었다. 우리가 회의석상에서 DDT의 건강 유해성을 문제 삼으니까 한 사람이 일어나서 소련에서도 만드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진정한 변화가 필요했다.

정치의식이 일정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지적 자원이 필요하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는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필요는 절박감을 낳고 이는 때로 지름길을 쫓다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필요’와 ‘훌륭한 생각’이 만났을 때만이 긍정적인 변화를 낳을 수 있다. 소련과 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이 망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대안적 농업개발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쿠바에서 생태혁명이 가능했었던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소련의 패망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필요’보다, 그동안 내부에서 발전 전략을 두고 투쟁하며 준비해왔었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이 쿠바의 보건의료 시스템의 성과에 놀라워하죠. 더구나 최근에 베네수엘라의 보건 프로젝트인 ‘바리오 아덴뜨로’ 사업을 지원함으로써 또 다른 찬사를 얻고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미국 웹 사이트를 찾아보니까, 쿠바 보건의료 체계의 ‘진실’을 폭로한다는 것들이 꽤 있더라구요. 질 높은 의료 서비스는 다 외화벌이를 위한 거라서 외국인 환자들만 이용하고 일반 시민들은 이용할 수 없다더라. 공공 보건의료 기관들은 기본 의약품도 없고, 진짜 끔찍한 수준이라더라 등등... 전형적인 미국의 악선전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우리(?)도 너무 긍정적인 부분만 바라보고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쿠바 보건의료의 실체,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해주세요.

☆ 어디에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과에 대한 통계들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체계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고 현재도 문제 개선을 통해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의약품 부족 같은 문제는 분명한 사실이다. 무역 봉쇄조치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필요한 의약품이 1천이라면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것은 겨우 5-600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쿠바 의료 시설의 일정 부분은 의료 관광객을 위해 쓰이고 있다. 어떤 병원은 10%의 병상을 여기에 할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 10%가 병원 전체를 먹여 살리고 나머지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의사들은 어떤가요? 베네수엘라 같은 경우 의사들이 바리오 아덴뜨로 사업에 반대하고 참여도 안 하잖아요.

☆ 상황이 다르다. 혁명 당시 30%의 의사들이 쿠바를 떠났다. 남아 있는 의사들은 사회에 대한 헌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교육을 받은 새로운 의사 세대가 성장하고 있지 않나. 많은 의사들이 돈을 버는 것 보다 사회적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쿠바에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의사들이 대부분 수도 하바나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교육과 수련 과정에서 오지나 빈곤 지역에서의 활동을 경험하고 있다. 의학 교육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세계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 자연, 문학을 포괄하는 기본 교육과 함께 의학 윤리 교육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 한국 같은 경우 의사들이 대개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ㅡ.ㅡ

☆ 쿠바도 옛날에는 그랬다. 지금은 아니지만.... 베네수엘라의 경우에도 지금 쿠바와 New Medical School에서 새로운 의학교육이 진행되고 있으니 10년 안에 수천 명의 젊은 의사들이 배출되고 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구세대 의사들은 결단을 내려야할 것이다. 미국의 마이애미 부촌으로 옮겨가서 개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변화를 인정하고 자국에 남아 있을 것인가.

3. 삶과 운동



★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미국에서, 그리고 이 하버드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나요?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 내 평생, 한 번도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성공적인 이력’을 열망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정체성을 학계의 공식적인 보상과 인정 체계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고, 교수 사회의 상식을 공유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에게 폭넓은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1974년 국립학술원 (National Academy of Science) 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베트남 전에 대한 학계의 협력을 비판하며) 이를 거부한 것도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 결정이었을 뿐이다. 또한 나는 정치적으로 항상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려면 학계 외부에 급진적 커뮤니티를 갖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대학에서도 의견을 함께 하는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버드의 S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원자론적 환원주의에 함께 반대했고, D의 경우 공해의 건강 영향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고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하려는 N과도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특히 T같은 경우 그녀의 지나친 민족주의적 성향만 뺀다면 과학과 정치에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과 따뜻한 인간적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관계들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너도 대학 사회에서 누군가와 모든 면에서 견해가 일치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할 필요는 없다. 만일 어떤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면, 왜 그렇게 느끼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또한 네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분명한 인식을 하고 이를 헤쳐 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나도 학교에서 인간 생태학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철학적 지향, 원자론적 환원주의에 대한 선호, 정치적 보수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대학의 원칙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자체를 바꾸는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기본적으로, 하버드는 지배계급의 기구다.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는 사람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가르치고, 하버드는 ‘누구를’ 죽여야 할지 가르친다고 한다. 대학의 경우 교원을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한다.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득실을 따진다. 연구 성과가 좋거나 교육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면 정치적 문제를 좀 일으키더라도 문제 삼지 않지만, 그 수위가 점점 높아져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면 이를 다시 고려하기도 한다. 안정된 상황에서라면 다양성을 가진 게 학교의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50년대 매카시 광풍에도 하버드는 극소수의 교수만을 해직시켰다. 내가 하버드에 처음 왔을 때, 마침 경제학과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쫓아낸 참이었다. 아마도 대학 당국이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정치적 관점이 별 문제가 안 될 걸로 생각했던 거 같다. 당시 진화생물학 분야를 이끌었던 우리 셋 - 나, 스티븐 굴드 (Stephen J Gould), 르원틴 (Richard Lewontin) - 모두 마르크스주의자 아니었나.

★ 요즘 한국의 진보 운동은 매우 힘든 시기를 맞고 있어요. 뭐 제가 이러쿵저러쿵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가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지요....

☆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는 시기, 혁명주의자들의 주된 임무는 의식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이념은 서로를 강화하면서도 모순하는, 개념의 전체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이념뿐 아니라 느낌에서도 마찬가지다. 토론을 통해, 경험을 통해, 그러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이에 대한 도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베트남 전에서 고엽제의 위험성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국 정부의 첫 번째 반응은 그저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힘들어지자 전쟁 자체가 비극이고, 양쪽 모두의 잘못이라고 둘러대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것마저 먹혀들지 않자 우리의 과실(mistake)이라고 인정했는데, 이들이 인정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지 전쟁 자체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현재 이라크 전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군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학대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 상황에 처하면 너희라고 다를 줄 아냐고 발을 빼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적군이고 아군일지 알 수 없는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도시 자체를 점령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거는 분명 잘못된 전쟁이다. 전쟁이 저지른 잘못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전쟁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의식을 전환시켜야 한다.

특히 좌파에게 마르크스주의 교육은 굉장히 중요하다. 문제는 교조적인 슬로건화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전 세계 좌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끌어들여 해석하고 있다. 또한 이런 시기일수록 운동의 방식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항이 폭력적일수록 급진적인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자포자기의 행동일 수도 있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 과연 우리가 지지를 끌어내고자 하는 대상, 우리의 상대편, 그리고 우리 운동 내부에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우리의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운동을 건설해야 하며, 엄격한 국제주의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과거에 걸어온 길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과오를 이해할 때만이 이를 피할 수 있다. 운동이 열망하는 바와 실제로 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어왔다. 기독교인들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 왜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서 듣는 이야기를 주중에 실천하지 않을까? 우리 급진주의자들은 여기에 더 나은 답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자로서 과거로부터의 유산 - 우리 자신을 포함한 - 을 가지고 미래를 건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건설하려고 하는 사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며, 우리 삶을 이에 따라 미리 형상화하려고 하지만 완벽할 수는 없다. 내가 처음으로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공산당 활동을 하는 건 좋은데 ‘공산당’과 ‘공산주의 사회’를 절대 혼동하지 마라. 만일 당이 공산주의적 삶을 보장해준다면, 굳이 혁명이 필요 없을 거다. 이미 자본주의 안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소리 아니겠냐!”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은 민중에 대한 정직성을 그 어느 순간에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혁명 운동의 장기적 목적은 결국 민중의 역량을 강화하고 그들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정치적 이득을 위해 대중 조작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노조 총회에서 정치적 분파들끼리 특정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얼마나 싸우나. 하지만 많은 경우, 평 조합원들한테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도 하고, 지도부와 평 조합원 사이의 간극, 냉소주의를 조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현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전체 노동계급이 스스로 통치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꿈꾸지 않는가? 그것은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바보가 되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롭다.

쿠바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전국 의회에서 무언가를 의결한다고 할 때, 이는 이미 지역 공동체와 조직에서 수많은 논의를 거친 것들이다. 그래서 최종 결정 단계에서는 그리 큰 논란이 벌어지지 않는다. 한 번은 생태학자들 모임에서 내가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고 와서 내려다본다면,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했더니만 답변이 ‘모든 사람이 다 회의에 가 있는 거 보고 알지’였다. 모든 운동은,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성공적이든 상승과 하강 국면이 있기 마련이다. 상승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강기에 얼마나 더욱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운동의 힘이 약한 시기에 일어나는 가장 큰 논쟁 중의 하나는 제휴 (coalition) 문제다.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이냐... 만일 우리가 어떤 제휴에 대해 완벽하게 만족한다면, 그건 그 제휴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휴 내에는 반드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공통의 기반을 찾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서 상호작용하고 서로 배워야 한다.

내가 비록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평화운동의 상당부분이 종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유물론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전통적으로 영국의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독일의 철학을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이라고 이야기했다면, 오늘날의 혁명 운동은 생태운동, 민족해방운동, 페미니즘에서 그 자양분을 얻고 있다. 운동은 이러한 생각들에 개방되어 있어야 하며 서로 제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운동에서 변증법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 네....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쿠바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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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읽느라 지친 독자들을 위한 보너스

레빈스의 진짜 매력은 평생에 걸친 이런 이론적, 실천적 단호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풍자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점! 이사도르 나비 (Isadore Nabi)라는 가공의 과학자를 만들어내서 그럴 듯하지만 황당하기 그지없는 궤변을 늘어놓아 학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풍자 넘치는 편지글과 광고로 사람들에게 지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 중 하나, 이사도르 나비 인력회사의 모집 공고를 일부 소개한다.

“우리 회사의 과거 성공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나자렛 출신의 10대 미혼모를 탁월한 신앙 드라마의 주연으로 만든 것. O. bin L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비정부 기구의 대표로 채용한 것. 텍사스 기름 장수의 그저 그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맹한 아들을 위해 일류 일자리를 찾아준 것. 우리 회사는 현재 역사상 가장 도전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는데, 바로 UniverseTM의 새로운 지적 설계자를 찾는 것이다...”

  이사도르 나비 인력 회사의 모집 공고




(1) 2005년 7월, 캐나다에서 열린 ‘생물학의 역사, 철학, 사회학 국제 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제목 -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째를 지칭한다(‘철학자들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2) 먼쓸리 리뷰 서평 참조:http://www.monthlyreview.org/0505clarkyork.htm

(3) 진화론은 그저 하나의 이론(theory)일 뿐이기 때문에 대안 이론(alternative theory)도 가르쳐야 한다면서, 일부 지역의 교육위원회에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을 생물시간에 가르치도록 하여, 재판 붙고 난리 났던 사건 (현재 진행형!). 지적 설계론의 옹호자들은 진화 자체는 인정한다면서, 다만 생명체라는 것이 너무나 오묘해서 우연히 발생하는 진화의 결과라기보다 무언가 고도의 우월한 존재가 설계한 진화의 경로를 따라온 것이라고 주장. ‘창조론’이라는 이름을 버림으로써, 종교가 아닌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과학자들 - 특히 진화생물학자들은 완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

(4) 존 스노우(John Snow)는 19세기 런던 콜레라 대유행 당시, 역학 조사를 통해 오염된 상수 공급이 콜레라 발생의 원인이라는 걸 밝혀낸 역학계의 전설적(!) 인물. 1970년대, 매사추세츠 워번 지역 주민들은 어린이의 백혈병 발생률이 유난히 높다는 걸 자각하고 그 원인을 규명해달라고 국립보건원과 질병통제센터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하버드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자체 역학조사를 수행, 기업의 폐기물에 의한 식수원 오염이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소송을 통해 피해보상과 함께 관련 법규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 활동에 참여했던 연구자들과 주민들은 전설적인 존 스노우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연구소 홈페이지: http://www.jsi.com/JSIInternet/ )

(5) (부시 행정부의 아프리카 의료 인프라 지원 사업에는 Lockheed Martin, Northrup 같은 군수회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데, 존 스노우 연구소가 Northrup과 손을 잡았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음)

(6)시민참여연구센터 (홈페이지 :http://www.sciencesho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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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어느 정도의 비판적 시각을 갖춘 과학자로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 분 내공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가슴에 와 닿는 주옥같은 말들이 많습니다. 아주 훌륭한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 marishin

    어느 정도의 비판적 시각을 갖춘 과학자로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 분 내공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가슴에 와 닿는 주옥같은 말들이 많습니다. 아주 훌륭한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 김현우

    레빈스의 깊고 넓은 면 놀랍군요. 앞으로도 이런 기획기사 기대하겠습니다.

  • 김현우

    레빈스의 깊고 넓은 면 놀랍군요. 앞으로도 이런 기획기사 기대하겠습니다.

  • 김영식

    이런 종류의 과학기사들이 더 많이 풍부해 졌으면 합니다. 좋은 글 감사

  • 김영식

    이런 종류의 과학기사들이 더 많이 풍부해 졌으면 합니다. 좋은 글 감사

  • 진태원

    감사합니다. :-)

  • 진태원

    감사합니다. :-)

  • 야래향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담이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야래향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담이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peasnhr

    레빈스도 훌륭하지만 홍실님도 훌륭하심 +_+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peasnhr

    레빈스도 훌륭하지만 홍실님도 훌륭하심 +_+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horsain

    현재의 공부와 삶을 다시 고민하게 하는군요.
    잘 읽고 퍼갑니다.

  • horsain

    현재의 공부와 삶을 다시 고민하게 하는군요.
    잘 읽고 퍼갑니다.

  • 한재각

    진보정당에서 레빈스가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한 것을 한번 일구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큰 힘이 되는군요. 레빈스뿐만 아니라, 홍실님도 한번 뵙고 싶군요.

  • 한재각

    진보정당에서 레빈스가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한 것을 한번 일구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큰 힘이 되는군요. 레빈스뿐만 아니라, 홍실님도 한번 뵙고 싶군요.

  • 새벽길

    길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글이네요. 감사히 잘 읽었어요. 퍼갑니다.

  • 새벽길

    길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글이네요. 감사히 잘 읽었어요. 퍼갑니다.

  • 박권일

    좋은 인터뷰 정말 감사합니다.^^

  • 박권일

    좋은 인터뷰 정말 감사합니다.^^

  • 노지윤

    과학지식 사회학에 대한 막연함 속에서 새로운 지적 관심를 밝혀주는 글이네요. 딱딱하지 않고 수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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