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사랑을 강요하지 마세요

[집중이슈 : 맹세야, 경례야 안녕~](5) - 양심적 병역거부자 용석 님

첫 번째 편지

하루 종일 듣고 있어도 지겹지 않고, 밤을 새서 불러 보아도 언제나 설레는 마음. 노래를 불러 봐도, 그림을 그려봐도, 온 몸으로 춤을 춰 봐도,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다가서면 멀어지는 지평선 같은,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최고의 선물, 사람.

제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저도 한 때는 당신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당신의 아픈 과거에 눈물 흘렸고, 우리의 용감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위험할 때에는 내 한 몸을 희생해서라도 내 사랑을 구하리라 다짐했었죠. 그 때 제 사랑의 순수함과 진실함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참 어리석었었죠. 언제부턴가 저는 저의 사랑을 되돌아보기 시작했어요. 베트남의 정글과 이라크의 사막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 사랑이 악용되고 있구나. 내 고귀한 사랑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 사용되는 것을 보고서 저는 심하게 부끄럽고 심하게 죄스러워 차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참 요상하지요.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는 모든 것이 다 좋아보이고, 온갖 허물을 다 용서할 수 있었는데, 콩깍지가 벗기니 안보이던 것이 보이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당신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남도의 붉은 흙을, 동해의 높은 파도를, 저 깊고 넓은 지리산을, 일상에 휘청거리는 서울의 어느 골목길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비루한 군상들과 그들의 밥상을 채우는 익숙한 음식들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답고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는 한국어를 사랑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것들이 당신과 동일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책임은 있겠지요. 진실을 바라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할수록 자꾸만 화가 나요.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사실은 조작된 것이기 때문이에요. 바로 당신에 의해서. 당신은 당신이 아닌 것들이 마치 당신인 마냥 나를 속여왔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걸어왔습니다. 반복되는 주문만큼 강력한 마법은 없다는 거 아시죠? 하지만 이제 저는 모든 걸 알아버렸습니다. 제 사랑의 실체를 알아버렸습니다. 이제 당신의 주문에 걸려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두세요. 사랑은 신이 내려주신 감정입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없어요.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제 의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은 그 어떤 찬사로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해 낼 수 없지만, 억지로 만들어내거나 강요된 사랑은 그 어떤 악취보다도 초라하고 구차합니다. 그러니 제발 내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두 번째 편지

나와 당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나 했습니다만 역시나 제 부탁을 들어주는 척 하다가 무참히 짓밟아버리는군요. 그래서 이렇게 다시 펜을 들고 편지를 씁니다.

당신께 편지를 보내고 나서 곰곰이 당신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당신이 나를 속이고 나에게 사랑을 강요했기 때문도 아니고, 당신이 내 사랑을 악용해 몹쓸 짓을 해서도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고, 얼마나 행복과 평화를 해치는 일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 당신을 사랑하면 안 되는 관계인 것이죠. 그 이유는 당신이 너무나 거대한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너무 거대하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 저에게 얼마나 무자비한 폭력인지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당신과 나의 힘의 차이는 비교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런 관계에선 애초 동등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거대한 힘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당신의 거대한 힘에 묻혀 저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랑도 존재가 독립하지 못하고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저의 존재가 소멸하는 것을 저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의 이유,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선 다른 많은 것의 사랑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신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인 만큼, 저는 보다 많은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오로지 당신에 대한 사랑만을 제게 강요합니다. 당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하여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사랑끼리 충돌하지 않습니다. 결국 당신은 사랑이란 탈을 쓴 복종을 저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포기함으로써 저는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거니까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당신과의 관계를 완벽하게 끊기는 참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당신의 흔적이 펼쳐져 있으니까요. 깊은 산속은 물론이고 저 하늘과 바다까지 인간의 것이 아닌 세상에도 당신의 손길이 뻗쳐 있다는 것이 놀랍고 씁쓸합니다. 이 현실을 인정한다면 당신과 난 사랑이 아닌 다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네요. 어떤 관계일지 구체적으로 표현은 안 되지만 적어도 당신의 거대한 힘에서 제가 자유로울 수 있어야 서로에게 건강한 관계일 겁니다.

하지만 끝끝내 당신이 저에게 사랑만을 강요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의 무지막지한 힘이 두렵지만 당신과 맞설 수밖에요. 이것만 알아두세요.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당신은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전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제가 없으면 당신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덧붙이는 말

용석 님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로 현재 수감되어 있다.

태그

폭력 , 사랑 , 국기에 대한 맹세 ,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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