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 체포되었지만 계속된 父子의 저항

[가마타 사토시의 산리즈카 40년](4) - 이시이 츠네지 씨에게 듣는다

토호부락에서 점심을 먹었다. 원팩 공동출하장의 건물 바로 옆에 12미터 높이의 병풍철막이 둘려쳐져 있고, 그 안쪽에는 2180미터의 [결함 활주로]로 향하는 유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요코보리 공동묘지. 주변의 나무들이 다 제거되어서 석비만이 덜렁 남아있다.

계속되는 거친 엔진소리가 울려퍼지고, 거대한 꼬리날개를 세운 점보제트기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륙하기 직전의 엔진을 가속화하는 소리와 함께 압도적인 굉음이 머리를 내려칠 것처럼 엄습해 온다.

공동출하장은 입구가 넓은 작업장으로 되어있고, 여기에서 운반된 야채가 분별되어, 박스에 담겨지고 소비자에게 보내진다. 뒤쪽 부엌이 있는 [휴게실]에서 비닐팩으로 야채를 싸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이시이 츠네지, 이시이 노리코 부부가 맛있게 만들어준 된장찌개와 야채볶음, 카레가 큰 나무테이블에 진열되었다. 원팩야채라는 것은 우리 집에도 이미 25년 이상 배달되고 있다.

단지에 살았을 때는, 근처의 사람들 10세대를 조직했었는데, 지금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돌아가신 분도 있고, 이사를 간 사람도 있다. 최근에 한꺼번에 플라스틱 야채 케이스에 담겨져 배달되어 오는 야채를 전부 소비하는 게 어렵다며 그만 둔 사람도 있다. 현재는 가까운 퇴직한 학교 선생의 집과 단 두 세대만이 원팩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새벽, 출근길이 혼잡하지 않을 때, [에 아저씨]라고 불리는 Y씨가 벌써 25년 이상 운송책임을 지고 있고, 팩케이스에 들어있는 야채를 문 안쪽에다 넣어준다. 생산자들도 예전에는 농지나 퇴비장을 공동으로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예전에 반대동맹 중에 최강이라고 불렸던 나베타 부락. 나카고 부락은 집단 이주하였다. 나카고 부락 이전지에 세워진 집단이전의 비

이시이 츠네지씨는 이시이 다케시 씨의 장남이다

[이시이 다케시의 생애](나나츠모리 서관출판)에도 적혀있지만, 다케시 씨는 우리들이 [공항폐쇄요구 선언의 모임]을 만들어서 당시 현지조사를 갔을 때 처음으로 만난 반대동맹 측의 농민이었다. 마에다 토시히코 씨와 둘이서 인사를 하며 돌아다녔는데, 위원장의 토무라잇사쿠 씨, 키타하라 사무국장은 농민 출신들이 아니었다.

당시는 71년 강제행정 집행 후였기때문에, 반대동맹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매우 개성적이었고, 당시 한사람 한사람의 인터뷰 기록을 남겨놓았어야만 했다. 책을 쓰고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점점 미이라를 잡는 사람이 미이라가 되어 버린 것 처럼,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당시는 관제탑 점거를 향한 투쟁이 가열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토호 부락의 부지에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 이시이 씨의 집의 경우는, 아버지 다케시 씨와 아들 츠네지 씨가 번갈아 가면서 구치소에 들어간 독특한 일가이기도 하다. 처음 인사드렸을 때, 다케시 씨는 자신의 집안은 자민당 지지자들이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자민당에 예절을 지킨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절대 공항반대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것이 산리즈카 문제의 모든 것이다. 왜 반대를 하였는가 하면 백성을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수파(혁신계라고 말해도 같은 결과였겠지만)와 관료들의 방식이었다.

그러한 방식은 계속되었고, 다케시 씨가 돌아가시기 직전, 비행에 장애를 준다며 토호신사의 고목을 자기들 마음대로 무단으로 잘라버렸다. 위법적이고 신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파렴치한 행위였다. 이후에도 도둑처럼 벌목은 계속되어왔다. 현재까지 그들은 일방적으로 비행기를 날려보내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소불위의 야만이었고, 그것에 대항하는 백성들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이시이 츠네지 씨
부자가 4번 체포되었다.

츠네지 씨에게 최근의 근황을 물었다. 체포자가 많았던 청년행동대 중에서도 가장 체포당한 경력이 많은 그였다. 그것도 부자지간에 4번이나 체포된 것은 일본의 민중투쟁사 속에서도 매우 희귀한 경험이기도하다. 이처럼 산리즈카의 투쟁은 가열찼고, 탄압도 또한 철저하게 들이닥쳤다. 그는 이야기할 때 고개를 숙이면서 말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산리즈카 투쟁 속에서 대표적인 인물 아니냐고 조금 농담섞인 말로 치켜세우며 취재의 의도를 말하였다.

"아녀, 아녀, 그러한 시대는 지났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구. 될수록 안 할려고 노력하고 있고(웃음). 생각해보면 특별히 뭐 대단한 실체도 아무 것도 없는데, 단지 과거의 훈장에 불과하지."

공항이 운영되고 있지만, 지금도 여기에서 언제나처럼 밭을 갈구면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역시 기적과도 같다고 봅니다.

"그것도 뭐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예요. 이런 시끄러운 소음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음, ..이렇게 버티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가 만족해 합니까?

"그러니까(웃음), 그렇게 옛날 사람들이 있다니까. 예를 들어, {당신들은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신들의 투쟁이다}라고 들은 적도 있기 때문이야. 어떤 사람에게는 물론, {흠, 그런 생각은 조금 지나친 것 아닌가}하며 말대꾸를 했지만"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하여 여기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물론이고. {농담하지 마라}라고 말했어요. 이런 것을 명분으로 팔고 있다 없다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예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여기 와서 그냥 10년 넘게 살고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예요."

저희들은 점심때 와서 잘 모르겠는데, 저녁의 최종비행기는 9시 정도입니까?

"아니예요. 밤10시 정도까지예요. 그 정도가 되어야 비행기가 오지 않아요."

하지만, 소음은 낮보다 훨씬 굉장하겠죠. 위압감도 그럴 것이고. 몸에 영향을 미친다던지 그런 것은 없나요?

"몸에 영향이라..귀청이 울려요. 최근 나이탓에 그런가 생각해버리지만.."

아직 귀청이 울릴 정도의 나이는 아니쟎아요?

"대체로 그런 편인데.. 어찌되었든 비행기 운행이 시작되고 나서부터인데, 고공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어요."

언제나 그런가요?

"아니요. 큰 소리를 들으려하면, 귓속에 무엇인가가 울려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의사에게 간 적은 있나요?

"의사한테 가더라도, 암처럼 많이 진척되지 않으면 모르쟎아요. 치과에 간 적이 있는데, 조금 더 지나고 나서 보여달라고 그럽디다(웃음)"

산리즈카 투쟁에 대해서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어허(웃음), 투쟁이라고 말하지만, 투쟁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는가 생각해요."

그렇지만, 가끔 그때 그랬지 라거나 뭐 생각하신 적은 없나요?

"아니요, 별로. 과거를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점점 몸에 좋지 않으니까. 될 수 있으면 나는 잊고 살려고 해요."

그거야 그렇네요.

"결국 과거의 것을 생각한다해도 기동대에 쫓겨다니는 꿈이나, 구치소에서 자고있는 꿈을 꾸게 되요. 별로 좋은 기억들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실크콘비나이트 구상의 파산

아버지 이시이 다케시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실크콘비나이트를 갑자기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그것에 대한 의식이 강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츠네지 씨도 그때 콘비나이트의 연수를 받으러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렇지요."

우리들은 이해하기를, 실크콘비나이트 구상이 있었고, 이것을 부수고 공항이 들어왔다 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좀더 생각해 보면 콘비나이트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것이 실패하고 나서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대거 나가버리게 되는 큰 요인이었다고 보는데요.

"물론, 공항은 하나의 큰 요인이었습니다. 내가 고등학생인 18살 때이니까, 그때 시작되었어요. 공항도 실크콘비나이트 구상도. 농업은 전환기에 왔다 라고 누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인식을 반영하는 말이지요. 따라서, 농업 그 자체를 어떻게 해서든지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해 보자는 것, 즉 보리나 낙화야채 등은 끝났고, 다른 야채나 과일, 또는 축산 등 그러한 방향을 모두가 지향하고 있었어요. 나는 단가이세대(한국의 해방둥이)이고, 장남이었기 때문에, 농업고교에 갔지만, 농업을 하려고 남은 사람들은 역시 적었어요. 여기 있는 이들이 대부분 농업고교 출신들이에요."

아, 농업고교 동창생들이었군요

"농업고교에 진학했다고 하더라도 동창생이 많지는 않아요. 3분의 1에서 4분1정도가 남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농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들이지요. 농업고교는 성적과는 관계없이, 나는 축산을 한다, 나는 돼지 사육을 할거다..이런 식이었죠. 따라서 당시에 농업은 전환기에 왔다 라고 말해졌기 때문에, 농업의 장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중요한 점에서 다들 점점 공업분야를 지향해서 떠나갔지요. 당시에는 전업으로 먹고 살 것인가 아니면 농업을 그만 둘 것인가, 그때부터 계속 고민해 왔던 겁니다. 역시 무슨 기회만 있으면 농업을 그만두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지요."

실크콘비나이트라는 것은 다른 곳에서 시험케이스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없었다고 봅니다."

연수에 갔었지요?

"연수는 나가노의 신쥬대학에서 했는데, 거기에 섬유학부가 있어서 양잠도 기계화를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해서 농업에 공업을 활용하는 식의 발상이 있었고, 기계화양잠으로 도입되었어요. 그것을 농업구조개선사업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산리즈카에는 어떤 입지조건 도입되었나요?

"여기는, 꽤 평지가 많습니다. 따라서 기계를 도입하기 쉬웠지 않나 싶네요."

기계화양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양잠이라는 것은 손작업이 많아요. 뽕잎을 따와서, 집안의 누에 위에 그 것을 올려주고, 또 나중에 양잠의 알을 다 옆으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기계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뽕 잎을 자르는 것도 기계로 한번에 자르고, 큰 철로 된 연결판이 있어서, 콘베야벨트처럼, 뽕잎은 벨트가 회전하면서 그대로 움직여요. 다음 번 철판으로 연결되고"

그러면 누에도 함께 움직이겠네요.

"그래요. 누에도 흘러가는 것처럼. 그것을 2회, 3회, 이번에는 왼쪽, 오른쪽으로.. 흘러요."

그러면, 누에는 왔다 갔다 하면서 점점 커지는 것이네요

"맞아요.(웃음)"

그런데, 왜 그런 시도가 갑자기 중지되었나요?

"공항이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실시한 곳은 있나요. 산리즈카 말고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성공하면 되쟎아요.

"아니요, 다른 곳으로는 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해가 안 가요. 공항이 들어와서 파산한 것은 알지만, 그런 프로젝트자체는 성공해도 되잖아요. 다른 지역으로 가서 하면 되고

"음, 말하자면, 국가도 농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며 어느 정도 심혈을 기울인 것 같은데, 역시 잘 안된 것 같아요. 양잠이 있고, 양돈이 있고, 양계도 있고, 이런 것들을 전부 실시하게 했쟎아요, 국가로서는. 무슨 사업, 무슨 시범실시 등을 내세우면서요. 이런 것들이 다 잘되지 않았고, 양잠도 그 가운데 하나였어요. 농림성도 적극적으로 기계화양잠을 해보려고 했는데, 공업이 발전하면 할 수록, 역시 농업과 공업은 맞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거야 지금의 결론이지만

"그래요. 그러니까 그때 이후를 계속 보면, 농업은 하면 할수록 적자라는 구조속에서 실패해 가요. 다들 그 피해를 본 것이고. 양계도, 양돈도 다 실패했어요."

미깡도 실패했지요.

"그래요 미깡도 실패했고, 북해도의 농가들도 완전히 패작했어요."

  가마타 사토시 씨
그런 것은 농민들에게 큰 부채네요. 뽕나무밭을 다시 밭으로 만들고, 필요없는 시간이 다시 리고, 그러는 사이에 농업을 해 갈 자신이 없어지고, 따라서 공항에 땅을 팔아버리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일까요?

"맞아요. 그런 이유로 농촌과 농업이 파산해 가는 것은 명백한데, 여기는 그 문제가 공항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다른 지역에도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또는 다른 형태로 과소지역이 되어 가쟎아요. 그런 의미에서는 이곳의 사람들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릅니다.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는 마을이 없어져도 돈이 되지만, 다른 농촌은 과소지역이 되더라도 돈이 되는 것이 아니쟎아요."

다들 부채만이 남는거군요.

"여기는 실패하지는 않았어요. 실크콘비나이트 구상의 허가가 있는 후 1년 후에 공항의 내각결정이 있었어요. 공항결정지와 실크콘비나이트 지역은 완전 일치했어요."

실크콘비나이트에는 몇 가구 정도가 가입했었습니까?

"500가구 정도였습니다."

거대한 프로젝트였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산리즈카 투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다고 생각합니까?

"투쟁을 해 온 것은 그 시대의 흐름이었고,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 뿐이었어요. 지금 그것을 똑같이 하라고 해도 지금은 그러한 환경이 아니고, 나이도 들고 해서 좀처럼 하기는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죽창과 각목을 들고, 당당히 걸어다닌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그때가 이상할 정도이지요. 단순하게 했던 행동도 아니었고, 기동대를 때려눕힐 때도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연한 분노였지요. (다음호에 계속)

[번역] - 이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