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세월을 날아와 꽂힌 화살

[유영주의 전망좋은談](4) - 석궁 이야기

법이란

석궁 사건 딱 1년 전인 2006년 1월 15일, 김명호 교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이다.

"법(法)이란? 물수(水)변에 갈거(去), 즉,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자연스러운 것. 이런 글자 뜻과는 달리, 옛부터 큰 도둑 또는 기득권층 보호하는 용도로 쓰여져 왔다. 왕조의 첫 건국자들이 하는 일의 첫 작업이 도둑질 못하게 하는 법을 공포하는 것이지 않았던가?(반역죄 등) 자신의 도둑질은 다 끝냈으니 빼앗기지 않으려고, "얘들아~ 이제부터 도둑질하면 혼난단다."


2005년 9월 21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민사 제23부(부장판사 이혁우)는 김명호 교수의 교수지위확인청구소송을 기각했다. 약 한 달 후인 10월 18일 김명호 교수는 이 판결에 불복, 서울고등법원 민사 제14부 다(부장판사 이상훈)에 항소를 접수시켰다. 윗글을 올린 때는 그로부터 약 세 달이 지난 시점...

이즈음 김명호 교수는 판사가 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노골적인 불만을 피력했다. 자신의 항소심을 재판부가 민사소송법에 따라 집행하지 않는다는 호소였다. 가령 대법원이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례법'을 어긴다며, 현대미포조선 김석진 씨 3년 5개월, 김민수 교수 3년 7개월, 84년 해직된 윤명만 교수 건 등을 들어 위법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강한 자가 불리한 사건이면 약자가 굶어죽든가 늙어죽기를 기다리는지 한도 없이 시간 끈다"며 항변했다.

06년 1월 2일 김명호 교수는 "새해에는 판사님들 법과 규칙을 지키기 바란다. '국민을 섬기는 법원' 말만 하지 말고, 판사 스스로 부터가 법을 지켜 모범 보이기 바란다"는 새해 인사를 남겼다. 이강국 판사의 판결에 불만을 가진 할머니, 태광실업 장민식 씨, 약국 아줌마, 목기 명장 서태랑 씨, 울산의 김성순 씨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모두 사법부의 판결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었다.

1년 후인 07년 1월 15일 저녁, 김명호 교수는 석궁과 칼과 노끈을 소지한 채 박홍우 판사와 조우했다. 박홍우 판사의 아파트 복도에서 김명호 교수는(가 들고 있던) 석궁을(이) 발사했(됐)고, 김명호 교수는 체포되었다. 김명호 교수는 '국민저항권'을 언급했다. "법문을 무시하는 판사에게 국민의 마지막 권리로써 국민저항권을 행사하려 했다. 법을 무시하는 판사들에 대해서 사법부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이길 것으로 100% 확신했다" "항소 기각은 사형선고였다"고 말했다.

김명호 교수의 '국민저항권'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항소심 패소와 함께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서라고 했다. 추측컨대 김명호 교수의 '국민저항권'은 항소심 결정과 관계없이 훨씬 전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명호 교수가 국민저항권을 학습한 흔적은 1인시위 일지에서도 확인된다.(1인시위 일지. 06년 11월 30일). 가령 가장 약한 국민저항권을 1인시위로 인식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1인시위 일지. 06년 12월 13일)

김명호 교수는 재판 하루 전인 1월 11일 한 동창과의 전화통화에서 "정신적 공황상태에 와 있다. 내일 판결이 잘못되면 이젠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그래도 비리만은 반드시 밝히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꼭 이슈화를 시키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궁 사건 발발 한두 시간 전인 1월 15일 16시 48분, 김명호 교수는 지인들에게 '법원의 조직적인, 성대입시부정사건 은폐공작'이라는 제목의 링크 메일을 보냈다.(http://geocities.com/henrythegreatgod/etc/corrupt2.htm) 서울중앙지법 2005가합17421 및 서울고법 2005나84701의 민사14부, 26부, 2부의 '판사', '성대 재판지연 방조', '무법리생트집', '불법탄압' 등의 사례가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슈화'를 위해 많은 시간 준비한 흔적이 베어 있는 알기 쉬운 도표였다.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도표를 만들었을까... 불과 한두 시간 전인데 이걸 어디에서 메일로 보냈을까. 석궁 사건을 접하고 다시 열어본 메일... 먹먹한 가슴 누를 길 없었다.


저항권

석궁 사건 발발 약 1달 반 전, 김명호 교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국민저항권을 정리해 놓았다.

저항권이란, 입헌주의적 기본 질서를 침해하거나 파괴하려는 국가 기관 또는 권력의 담당자에 대하여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다른 법적 구제 수단이 더 이상 없을 경우, 헌법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국가 기관이나 권력 담당자에게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저항권은 국가권력에 의하여 헌법의 기본원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행하여지고 그 침해가 헌법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다른 합법적인 구제수단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국민이 자기의 권리·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실력으로 저항하는 권리"(헌법재판소 1997. 9. 25 97헌가4)
저항권 :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국가권력의 불법적 행사에 대해 그 복종을 거부하거나 실력행사를 통해 저항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 한국의 경우 헌법에 저항권의 규정이 없고 다만 법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라는 문구를 명시함으로써 저항권의 근거 규정으로 삼고 있다.(두산세계대백과)


또 다른 글에서 김명호 교수는 국민이 법을 위반한 판사를 처단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의하지 않은 냉철하고 공정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적인 처벌을 금하고 시비와 범죄에 대하여 국민은, 법에 의한 판단을, 판사들에게 위임한 것이다. 따라서, 그 막중한 권한을 거머진 판사가, 자신의 편리에 따라, 고의로 법을 위반하며 생존권 박탈하는 결정을 한다면, 국민은, 국민의 이름으로, 법 위반한 판사를 처단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김명호 교수의 '석궁 사건'을 국민저항권 행사로 단정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한 개인이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벌인 사적 분풀이라고 규정하기에도, 불복종운동으로서의 저항권의 행사라고 규정하기에도 모두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세계인권선언 전문에 따르면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라고 쓰고 있다. 적극적으로 바꿔 말한다면, 법이 인권을 보호하지 않으면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은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유주의 국가들은 혁명을 하면서 인권 체계를 수립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혁명을 할 때 무기를 들어라, 무기를 들 권리가 있다 라고 호소했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에 저항하며 무기를 들었고, 프랑스는 절대왕정에 맞서 무기를 들고 반란했다. 그러면서 인권 체계를 수립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아메리카 식민지 정착민들이 포악하고 야만적이며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영국의 통치에 맞선 저항이었다. 그럼으로써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국가들은 자신이 똑같은 도전을 받을 때는 그것 즉 '인민의 동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확인된다. 헌법 전문에는 저항권 개념이 스쳐 표현되어 있지만 하위 법률에는 그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은 계승해야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불의에 항거할 권리는 명문화 해놓지 않고 있다. 한 인권활동가는 이를 두고 '자유주의 인권의 배부름'이라 힐책했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법제 하의 인권 논리로 볼 때 사적 보복은 인정하지 않는다. 인권을 가진 시민 일반의 총체적 의사를 법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에 저항하는 것은 시민 일반의 총체적 의사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체제에 저항하는 시도에 대해 자유주의 법제는 그 저항을 시민 일반의 총체적 의사에 반하는 것으로 몰아가 통제, 억압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때에 따라 강력한 공권력 행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들이 고민하는 것이 불복종운동이다. 특정 계급과 계층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법이 작동될 때, 현실에서 법이 인권을 보장하지 않고 반한다고 판단될 때, 공개적이고 의도적으로 법을 어기고, 법을 어김으로서 돌아오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불복종이다. 그리고 그 개인적, 집단적인 다양한 형태의 저항을 불복종운동이라 일컫는다.

김명호 교수가 학교와 사법부로부터 받은 부당함은 석궁 사건을 계기로 자세히 알려지고 있다. 김명호 교수가 77다300 판례를 자신의 문제로 인지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석궁 사건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김명호 교수가 겪은 '부당함' '억울함'에 대한 네티즌의 동정과 옹호 여론은 쉽사리 식지 않고 있다. 김명호 교수 개인이 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김명호 교수는 스스로 10년 전에는 수학자였지만 지금은 법학자라고 이야기한다. 77다300을 놓고 겪은 억울함을 낱낱이 토로했고,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고도 거부하는 연구자, 학원, 사법부 모두를 고발했다. 상고심과 관계없이 법정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는 말이다.

김명호 교수의 법정 싸움은 77다300을 복구하기 위한, 또는 86다카2622 판례 적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요하고 끈질긴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77다300이 살아있고 적용되었다면 1975년 이후 대학에 의해 재임용을 거부당한 490여 명의 연구자 대부분의 삶은 왜곡되고 일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당국의 재임용 거부 횡포도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명호 교수의 실천은 우리 사회 약자로서 겪는 부당함과 불의에 항거한 저항의 성격을 뚜렷이 한다.

우리 사회구성원 다수는 이미 신자유주의 체제와 그 모순에 따른 현실 무게감에 의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특정 지역 주민이나 특정 노조 조합원에게 집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최종적으로는 개인의 고통 문제로 소급된다. 고통은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소로는 국가(정부)를 향한 저항을 "동의하는 각 개인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내리는 도덕적 판단"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불복종운동을 이야기하는 한 그것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이고 보다 공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제에 또는 국가나 정부에 저항하는 운동에서 으뜸으로 꼽는 덕목은 연대다. 사회 발전과 계급투쟁의 발전은 크고작은 연대에 의해 이루어져왔고, 연대의 가치는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든 더욱 강조될 것이다.

유감이지만 김명호 교수는 이런 점을 간과하거나 소홀히 했다. 김명호 교수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약한 수준의 저항권의 표현이 1인시위 라고 한다면, 그보다 높은 수준의 저항권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운동이어야 한다. 그러나 1월 15일 석궁 사건은 가장 약한 수준의 저항권을 강도와 방식만 바꿔 적용했을 뿐이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한 김명호 교수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 이슈화를 위해 절치부심한 끝에 벌인 일이란 점도 십분 이해된다. 하지만 강도와 충격이 컸을 지는 모르지만 높은 수준의 저항은 아니었으며, 결과에서 보이듯이 그 자체로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한편 김명호 교수가 1월 18일 임종인 의원 접견 시 진술한 사건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테러' '살해기도' '살인미수'와 같은 용어는 매우 부적절해 보인다. 박홍우 판사, 김명호 교수, 경비원, 운전사 등 현장에 있던 증인의 진술에 따라 이후 법정 공방이 벌어질 것이고, 법정은 현행 법체계에 따라 판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석궁 사건은 즉자적으로, 돌발적으로 빚어진 사건이 아니다. 김명호 교수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실천으로서의 '직접 대면'의 현장이었다. 던진 질문은 "항소 기각 이유가 뭐요?"였다. 벼랑에 몰린 한 개인이 마지막으로 던진 절박한 항의이자 절규였다. 이론의 여지가 있을까. 김명호 교수의 석궁 사건에 저항권의 성격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는 걸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개념 없는 진보 논란

나는 06년 4월, 김명호 교수를 단 한 번 만났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인터뷰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인터뷰 당시 나는 여느 연구자처럼 자신의 학문에 충실하며, 연구자로서의 삶을 살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한 연구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석궁 사건 이후에도 이 생각은 그다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김명호 교수를 '진보적' 연구자로 생각지는 않는다. 석궁 사건 이후 일각에서 판결문을 통해 알려진 과거 반운동권적 언사를 놓고 약간의 논란이 있는 듯 하나, 이건 석궁 사건의 본질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리고 김명호 교수가 지금 진보적인 교수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일은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정렬 판사가 '진보적' 판사인지 가십 여부도 마찬가지다. 이정렬 판사가 직접 쓴 '법원가족' 같은 글은 흐뭇하기도 하거니와, 양심적 병역 거부 판정 새뜸은 유쾌한 소식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재임용 판결이나 석궁 사건과 관련해서는 진보적이지도 않거니와 진보적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보적 판결을 한 판사가 써내려간 판결문이지 않느냐 라는 식의 가치판단은 허상이다. 이정렬 판사는 한겨레21(1월 30일자)의 인터뷰 기사에서 "법원에 왔으면 법의 잣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법의 잣대'가 제대로 서 있는지, 구부려져 있는지, 아주 거꾸로 서 있는지 문제야 앞으로도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이다. 다만 재임용 판결에 어떤 법의 잣대를 들이밀었기에 그런 판결문이 나왔는지는 회의스럽다. 가방끈도 짧거니와 법이라고는 국가보안법 정도 밖에 모르는 처지지만, 내가 봐도 이번 판결문은 잘 줘야 D학점 정도 아닐까 싶다.

성균관대학 당국과 사법부의 '횡포'는 김명호 교수가 진보적이냐 아니냐 때문에 빚어진 일이 아니다. 성대입시 부정사건을 문제삼은 학문적 양심과 행동 딱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잘못 출제된 시험 문제 하나, 잘못 된 걸 잘못 되었다고 따진 것 뿐이고, 잘못 된 건 잘못 되었다고 간단히 인정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도대체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지는데 보수냐 진보냐의 잣대가 동원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말이다.

한편으로는 김명호 교수의 시위일지를 보다보면 눈살 찌푸려지는 장면도 없지 않다. 가령 김명호 교수는 06년 1월 18일 "수학사랑에 강연차 전주에 가보니 400여 명의 중고등학교 수학선생들이 왔다고 하는데, 여선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90% 정도... 수학교육의 앞날이 캄캄. 모든 것이 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대법원 탓"이라고 쓰기도 했다.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 모르나 이런 반여성적 표현으로 미루어 김명호 교수의 진보적 소양에는 뭔가 미심쩍은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호 교수가 양심과 진실을 지키기 위해 굽히지 않고 싸워왔던 이력을 문제삼는 일은 없어야 한다. 10년의 세월, 17개월의 1인 시위의 이력은 진실과 정의에 대한 신념이 없고서는 가늠하기조차 힘든 실천이다. 그래도 폭력은 안 된다는 걸 과잉 강조하거나, 개인의 성격이 어떠하다거나 식으로 진실과 정의를 위한 '싸움의 이력'을 희화화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라진 77다300

'연구자 김명호'가 '석궁 김명호'로 탈바꿈 된 데는 사법권력의 법 집행 과정이 중대한 한 원인을 이룬다. 김명호 교수는 법 집행 과정에서 법 집행의 형평성을 보장받지 못해 결국 최후에 국민저항권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사실 여부는 더 가려져야겠지만, 박홍우 판사와의 조우와 석궁 사건은 17개월의 1인시위의 무게만으로도 극단적인 저항의 성격을 피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석궁이 없었던들 무엇이 달랐으랴.

따라서 석궁 사건은 신자유주의체제 하에 구조적으로 억압받아온 한 개인의 극단적 저항의 성격을 띤다. 물론 이런 정의는 위험할 수 있다.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을뿐더러 개인의 구체적인 저항의 문제를 '극단적 저항'과 같은 단어로 간단히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건 아니다. 그러나 석궁 사건을 지극히 개별적인 한 인물의 해프닝으로 보거나 수많은 형사 사건 중의 하나로 가벼이 소급하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법부는 형식적으로만 독립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의 바탕 위에서 이른바 '자유, 평등,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87년(헌법)체제의 모순과 맞물려 있다. 물론 지난 민주화 20년 동안 크고작은 사법개혁의 성과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사법부가 87년체제의 불완전성, 반동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법 집행 과정의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령 김명호 교수가 재심 법정에서 민사소송법 등 사법부의 법 집행과 관련, 십 수가지 절차와 규정을 따진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에 다름 아니라는 이야기다.

77다300(1977년 대법원 판결)은 86다카2622(1987년 대법원 판결)에 의해 굴절되고, 86다카2622가 적용되면서 재임용제도가 악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86다카2622는 재임용 기대권을 인정하지 않고 임용기간 만료와 함께 당연 퇴직으로 해석한다. 판례 변경을 위해 거치도록 되어 있는 전원합의체, 그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거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훼손된 사례를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인데 이는 87년체제의 불완전성 내지 반동성과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86다카2622를 두고 과잉 확대해석 할 일까지는 아니겠지만, 사법부 내부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거치지 않아 더 큰 문제를 만들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수많은 법 조항의 재개정이 이루어져왔고, 77다300과 86다카2622는 그 수많은 법 조항 중 눈에 띠지도 않은 아주 작은 판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례 하나, 법 조항 하나가 석궁 사건이라는 희대의 해프닝 연출의 모태가 된 것이다. 석궁 사건은 재임용 판례 변경 과정에서 전원합의체를 거치지 않은, 즉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지 않은 사법부의 사소한 (의도적) 실수 하나가 우리 사회 평범한 한 개인을 어느만큼 극단으로 내몰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2003년 사립학교법 제53조의2 제3항을 해석한 2003다5264와 2003재다262는 김명호 교수로 하여금 법리 논쟁 제안으로까지 이어졌다. 77다300이 살아있고 87년 이후에도 적용되었다면, 그리고 사립학교법 제53조를 달리 해석했다면, 지금 '석궁 김명호'는 분명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김명호 교수는 04년 12월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에 통과되면서 재임용 재심 기회가 열려 입국을 결심했다. 김명호 교수는 05년 2월 25일 교육소청심사위원회에 재임용 거부처분취소 청구, 05년 3월 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교수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2005년 9월 1심에서 패소하고, 이어 지난 1월 12일 2심에서도 패소하는 불운을 겪었다.

김명호 교수가 재임용거부처분취소 청구와 교수지위확인 소송을 낸 후 법정에서 대면한 건 '법대로 하지 않는 법'이었다. 김명호 교수는 법률 해석 변경을 할 경우 전원합의체를 거쳐야 하는데(법원조직법 제7조 1항의 3) 이를 지키지 않은 데 주목했다. 그래서 06년 3월 22일 양승태 대법관에게 공개 법리논쟁을 제안하고 나섰다.

김명호 교수는 06년 4월 17일 재판관들을 상대로 '2006 형제24637 사건에 대한 맞고소 및 국제적 망신, 성대입시부정은폐 방조하는 판사들 고소(직무유기 또는 직권남용)'라는 제목의 고소장을 냈다. 95년도 성대입시부정사건의 진상을 밝혀 △공공의 이익과 사회정의를 세우고 △개인적으로는 성대에 복직 등의 행복추구권리(헌법 제10조)를 행사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신속한 재판받을 권리(헌법 제27조의 제3항)가 피고소인들의 집단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으로 인하여, 침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금식 대법원 경비대장, 김영수 경비담당 책임자, 이혁우 판사, 이상훈 판사, 홍성무 판사, 이광범 사법정책실장 등이 대상이었다.

김명호 교수가 요구한 건 입시부정 진상 공개와 복직이었다. 그것은 공공의 이익과 사회정의, 그리고 개인의 행복추구권리 자체였다. 말하자면 김명호 교수는 시민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요구했지만, 대학과 사법부는 지난 10년간 한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결국 한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 하나는 김명호 교수가 사법부를 상대로 무모해 보일 정도로 집요한 법적 대응을 했지만,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나 사법개혁을 위한 정치활동의 맥락을 갖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사법부는 이 문제를 가볍게 보지 말지어다. '테러'와 '살인미수'라는 미디어의 비난 공세와, 진보적 판사가 써내려간 판결문과 소회를 밝힌 글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판결이 시민사회로부터의 여론의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겸허하게 돌아볼 일이다. 김명호 교수가 재심 소송을 하면서 주장한 것이 모두 맞다고 볼 수는 없겠다. 하지만 역지사지해 보라. 법의 잣대 운운하기 전에 양심에 손을 얹고 자연인의 입장에서 심리와 재판 과정을 복기해 보라, 또 교육자적 자질에 초점을 맞춘 판결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라. 김명호 교수는 심리 과정에서 한 번, 판결문에서 또 한 번,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침해당해왔는 지가 뚜렷이 가늠될 것이다.

97년 이후 10년

공교롭게도 김명호 교수는 1987년에 내려진 판례에 의해 1997년 재판에서 패소했고, 1997년부터 10년의 시간이 흐른 2007년 재심 소송에서 다시 패소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 얼마나 역설적인 연대기의 기록이더란 말인가.


왜 2007년의 대한민국 사법부는 한 개인에 대한 인권 침해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어이없는' 판결(문)을 내리고 말았을까. 왜 김명호 교수는 인권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법권력의 핵심 판사들과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맞짱을 떠야 했을까.

1987년 대법원 판결, 86다카2622 판례는 하나의 작은 사건일 수 있겠지만, 87년(헌법)체제의 맥락에서 확대 조명하면 민주화에 역행하는 결정이었다. 86다카2622는 합당한 명분과 적절한 절차를 밟지 않고 기존 판례를 뒤집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윽고 민주화와 개혁의 진전에 힘입어 2003년 2월 헌재의 구 사립학교법 제53조의2 제3항이 헌법불합치 판정과, 2004년 4월 김민수 전 서울대 교수의 대법원 승소 등은 86다카2622의 결함을 개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법부는 그 가능성에 등을 돌렸고, 김명호 교수의 호소에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2005년 9월, 김명호 교수가 1심에서 이혁우 부장판사로부터 패소 판결을 받던 바로 그때, 이용훈 대법원장은 대법원장 지명자로 국회 인사청문특위의 구설수에 올랐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탄핵 심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단으로 활동했던 '개혁 인사'로 꼽힌다. 그러나 도덕성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 소속 청문의원들은 이용훈 지명자가 지난 2000년 퇴임 후 5년간 수임료 기준으로 60억 원을 벌고 등록 재산만 22억 원이 증가했다며 전관예우 공세를 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변호사 시절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 상무에게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헐값으로 발행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의 배임 혐의로 기소된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이 사건은 한때 이상훈 부장판사가 이어받았지만 아직도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대법원장 취임 직전까지 삼성 에버랜드 측 변호를 했고, 2006년 2월 이상훈 부장판사가 민사 14부에서 형사 5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사건을 맡은 바 있다. 이때 대법원 인사실장은 이광범 사법정책실장으로, 이상훈 부장판사의 동생이었고, 이광범 사법정책실장이 이용훈 대법원장의 핵심 측근이란 사실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 이광범 사법정책실장, 이상훈 부장판사 모두 광주일고 출신이라는 점도 눈에 띤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1997년 진로 부도 이후 골드만삭스가 진로 최대 채권자로 등장하고, 이후 하이트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민사소송 4건을 맡은 바 있다. 이 과정에서 골드만삭스는 1조 원 규모의 차익을 챙겼고, 국부 유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주)진로와 소송을 벌였던 세나인베스트먼트 측 민사 사건 대리인으로 활약, 약 2억5천만 원의 보수와 수임료를 받았다. 그런데 신고시 5천만 원을 누락, 2천만 원의 종합소득세를 탈루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세나인베스트먼트가 골드만삭스의 페이퍼 컴퍼니인줄 몰랐다고 해명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어보인다.


사법부는 유회원 론스타코리아 대표의 영장을 네 차례에 걸쳐 기각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변호사로 있던 시절 유회원 대표가 맡긴 외환은행 건 수임과 관련이 깊다는 지적이다. 대검 중부수가 네 번이나 영장을 청구하고도 구속되지 않은 사람은 유회원 대표가 처음이다. 법의 형평성 문제만 놓고 봐고 삼척동자의 심기조차 뒤틀릴 일이다.

진로와 외환은행 사건 의혹에는 해외 투기자본과 김&장 법률사무소가 공통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진로 사건에서는 골드만삭스의 페이퍼컴퍼니의 변호를 맡았고, 당시 재판부는 김&장 법률사무소가 실질적으로 소송을 챙긴다고 인정한 바 있다. 외환은행 사건에서 법률 검토는 김&장 법률사무소가 맡았지만 소송은 당시 변호사였던 이용훈 대법원장이 수행했다. 유회원은 론스타코리아의 대표이고, 론스타의 법률대리인은 김&장 법률사무소이다. 외환은행은 적게는 3천4백억 원에서 많게는 8천2백억 원이나 싸게 팔렸다고 한다.


김명호 교수가 06년 6월 7일 재정신청서에 밝히고 있는 '성대입시부정사건 진상조사 재판지연 도표'는 성대 출신 이혁우 판사와 이광범 전 인사실장, 형 이상훈 판사, 성대 출신 홍석무 수석 등의 관계를 보여준다. 여기에 이용훈 대법원장까지, 사법부 핵심 판사들을 상대로 한 김명호 교수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김명호 교수가 이들 사법부 핵심 인물들과 조우하게 된 건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다.

김명호 교수가 만난 사법부 인물들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지배체제 '위에서' '독립되어있는' 사법권력의 핵심들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 금융정책이 열어준 기회를 틈타 먹튀를 자행한 해외 투기자본을 변호하거나, 삼성 자본의 이해를 대변해온 대표적 '개혁' 인물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력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의혹에서 좀처럼 자유롭지 않다.

재임용 승소를 놓고 법대로 해달라고 매달린 김명호 교수가 이들 사법권력의 핵심들과 조우한 건 그 자체로 험한 일이다. 김명호 교수는 그저 학문적 진실과 시민으로서의 행복할 권리를 위해 대한민국 법정에 섰을 뿐이다. 그러나 1997년 패소 후 10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10년이었고, 그저 민사소송법 따위의 법을 지키지 않는 판사들을 만났을 뿐이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세력과, 삼성 자본과, 삼성이 운영하는 성균관대학의 이익을 따지는 사법권력의 핵심 판사들을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10년 동안 대한민국 금융 시장을 유린해온 해외 투기자본의 횡포는 계속되었고, 김명호 교수는 해외 투기자본과 삼성 자본의 법정 변론을 맡았던 거물 판사들을 상대로 힘겨운 1인 저항을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명호 교수의 시위일지에 에버랜드 전환사채 건, 외환은행 헐값 매각 건, 론스타 건, 김앤장 법률사무소 건 등은 그저 가십거리로만 다뤄지고 있다. 김명호 교수에게 있어 이러한 사실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김명호 교수는 상대가 누구든 관계없이 학문적 양심과 진실을 파헤쳐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으로서의 행복을 되찾는 데 모든 힘을 쏟았을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

그날, 세상이 사람들이 테러라고 난리를 피우던 날, 김명호 교수가 박홍우 판사한테 던진 질문은 단 한마디, 단 한마디 뿐이었다. "항소 기각 이유가 뭐요?"

석궁 메시지

김정란 시인이 "중세기 기사들이 말 달리면서 사용했던 무기. 수학자는 왜 '석궁'을 선택했을까? 그는 왜 자신의 분노의 메시지를 사회에 전할 무기로 하필이면 '석궁'을 선택했을까?"라고 물었다. 현실은 문학적 상상력을 여유있게 누려볼 만큼 한가롭진 않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만큼은 곱씹어 볼 이유가 있다.

김명호 교수가 낭인과 같은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지난 10년, 그러니까 1997년 패소 이후 뉴질랜드와 미국을 건너다니며 무보수 연구직으로 전전하다, 어떻게 민주화와 개혁이 좀 되었다 싶어 재심을 청구하며 들뜬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이 땅 대한민국의 10년은 x-파일에서 시작해서 황우석 사태로 일단락 되고 있었다. x-파일에는 김명호 교수가 패소했던 97년 당시 정치-자본-언론-검찰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김명호 교수가 재임용의 희망을 갖고 다시 고국을 찾은 2005년부터는 x-파일을 쏙 빼닮은 희대의 황우석 사기극이 준비되고 있었다. 황우석 사태는 신자유주의 지배체제 10년의 응집된 허구가 한꺼번에 표출된 사건이었다. 황우석 사태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진실은 밝혀졌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그런데 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황우석 사태 1년이 되는 즈음, 석궁 사건은 또다른 색깔과 질감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학문적 양심을 포기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쫓았던 평범한 한 연구자의 실천은 석궁과 함께 극단적 저항의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한 개인의 극단적 저항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지배시스템, 그 지배권력의 재생산 메카니즘의 치부를 다시금 드러내 보여주었다. 석궁 사건은 x-파일과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난 권력-자본-학원-언론의 거대한 지배담합구조, 여기에 사법권력이 뿌리깊게 결탁해 있다는 의혹을 폭로하고 있다. 이 석궁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자세히 뜯어보지 않고, 그저 돌출적인 해프닝으로, 그저 한 개인이 겪은 안타까운 사건 정도로 취급하며 무심코 지나가도 되는 건지는 정말 되짚어볼 일 아니겠는가.

사족같은 이야기지만 문득 이런 의문 하나가 나를 괴롭힌다. 황우석 사태 때도 그랬고, 이번 석궁 사건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사회구성원 다수는 늘 '진실'과 '정의' 편의 손을 들어준단 말이다... 시민들, 네티즌들... 불의에 단호하고 정의에 환호하면서, 그리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진보적 가치의 실현이란 어쩜 이리도 느려터졌고 어쩜 이다지도 더디더란 말인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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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김 교수가 썼다는 “법(法)이란? 물수(水)변에 갈거(去), 즉,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자연스러운 것.”

    제가 알기로는 이런 풀이는 오해입니다. 법의 어원은 전혀 다른 데 있다고 합니다. 아래는 법사상사 전공자인 최종고 교수의 글 일부입니다.
    (출처는 http://www.oasis.go.kr/data/data2/resource/11000/10861/ )
    ---------

    ... 동양의 전통적 정의 상징인 해태 상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해태상은 광화문에도 섰고, 국회의사당 앞에도 섰고, 심지어 뜻도 모르고 곳곳에 남립(濫立)되고 있다. 해태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재판을 할 때 갖다 세우면 반드시 죄지은 자에게로 가서 하나인 외뿔로 떠받는다는 고사(古事)가 있다. 그래서 法字의 占字는 灐字로서 해태가 정의의 상징으로 들어가 있다. 해태는 외뿔을 가진 일각수(一角默, unicorn)인데, 우리나라의 해태 석상(石像)들은 뿔이 없는 것으로 잘못 변형되었다. 서양에선 유니콘이 말(馬) 모양에 긴 외뿔을 갖고 있다. 플로랜스대학의 미술사가 프랑코 카르디니 (Franco Cardini )교수의 논문에는, 서양의 유니콘 전설이 중국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유니콘은 해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 형태와 의미가 서양식으로 변질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졸저 「정의의 상을 찾아서」, 1994)

  • 팩트

    유희원 대표의 영장을 기각한 것은 영장 전담판사인데, 마치 이용훈 대법원장이 기각한 것처럼 쓰셨군요. 그렇담 판사들은 모두 대법원장 지시를 받는 부하직원이라는 결론인데, 좀 비약 아닌가. 판사들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현행 법 체계 상 재판정에서 판사를 설득할 증거를 내놓을 수 없으면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김명호 교수도 결국 변호사 도움 없이 독불장군처럼 혼자 하다가 결국 재판에 졌죠. 판사는 원고와 피고가 내놓은 주장을 근거로 법률에 맞게 판단합니다. 인정에 끌려 새로운 결론을 내고 싶어도 법조항에 갇히는 거죠. 문제는 현행 법에 있지(법을 만드는 것은 국회 몫입니다) 판사가 정의에 반한 인물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낼 수 없는 게 실정입니다.

  • 유영주 기자

    위 팩트 지적 감사합니다. 기사에서 유회원 대표 네 차례 영장 기각과 관련한 법원과 검찰의 공방, 4자회동 의혹, 이용훈 변호사 시절 당시 외환은행 사건 수임과의 관련성 등 자세한 내용을 담지는 않았습니다만, 압축해서 정리하다보니 이용훈 대법원장이 직접 기각한 것처럼 서술되었습니다. 사법부가 기각한 것으로 정정합니다.

  • gg

    법의 글자 기원은 첫댓글처럼 해태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고 본문대로 풀이하는 설도 있고 그래요.. 뭐더라 또 다른 설도 있는데.. 하여간 문헌조사해서 여기다 올릴 만한 사항은 아니니깐 이 정도로..^^

  • gg

    '변론주의' 내세우면서 법원으로서는 제대로 한거다라는게 법률가들이 마지막 항변으로 내세우는겁니다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판결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리고 김명호 교수가 웹에서 밝힌 자신의 입증활동만을 참조해보더라도, 판사가 기각했어야 마땅하다는 필연성은 안 보이네요. 교수자질이 어떤것이야 하는가에 대한 판사의 개인적 가치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죠. 원고가 주장 입증을 더했다 한들 바뀌지 않았을 걸로 보이는데요?

  • 김중권

    좋은 글,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블로그에 걸어놓고 싶군요.
    kurena2k.egloos.com 입니다.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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