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혜적, 선순환적 관계의 광장문화는 가능한가

[월드컵 너머 연속기고](4) - 월드컵과 광장문화

‘대한민국’의 두 번째 월드컵이다. 2002년의 첫 번째 월드컵을 약간의 광기를 동반한 ‘흥분의 월드컵’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2006년의 두 번째 월드컵은 아마도 ‘비장한 월드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가미가제 출정식을 연상시키는” 붉은 응원리본과 락버전으로 되살아난 ‘애국가’, 그리고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광장을 찾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 응원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 이런 광경을 보며 월드컵과 거리응원에 대한 흥분과 기쁨보다도 오히려 “대한민국 대표팀이 16강 아니 결승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범국민적 국가주의․애국주의에 기반한 ‘비장함’을 더 느낀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월드컵 반(反)광장문화?

한편, 2006년 월드컵 응원문화는 2002년과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장문화의 부재’다. 2002년의 거리응원을 ‘광장문화의 실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에 대해서는 이따가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당장에 평가전이 열리는 시청 앞 광장으로 가보자.

2002년 거리응원의 직접적인 결과로 생겨난 시청 앞 광장. 앉아서 축구보기 딱 좋을 것 같던 잔디광장은 질서 유지를 위해 펜스가 설치되어 구획되었고, 음주와 질서문란 등을 막는다는 이유로 배치된 경비용역업체 직원들은 정해진 곳으로만 다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프로그램을 보며, 정해진 규칙에 맞게 응원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더 이상 거리응원의 에너지를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광장문화가 부재하다”는 말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분할과 그 속에서의 자율성의 침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보다 근본적으로, 광장에서의 소통이 일방향으로 또한 위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시민들은 국가-권력, 자본-권력, 미디어-권력에 의해 점령당한 광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비록 현란한 스펙타클을 소비하며 즐거워할 수도 있겠지만, 주어진 무대와 화면에 집중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객체’로 전락하고, 이로 인해 몸은 광장에 있지만 실제로는 고립, 소외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더욱 문제인 것은, 4천만 모두가 ‘붉은악마’가 되고, 붉은 티셔츠를 입어야만 광장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정체성으로 인해, 즉 ‘내부성’과 ‘순수성’에 기반한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다른 집단과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월드컵 반(反)광장문화’가 만들어진다는데 있다.

광장open space, 열린 공간

‘광장’이란 말 그대로 ‘open space’ 즉 ‘열린 공간’을 말한다. 특히 ‘광장문화’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우리는 ‘광장’을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주적인 소통과 교류가 발생하는 곳, 다시 말해 공동체 구성원 간의 ‘관계성’이 발현되는 곳(공간, 지점, 계기)으로 ‘광장’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제대로 된 광장이 없었다”라는 말은 이제 기각시킬 수 있다. 어렸을 적 동네 꼬마들이 뛰놀던 공터, 시장 한 켠 약장수가 약을 팔며 차력을 하던 시장터가 바로 ‘광장’이고, 또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상을 나누던 평상이 바로 ‘광장’이 되는 것이다.

사실 2002년 월드컵의 거리응원을 ‘광장문화’라고 일컬은 것은, 바로 열린 공간으로서의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월드컵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 구성원 간의 소통과 교류, 선순환적인 관계성이 복원-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의 경험을 통해 많은 사회문화 연구자들이 한국 사회 변화의 동력을 읽어내면서, 87년 이후 상실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재현을 꿈꾼 것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했다.

이는 한편으로 구체적인 공간에 대한 기획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공간이 사회마다 다르며 또 이질적”이라며 공간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고 했던 뒤르켐의 말처럼, 한국 사회 토건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충실히 재현하며 도시민의 삶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모순을 반영하는 형태로 조직하고 있는 도시공간을 재배치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한 계획이 제출되었다.

권력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 세종로 일대에 문화시설을 배치하고 광장을 조성하자는 계획은, 2002년 당시 확산되었던 민주적인 소통과 교류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공간-문화 전략으로 자본주의 하 도시공간에서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찾기 위한 기획이었다.

광장문화를 소비하는 3주체

하지만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출발한 문화적, 미학적 상상력은, 결국 정치-권력, 자본-권력, 미디어-권력이라는 광장문화를 소비하는 3주체의 프리즘에 굴절되고 말았다. 효순, 미선이의 죽음으로 촉발된 촛불시위로 다시 한 번 광장문화가 소생하고, 이후 대선과 파병, 탄핵 등 주요 정치적 계기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광장)로 모였지만 결국에는 정치, 자본, 미디어의 힘 앞에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청 앞에 덩그러니 자리잡은 잔디광장과 촛불의 힘으로 당선되었다는 노무현 정권의 실망스런 모습뿐”이라는 자조섞인 한숨이 결코 과장은 아닌 듯하다.

시청 앞 광장을 잔디로 만들어 자유로운 출입을 막고(“잔디를 보호합시다!”), 광장 사용 ‘허가제’를 도입하여 진보진영의 집회를 원천봉쇄한 정치-권력. 2006년 월드컵 자본-권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SKT가 150여억 원으로 월드컵 기간 내내 광장 사용권을 독점한 채, 경비용역업체까지 동원하여 광장을 구획, 관리하며 거리응원을 쇼케이스로 만들고 있는 상황. 그리고 3․1절을 ‘축구절’로 만들며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월드컵 보도로 막아버린 미디어-권력. 이들 3주체가 장악한 광장문화로 인해, 오히려 월드컵 거리응원과 광장문화의 중심이 되어야 할 ‘시민/다중/인민의 권력’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광장, 2006년 월드컵과 광장문화 재현의 가능성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소실되었던 광장문화를 복원․생성할 수는 없을까? 2006년, ‘open space’에 걸맞는 ‘open mind’의 재현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치, 자본, 미디어 등 월드컵을 장악한 반(反)광장문화-권력에 맞선 호혜적이고 선순환적인 광장문화의 복원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다분히 상상불가능한 기획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이 3패로 예선탈락했으면 좋겠다”는 류의 부정과 무시의 전략으로는, 이주노동자들마저도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폭주와 국가주의․애국주의의 문화적 영향력과 위험을 감당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장문화’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행동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광장문화’의 민주주의적 전유의 가능성이 호혜적이고 선순환적인 관계성의 복원에 있다고 할 때, 월드컵이라는 ‘광장’에서 닫히지 않은, 배타적이지 않은, 타인과의 호혜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사건과 계기, 소통을 만들어야 한다.

월드컵에 대한 탈근대적, 탈자본주의적 문제제기와 함께 한미FTA와 평택평화항쟁, 비정규직과 사회양극화, 이주노동자, 이라크 파병문제 등이 소통될 수 있는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찾을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광장의 복원, 즉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복원(잔디광장 리모델링, 세종로 문화광장화 등)과 민주적 소통을 위한 광장 운영의 복원, 그리고 자본에 의해 장악된 광장의 시민적 재전유에 대한 실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FTA반대 골세레머니’를 기대할 수 없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덧붙이는 말

최준영 님은 문화연대 정책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최준영(문화연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