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졸속 추진' 논란에 현혹되지 말라

범국본은 한미FTA 저지 싸움의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미FTA 협상에 사회구성원 다수가 우려를 표명하고 있지만 노무현정권은 일정 대로 수순을 밟고 있다. 한미 양측은 18일 워싱턴에서 열린 2차 실무협의에서 17개 분야를 협상 대상 분과로 확정했다. 17개 협상분과는 상품교역과 농업, 섬유, 원산지 및 통관, 무역구제, SPS(위생 검역), TBT(기술장벽), 서비스, 금융서비스, 통신 및 전자상거래, 투자, 정부조달, 경쟁,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분쟁해결·투명성·총칙 등이다

한 달 후인 5월 19일에는 각자의 요구를 담은 협정문 초안을 교환하고, 6월 5일부터 본 협상에 들어간다. 한국 측 김종훈 수석대표는 한미FTA 최종합의문은 협상이 타결되자마자 즉시 공개하되, 그 외의 모든 협상문서들은 3년 간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협상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하고, 협상전략이 제3국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아울러 2차 실무협의는 한미FTA의 공식 명칭을 'KORUS FTA'로 확정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한미FTA 협상 과정은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다. 2월 2일 공청회는 본 토론이 이루어지지도 않은 채 중단되었고, 3일에는 갑작스런 협상 선언이 이루어졌다. 이후 노무현정권과 친자본 나팔수들은 국정브리핑과 자본단체 등을 통해 한미FTA를 통해 직접적인 경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거나, 일자리가 늘어난다거나, 통상마찰이 줄어든다거나, 서비스산업이 발달한다거나, 양극화 문제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각종 통계를 보여주며 외길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통계와 주장으로 거짓 의혹 투성이였다.

어제 열린 한미FTA 2차 실무협상 결과 소식은 참으로 경악스럽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지난 15일 쌀은 협상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고, 교육, 의료 등 공공분야도 지켜야 하고, 전기.수도.가스.철도 등 국가안보와 연관된 공공분야 및 초.중.고교 등 의무교육 대상 분야, 국민건강보험 등의 분야는 개방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보인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17개 협상분과에 다 포함되는 분야이고, 무엇보다도 협상 문서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미FTA '졸속 추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이 연간 교역규모 35억 달러인 칠레와 FTA 협상을 개시해 타결하는 데 3년 1개월이 걸렸고, 국회 비준을 거쳐 발효되기까지는 4년 7개월이 걸린 점을 들어, 교역 규모 720억 달러로 칠레의 20배가 넘는 미국과 1년 1개월 만에 FTA 협상을 타결한다는 것은 시간표 자체가 무리라는 지적이다. 졸속 추진을 문제삼는 이 주장은 한미FTA를 속전속결하려는 노무현정권에 태클을 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 않으나, 한미FTA가 갖는 정치적, 정세적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부족하다는 데서 많은 문제가 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오늘 "한미 FTA의 3대 핵심의제는 관세 인하. 철폐 계획, 서비스와 투자, 지적재산권 분야"라며 "우리나라는 2001년부터 분기별로 한미 양국간 통상현안에 대해 14차례나 협의해왔고 6차례나 양국 통상장관협의를 거친 상태여서 미국측의 요구와 협상전략에 대해 이미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종 본부장의 말 역시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한미FTA에 나서는 한국 정부가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더우기 18일 노동부와 산자부는 앞으로 10년간 FTA로 피해를 입은 기업에는 2조6,400억 원, 노동자에게는 2,073억원 등 모두 2조8,473억 원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는데, 한미FTA 협상을 기정사실화하며 선수를 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종합컨데 결국 협상 자체를 문제 삼아야지, 협상 준비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일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협상 준비가 되어 있느냐 아니냐, 졸속 추진이냐 아니냐 여부에 이목을 집중하는 것은 한미FTA 저지 싸움의 기조를 해칠 소지가 크다.

2차 실무협의에서 확인된 것처럼 노무현정권은 미국과의 FTA 협상에 있어 비공개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핵심은 노무현정권이 한미FTA를 주어진 일정에 맞춰 계획대로 착수하고 있다는 점이고, 협상의 목표와 과정이 모두 폭력적으로 관철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게다가 우익이 '바른FTA'를 들이밀며 가동되고 있고, 이 달 들어서는 부문 분야별 저항을 교란하는 발언도 본격화되는 추세다.

지금 한미FTA에 반대하고 저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러나 반대와 저지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왜 싸우는 지를 분명히 이야기해야 한다. 가령 오늘 범국민운동본부는 4.19를 맞아 '총체적 대미종속을 우려하는 각계인사 시국선언 - 참여정부의 한미FTA 졸속 추진, 전략 유연성 합의에 반대하며'를 발표했다. 내용과 기조에서 다소 실망스럽다. 범국민운동본부는 한미FTA 저지 운동의 목표를 뚜렷이 하지 못하는 현재의 한계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긴박한 국면에서 한미FTA와 관련한 정세를 너무 안이하게 보는 건 아닌 지 돌아볼 일이다.

한미FTA 저지는 한미동맹의 고리를 끊는 전 사회구성원의 실천이 되어야 하며, 노무현정권이 추진하는 자유무역협정 자체를 중단시키는 투쟁 기조를 분명히 가져야 한다. 지금은 한미FTA의 효과적 전략이나 방안을 찾는 데 골몰할 것이 아니라, FTA 자체와 싸우는 구체적인 전략을 세워야 할 때이다. 특히 유럽에서 벌어지는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운동과 남미의 반FTAA 투쟁과 한 맥락을 이루어내는 의식적인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지금 졸속 추진인가 아닌가 논란에 현혹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