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출제된 시험지에 답하지 않기 위해, 걸으면서 묻는다

[에뿌키라의 장정일기](2) - 5월 12일 파김치의 일기

이주하는 몸이 공명한다

‘한미 FTA 반대,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 위한 수유+너머 대장정 이틀째, 우리는 숱한 갯생물들의 무덤이 되어버린 계화도 갯벌에서부터 동진강을 지나 군산을 향했다.


걷기 위해 묻고 묻기 위해 걷는다지만, 어제의 늦은 세미나와 오늘의 긴 행진 일정이 종아리 근육을 경직시킨다. 책상 앞에 붙박혀 있던 몸이 투정하기 시작한다. 책으로부터 떠난 몸의 떨림이 ‘시설’에서 떠난 장애인의 몸과 공명하고, ‘고향’을 떠난 이주노동자들의 몸과 공명한다. 책상은 나의 ‘시설’이었고, 나의 ‘고향’이었다. 이동할 수 있는 것은 권리이기 전에 능력임을 깨닫는다. 새만금 물막이 공사는 백합과 쿠리의 이주 능력을 빼앗아 버렸다. 그러자 갯벌은 생명을 잃고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한미FTA 협상을 고집하는 정부는 ‘개방’의 필요성을 말한다. 사기다. 그것은 진정 개방이 아니라 폐쇄이다. 한미FTA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가능성을 막아 버리고, 소비자들이 몸에 좋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 버리며, 뻔하고 재미없는 할리우드 영화 말고 참신한 스타일에 현실적인 삶의 진정성이 담겨 있는 영화를 더 많이 볼 수 있는 가능성, 보다 싼값에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 교육이 부의 상속 수단이 되지 않고 배움과 기회의 공간으로 될 가능성, 무엇보다 전쟁의 공포에 떨지 않고 맘 편하게 살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자본의 폐쇄회로에 가둬버리는 한미FTA는 새만금 물막이공사가 갯생물들의 생명을 빼앗듯이 우리의 생명을 스러지게 할 것이다.

만물은 하나다. 다시, 하나가 만물이다.

앞에서 걷고 있는 민이의 새파란 머리에서 여러 가지 표정이 읽힌다. 지난 5월 4일 대추리에 들어갔다가 전경한테 붙잡혔었다. 왠지 자꾸 눈물이 나와 엉엉 울었더니 전경이 “정말 미안해요” 하며 풀어주더라는 얘기가 다시 생각난다. 어제 해창 갯벌에서 백팔배를 하며, 민이의 눈물이 약함의 표현이 아님을 알았다.

전투경찰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가? 민이의 눈물은 군홧발에 짓밟힌 벼의 아픔에 공명한 눈물이었고, 50년 세월을 바쳐 일군 농토를 빼앗긴 대추리 농민들의 아픔에 공명한 눈물이었으며, 남의 나라 전쟁기지를 위해 제 나라 제 또래 젊은이에게 진압봉을 휘두르게 만든 권력자의 약함에 공명한 눈물이었다.

만물의 아픔에 공명할 때 눈물은 강함의 표현이 된다. 천성산 도룡뇽을 통해 다른 생명과 자연의 아픔에 공명한 지율 스님은 홀몸으로 국가권력을 떨게 하지 않았는가?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은 정치인들의 숱한 ‘제스처’가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들과 함께 하겠다는 불제자의 오롯한 실천이었다.

권력과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분명 ‘미친짓’이었다. 도룡뇽의 생명을 위해 2조억 원의 경제적 손실을 감수시키다니, 개발주의자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지율스님의 그 광적인 몸짓은 무수한 과거와 무수한 미래의 생명들과 교감하는 언어였다. 우리는 지금 다수(결)의 논리 속에 억눌린 그 소수자의 언어를 찾기 위해 걷는다.

Be the Minor! Be the Multitude! 소수이면서 어떻게 복수일 수 있을까? 우리는 저 멀리 프랑스 68혁명의 철학자가 던진 이 화두를 지금 한국사회에서 풀려고 한다. 다수(결)의 논리는 결국 하나를 지향한다. 월드컵은 세계를 하나로 만들 것이다. 그 하나의 열광 속에서 월드컵 공인구에 잠재된 소들의 주검과, 그 소들의 사료용 옥수수와, 그 옥수수를 위해 파괴된 아마존의 밀림과, 소가죽을 꿰매는 제 3세계 어린이들의 짓무른 손가락들은 망각될 것이다. 정부는 월드컵의 열광을 틈타 한미 FTA 협상을 개시할 것이고, 대추리의 땅에서 농민들을 몰아낼 것이다. 그게 다수의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월드컵 공인구 하나에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속에서 고통 받는 무수한 소수자들을 찾을 것이고, 그 복수의 소수자들과 함께 대추리를 지켜내고 한미FTA를 막아낼 것이다.

잘못된 시험지에는 답하지 않겠다

뒤에서 발갛게 익은 볼로 예쁜 표정을 만들며 걷고 있는 희선이는 지금 연구실에 두고 온 대추리의 보리를 생각하고 있을 게다. 출발할 때 보니 한 포기는 말라가고 있었고, 또 한포기는 이삭을 만들고 있었다.

이번 대추리 싸움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다수(결)의 논리와 대결해야 할 것이다. 진짜 적은 군대가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결정 논리이다. 미군기지 확장의 상업적 이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평택상인연합회의 목소리가 대추리 농민들의 목소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 저번 경주 방폐장부지 선정 때처럼. 목숨을 건 보상 열망에 경쟁의 불을 붙이는 이 끔찍한 다수결의 논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초등학교 1학년 때던가. 아주 못된 부자 친구 놈이 있었는데, 하교길에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에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초겨울의 살얼음판 연못을 제일 먼저 건너간 사람한테 500원을 준다는 것이었다. 아, 나는 그 상금을 탔고, 며칠간 심하게 앓았다.

그 철없는 부자 친구놈이 정부 요직에 들어간 걸까?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방사능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개발이익을 챙겨야겠다는 주민들의 수동적 욕망에 불을 지피는 정부는 음흉한 어린애 같다. 그 가당치도 않은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다. 그건 공정한 경쟁도, 스릴 있는 모험도 아닌, 철없는 악덕일 뿐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때 그 못된 친구놈에게 하지 못한 말을 지금 노무현 대통령에게, 김지태 대추리 이장님의 입을 빌려 하겠다.

“잘못 출제된 시험지에 답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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