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수0, 한미FTA를 만나다

[에뿌키라의 장정일기](11) - 대장정 마무리

나는 대학에서 한국의 소설을 가르치고 있는 시간강사다.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에 쓰는 사람이다. 강의하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으니 공부하는 데는 참으로 안성마춤(?)인 직업인 셈이다. 욕망만 조금 줄이면 비정규직인 현재의 처지가 그렇게 고달프지도 않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 마시라. 비정규직이 고달픈 인생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난 혼자 산다. 내 직업에 가장 필요한 책도 대부분 도서관에서 빌려보거나 나보다 조금 더 부유한(?) 동료들에게서 빌려본다. 몸도 타고난 게 건강체질이다. 한때 술을 과도하게 좋아해서 술값이 많이 들었으나 이젠 술도 지겹고 해서 술값도 번 셈이다. 그러니 크게 돈 들어갈 데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없는 건 아니다. 내 수입에 맞춰 내 욕망이 적절히 오그라들어 준 것이다.

사실 그보다는 나의 능력 부족이 나의 욕망을 줄였다고 해야 하리라. 나도 남들처럼 좋은 책을 써서 인세로 먹고 살 수 있는 날을 꿈꾼다. 그쯤 되면 어느 정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 나 같은 능력에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하랴. 대신 이런 저런 공부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데 최대의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가려 안간힘 쓴다.


대학 연구실 한 칸 얻어 공부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신세를 난 정확히 알고 있다. 학부생이었을 때 그들은 대개 운동권이었거나 사회운동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술자리에서도 현실정치에 대한 이죽거림을 버리지 못한다. 이 이죽거림은 그들의 욕망의 한 표현이다. 세계에 대한 못마땅함, 그런 세계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 연구자라는 직업 세계에 갇혀 사는 자신에 대한 염증 같은 것. 이런 상황에서 술자리의 이죽거림이라도 없다면 어디 그것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으랴.

현재 국가는 학술진흥재단을 통해 엄청난 돈을 뿌려가면서 연구자들의 미래를 움켜잡고 있다. 1~3년 정도, 길게는 7년 정도 매년 2500만원 정도 되는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이 시간강사라는 비정규직에겐 학술진흥재단 프로젝트를 잡는 것뿐이다. 그러니 모두들 그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거의 해마다 갱신되는 학술진흥재단 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자들은 자신의 미래가 정확히 돈과 교환되는 과정을 생생히 체험한다. 아니, 미래는 오로지 돈이 된다. 돈만이 미래다. 연구자들의 꿈도, 현실 변화에 대한 욕망도 오로지 저 학술진흥재단의 돈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연구자들은 국가에 의해 포섭당한다. 한때 국가의 외부이고자 꿈꾸었고 행동했던 그들이 이제 다채로운 미래를 국가에 저당잡히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서 권태를 본다. 그것도 아주 똑똑히.

나는, 제도권 밖에서 지식을 생산하고 분과 학문에 머물지 않으며 지식간의 경계를 횡단하고 삶을 변혁시킬 수 있는 지식을 꿈꾸는 젊은 연구자들의 단체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하고 있다. 전공인 문학보다 철학이나 사회과학을 더 좋아했던 나는 이 공간에서 공부하는 삶에 만족하고 있다. 그렇지만 먹고 살아야 할 밑천이 문학이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주로 문학을 가르치고, 연구실에서는 철학쪽을 공부한다.

이중생활. 그래도 행복한 이중생활이다. 어줍잖은 지식인답게 난 연구실에서도 남들이 하는 공부를 대충 따라하는 편이다. 선두에 서서 막막한 공간을 탐색하는 더듬이같은 지식인은 못 되는 셈이다. 아니, 원래 지식인이란 게 선두에 서길 두려워하는 존재 아니던가. 적당히 눈치보는 자들의 대명사, 지식인. 나에게 지식인이란 이런 이미지에 가깝다.

이번 연구실의 대장정도 나에겐 그처럼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이었다. 내가 만난 것이 아니라 만나진 형국이다. 한미FTA?, 장애인차별철폐? 미군기지 확장반대? 앗, 어느새 이것들이 연구실의 주된 화두가 되었단 말인가? 박사논문이랍시고 겨우겨우 구색 맞춰 준비하고 있던 나, 그래서 연구실 한 구석 집필실에 처박혀 유배 아닌 유배를 당하고 있던 나. 그런 나에게 불온성(?) 지수가 급작스레 상승한 연구실 동료들의 얼굴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부안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걷겠다고 한단다. 아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부안에서 서울이면 천리, 약 400KM가 아닌가. 군대에서 행군 좀 해본 날새망정 그렇지 않았다면 풀코스로 뛰겠다고 덥썩 나설 뻔하지 않았는가.


걷기란 힘겨웠다. 물집도 잡히고 근육도 땅기고. 나이를 속일 수 없는 것인지 3일만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대낮이 고통의 연속이었다면 한밤은 기쁨의 순간이었다. 우린 낮엔 걷고 밤엔 그 지역 주민들을 만났다. 우린 낮엔 죽어가는 생명들을 보았고 밤엔 그 아픔 때문에 그 땅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새만금에선 바닷물을 애타게 찾으며 죽어가던 수많은 조개들을 보았다. 그 조개들의 죽음을 보며 이것이 재앙이 되어 인간을 찾아갈 때쯤 인간들이 반성할 거라며 새만금을 떠나지 못하는 어민을 보았다.

농촌에선 늙은 농부들을 보았다. 10년 후면 이 세상을 떠날 농부들을 보았다. 어차피 10년 후면 죽을 이 목숨, 왜 미리 못 죽여서 난리인지 알 수 없다며 한탄하던 농부들을 보았다. 한미FTA가 자신의 목을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 늙은 농민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 무슨 거창한 이론과 철학이 필요하랴. 이것들이 있어야만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미FTA가 뭔지 좀 상세하게 알아야 움직일 수 있다고, 아 자꾸 재촉하지 말라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나. 그러나 새만금의 조개들은, 새만금의 어부들은, 대추리의 농민들은 그것을 삶 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 걸린 문제임을. <생명이냐, 자본이냐>


난 한때 지식인이 가장 전위적이고 혁명적인줄 알았다. 학생도 예비지식인이니 학생이야말로 현실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당연히 운동권이 아닌 학생들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걸어오면서 만난 대중들을 통해 지식인이야말로 가장 현실에서 멀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민들, 농부들, 이주노동자들, 장애인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본의 논리, 개발의 논리, 선진국의 논리, 국가 이익의 논리가 얼마나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 명확히 깨닫고 있었으며 분노하고 있었다. 이 억압받는 대중들에게 전지구적 경제의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선진국의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미국 주도의 패권적 군사전략도 통하지 않는다. <대중들의 삶이냐, 국가냐> <대중들의 삶이냐, 지구화냐> <대중들의 삶이냐, 선진국이냐> <대중들의 삶이냐, 재벌의 이익이냐> <대중들의 삶이냐, 한미FTA냐> 이 이분법을 단순하다고 하지 말라. 이 이분법이야말로 대중들이 자신의 삶에서 투쟁을 통해 얻은 세계의 본질이니깐.

대중의 아픔과 대중의 분노를 몰라버리게 된 지식인들. 이 명쾌한 이분법 앞에서 주저하는 지식인들. 이제 지식인들이 변해야 할 때가 왔다. 미국이라는 예외적 권력 국가를 중심으로 전쟁이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구적 경제 속에서 아무런 선택의 능동성도 없이 초국적 기업의 제품을 쓰면서 살아가야 할 우리들. 한미FTA를 통해 미국식 삶의 양식만을 선택해야 할(이건 사실 강요된 선택이다) 우리들. 지금 세계는 이런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며, 우리들의 삶도 심각하게 위태로워지고 있다. 대중들은 이 우울한 미래를 현재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들의 파괴되는 삶을 통해.

대중들에게 접근하는 통로를 잃어버린 지식인들. 스스로를 변화시켜 갈 조직을 상실해버린 지식인들. 삶이 권태가 되어버린 지식인들. 그 지식인들이 움직여야 한다. 스스로 조직해야 한다. 그 어떤 형태도 좋다.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세계는 지식인들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의 말이 현실의 두께를 얻기를 바란다. 죽음의 현실을 알기를 바란다. 우리의 말이 이제 그 두께와 그 무거움으로 권력을 겨누는 무기가 되기를 바란다. 국가에 저당 잡힌 우리의 미래를 해방시켜야 한다. 저 멀리 대중들이 앞서 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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