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플대란, 민방위훈련 아닌 실제상황

[진보논평] 영어광풍에 대한 근본적 성찰계기 되어야

진보전략회의(준)는 한국사회 주요 전략아젠다에 대한 진보적 정책생산을 목표로 모인 연구자, 활동가들의 전략네트워크이다. 사회운동의 통합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운동과 운동을 이어주고 지역, 부문, 현장에서 운동기획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표방하고 있다. 진보전략회의(준) 회원들이 주요한 사안에 대해 발표하는 '진보논평'을 민중언론참세상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국내 입시를 위한 토플 수요의 폭증

지난 4월 10일, 토플시험 출제 및 주관사인 ETS가 일방적으로 시험접수를 중단하면서 응시생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감을 알아챈 ETS가 급기야 수석부사장을 한국에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문제의 발단은 ETS의 일방적인 접수중단이었으나 ETS사가 토로했듯이 한국의 폭발적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벌어진 ‘예견된’ 사태라 할 수 있다. ETS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토플시험 응시자 54만 명 가운데 한국 응시생은 13만 명(20%)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토플시험 1회 응시료가 170달러(약 15만원)니까 한국 응시생들이 지난해 ETS사에 낸 돈만 해도 무려 2,210만 달러(195억원)에 달한다.

지난 2002년 토플 응시자가 7만 명 정도였으니 4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응시생이 늘어난 셈이다. 게다가 올해 응시생은 무려 2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원래 토플의 목적이 영어권 대학 입학에 활용되는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 응시생의 70~80% 가량이 중고생이라는 점이다. 즉 외국 유학을 준비하는 대학생들보다 국내 입시를 위해 시험에 응시하는 중고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얘기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대학의 수시입학, 국제중, 특목고의 특별전형에서 토플과 같은 공인영어시험 성적이 입시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일파만파 퍼지자 제일 먼저 민감하게 대응한 곳이 ETS가 아니라 외고 교장단이라는 사실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정작 특목고(외고)가 영어시험성적으로 입학생을 선발하는 비중은 전체 입학생의 10%가 채 안되지만,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이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영어사교육을 시작하는 시기도 점점 빨라져 초등학생의 과반수가 초등 저학년 때부터 영어사교육을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토플 응시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반면, 작년부터 시험방식이 인터넷 기반 형식으로 바뀌면서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시험횟수가 줄어들고 시험인원에도 제한이 생겼다. 이러자 시험접수 하루 전날부터 ETS의 홈페이지를 한국 학생들이 장악하여 ‘광클’을 해대니, 다른 나라 사람들로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슬픈 현실이 벌어진 것이다. 또는 인근의 다른 나라에 ‘원정’가서 시험을 보는 일도 생기고, 심지어 아파트 분양권 딱지마냥 프리미엄을 붙여 응시권을 매매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ETS가 한국 학생들 때문에 다른 나라 학생들이 피해를 본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입시학원이 공개되지도 않은 SAT 문제를 유출시키거나 토플 기출문제 유형을 꼼꼼하게 분석하여 반복적인 문제풀이연습을 시켜주니 한국 학생들의 SAT 점수를 모두 무효 처리하거나 토플의 시험유형을 바꾸는 ETS의 처사는 십분 이해할 만도 하다.

미국 평가업체들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다

ETS(Education Testing Service)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SAT, AP, 토익, 토플, GRE 등과 같이 문제 개발, 시험실시, 채점 등을 담당하는 미국의 비영리 민간업체다. ETS 같은 평가업체(testing service)는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기꺼이 시험을 치르고자 하는 한국 학생들 덕에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다.

지난 2002년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만들어진 NCLB(No Child Left Behind) 법은 전국의 모든 학생들의 학업성적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쉴 새 없이 학력평가시험을 치르게 만들었다. 3학년부터 8학년까지는 해마다 수학과 읽기 또는 국어 시험을 봐야 하며, 고등학생들은 한 번을 치른다. 그리고 2007-2008학년도부터는 초중고 모든 학교에서 적어도 한 번은 과학시험을 봐야 한다. 이렇게 모두 합하면 한 학구에서는 한 해에 모두 17번의 시험을 치러야 한다. 따라서 시험을 개발하고 채점하고 성적데이터를 관리해주는 회사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실제로 NCLB 법 덕분에 미국에선 사설 학력평가업체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는데, 미국 정부회계국에 의하면 2002년부터 2008년까지 각 주에서 시험을 치르는 데 대략 19억 ~ 53억 달러의 돈을 써야 한다고 한다. 이러자 초국적 거대기업들이 이 유망한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학력평가기업을 차렸고, 대략 3~5개 업체들이 학력평가시험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따라서 부시정부가 NCLB를 입법하려고 할 당시 관련 업계의 로비가 대단했던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특히 부시 가족과 특정 업체 사장과는 오래전부터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부시가 집권하자마자 해당 업체 관계자를 백악관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부시와 평가업체의 긴밀한 결탁 속에 NCLB 법이 통과되었고, 덕분에 평가업체들은 떼돈을 벌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는 미국의 평가업체들이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욕구가 이번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미국은 테스팅 서비스 시장 진출에 관심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토플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유별난 대학입학경쟁 덕에 형성된 한국의 거대한 사교육시장은 미국의 평가업체들이 눈독을 들일만큼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미 독점을 하고 있는 영어인증시험(토플, 토익 등) 뿐만 아니라 SAT, AP 등 대학입학과 관련된 과정도 이미 한국에 진출해 있거나 들어올 계획인데, 앞으로도 시장점유가 더 확대되리라는 점이다. 일부 대학들은 특정 계층 학생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하고 염치없는 주장도 일삼고 있다. 그 결과 논술, 본고사, 심층면접, 특기적성, AP 등의 방법으로 가정배경이 우수한 소수의 학생들을 독점하고 있으며 소수 학생들을 독점할 수 있는 선발방법은 해를 거듭하며 진화중이다. 특히 최근에는 외국고교 출신학생들을 받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SAT를 입학전형요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다른 대학들에도 연쇄적으로 확대될 조짐이다. 토플로 선발하는 특목고와 대학의 입학생 비율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 토플 응시생 수를 보라.

일부 대학이 일반전형에서까지 SAT나 AP로 신입생을 선발한다고 나선다면 그것이 미칠 영향은 토플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각 대학의 자유롭고 다양한 선발방식이 확산된 덕분에 사교육시장은 끝도 없이 팽창하고 있으며, 미국의 교육기업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더군다나 한미FTA까지 약속된 마당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으리.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토플 대란이 한미FTA 협상이 타결된 직후에 벌어졌다는 건 심상치가 않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협상에서 테스팅 서비스 분야는 ‘미래유보’ 대상이 됨으로써 이미 사실상 개방된 상태를 유지하되 차후에 새로운 규제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고 공식 발표되었지만, ‘미래유보’ 조항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구가 들어가 있는지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한국 정부가 나중에 어떤 규제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야금야금 미국 업체의 평가시험이 한국 교육시장을 장악하는 추세 속에서 미국 평가업체가 횡포를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 한 해 대학입학지원자가 50 ~ 60만 명이라고 하면, 이번 토플 대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시장에서 공급자의 횡포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데에 있다. 더군다나 한미FTA 협정상 미국 기업의 영업행위를 한국 정부가 규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히려 이들이 한국의 대학입시정책을 무력화시킬 수가 있다. 이를테면, 수능시험을 국가가 관장한다는 사실이나, 정부가 자랑해마지 않는 EBS 수능강의에서 의무적으로 수능문제를 출제하도록 하는 정부의 방침은 ‘간접 수용’에 해당하거나 ‘이행의무부과금지’에 위배되기 때문에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에 제소당할 수도 있다. 제아무리 교육부가 ‘3불’ 원칙을 고수한다 해도 말짱 헛일이다. 과연 그때 가서도 공정거래위원회나 일개 변호사가 호기롭게 ETS를 조사하겠다고 큰소리 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 토플 사건이 앞으로 있을 실제상황에 대비해 ETS가 미리미리 충격완화 차원에서 한국 학생들을 훈련시킨 건 아닌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든다. 제발 기우이길.

영어광풍에 대한 근본적 성찰 계기가 되어야

안타깝게도 이번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수습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미친 듯이 휘몰아치고 있는 영어광풍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반성은 찾아보기 힘들고, 특목고 입시에서 토플 점수를 반영 안한다든지, 애국심을 동원하여 ETS를 몰아내고 토종 영어시험을 개발한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정리되고 있다. 애꿎게도 학교에서 영어를 제대로 못 가르친 탓이라며, 학교에서의 영어교육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상급학교 진학단계에서의 치열한 경쟁 탓에 학교가 나서서 특정 계층에게 유리하기만 하다면 어떤 수단이든 동원하여 대다수 학생들을 배제시키며, 평가를 왜곡시켜왔다. 논술이 그랬고, 영어가 그랬다.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 영어 탓에 빚어진 이번 사태는 아쉽게도 또 다른 문제점과 갈등을 예비한 채 정리되면서 영어자본에서 소외된 대중들은 또 다시 한숨만 내쉬게 생겼다. [진보전략회의(준)4.25.]
덧붙이는 말

배태섭님은 진보교육연구소 사무국장으로 진보전략회의(준) 회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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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찐따

    ㅄ아 난 찐따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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